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86
185
헬무트
185화
13장 진실과 고백
축제의 느슨함도 잠시, 그레타 아카데미는 빠르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중간고사는 순탄하게 끝났다. 2학년끼리의 대련이 실기시험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헬무트의 수준에서 대련을 1분 이상 끄는 게 가장 어려웠다. 전 학기보다 격차가 더욱 심해졌기에.
1학기에 비하자면, 교양 과목도 훨씬 점수 받기 쉬운 것을 고른 터라 시험에 특별히 준비가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헬무트가 선택한 교양은 ‘그레타 아카데미의 설립’이었다.
단순 암기 과목으로 그저 열심히 외우기만 하면 되었기에 특별한 글 솜씨나 사고력이 필요하지 않다.
특히 기억력이 우수한 헬무트에겐 쉽디 쉬운 과목이었다.
‘이번 학기에는 전 과목 만점을 노려볼까.’
아레아가 들어오기 전 마법 학부에서도 그랬지만 검술 학부에서도 전 과목 만점은 굉장히 받기 어려운 점수다.
그러나 헬무트는 자신만만했다. 그의 표정에 자신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시험 잘 본 얼굴이다?”
이번에도 차석으로 밀려날 것을 직감한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이미 차석 자리에 익숙한 시안이야 심드렁했지만, 아스카는 좀 기대를 한 듯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여지없이 뭉개졌다.
“방학 동안 무슨 강해지는 약이라도 먹었나? 왜 넌 확 세진 것 같냐. 비법이 뭐야.”
헬무트의 발전이 아스카의 눈에도 띄었던 모양이다. 그러는 아스카도 제법 실력이 늘었지만, 헬무트에 비하자면 턱없는 수준이었다.
비법이라면 땡볕에서 마물을 잡으며 팔마 기사단장처럼 강력한 상대와 사투를 벌이는 것일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헬무트는 다만 가볍게 말을 돌렸다.
“그보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곧 수행 과제가 있다던데.”
“응, 그거 저번 학기에 마법 학부가 했던 것과 비슷한 건데 이번엔 좀 다른가 봐. 이따가 오후 5시에 상세 내용을 여기 게시판에 공지한다던데?”
이번에는 드물게도 먼저 명확히 공지해 두고 교관이 따로 설명할 모양이었다.
“수행 과제라…….”
헬무트는 중얼거렸다. 아침에 나올 때 마주한 아레아가 오늘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왠지 두 일이 관련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게시판에서 공지를 확인한 순간,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마법 학부와 일주일간 공동 수행 과제라고? 그럼 마법 학부에 아는 녀석이 없으면 어떡하지?”
“이거 봐. 단독으로 수행해도 좋지만, 이왕이면 학부 간 상호 교류를 위해서 같이 하는 쪽을 권장한다고 적혀 있잖아. 조원은 최대 3명을 넘지 않는 것으로 한다고.”
“여럿이 뭉치면 놀러 다니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그렇겠지? 잠깐, 이건 누구한테 굉장히 유리한 거 아니야?”
“아, 맞아. 야, 헬무트! 넌 아레아와 친하잖아.”
“아레아와 같은 조면 그냥 가서 놀고먹어도 점수 좋게 받는 것 아닌가.”
“맞아 불공평해!”
아스카가 불만스레 외쳤다. 하지만 그는 곧 검술 학부 녀석들에게 타박을 받았다.
“너는 마법 학부 시안과 같이 조 짤 거잖아! 그 녀석도 차석인데 양심이 좀 있어라!”
“아니, 그런 이야기는 나눈 적 없는데…….”
아스카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안과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둘은 다른 학부임에도 유난히도 철썩 붙어 다니는 편이었다. 둘 중 하나가 여자였으면 빼도 박도 못 하고 사귀는 취급을 받았을 거다.
“결국 성적순으로 조가 짜이는 거네. 더럽구만.”
“이거 수석 차석끼리는 같이 조 못 짜게 항의해야 하는 거 아니냐?”
여장 대회 이후로, 아스카와 검술 학부 녀석들 사이는 좀 가까워졌다.
폭압적으로 굴면서 따로 놀던 아스카가 학부 행사에 참여하니까 더 가깝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스카가 변덕스러운 미친개라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는 괜히 눈을 부라렸다.
“야, 친분도 실력이거든? 그딴 항의 하다가 걸리면 죽을 줄 알아!”
괜히 엉뚱한 녀석과 조를 짜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에 미리 차단해 두는 것이다.
“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위협하냐!”
“너무하면 어쩔 건데!”
원성이 따랐지만, 아스카의 폭력은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를 거스를 수 있는 건 헬무트 밖에 없었다.
소란에서 비켜난 헬무트는 생각에 잠겼다.
‘수행 과제면 뭘 해야 하지?’
용병 일을 한다 쳐도 일주일은 너무 단기다.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마 검술 학부 녀석들에게는 애매하기에 마법 학부와 함께 하는 것으로 고안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헬무트가 고심할 필요는 없었다. 계획적인 아레아에게 따로 계획이 있으리라.
이번 수행 과제는 그리 성적에 많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
검술 학부 녀석들에게 윽박지른 아스카가 헬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아레아와 말해 볼 거지? 3명이니까 혹시 그 녀석이 단독 행동한다고 하면 우리랑 같이하지.”
괜히 헬무트를 다른 조로 떨구느니 같은 조로 들여서 점수를 동일하게 받는 게 낫다는 계산이었다. 속내가 빤히 보였다.
그래도 아레아와 헬무트의 조에 시안을 버리고 낄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게 양심적이다.
어차피 검술 학부 녀석들과 아스카의 사이는 개선되었지만, 그와 아레아의 사이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끽해야 한자리에 앉기는 한다는 정도?
“그래.”
헬무트는 조용히 답했다. 우선은, 아레아와 대화하러 가 봐야 할 터였다.
*
“공지는 봤지? 소원 두 개 치를 모두 없애 줄 테니. 나와 조를 짜자.”
기숙사로 돌아가, 아레아를 찾자마자 그가 꺼낸 말이었다. 아레아가 진지한 얼굴로 헬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헬무트는 의문을 드러냈다.
“함께 과제를 하는 건데, 왜 소원을 두 개나 쓰겠다는 거지?”
“내가 나를 위한, 어려운 과제를 할 예정이니까.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니, 위험할 거야. 나 혼자 하기에는 조금 까다로워서, 실력 있는 검사가 필요해.”
잘 생각해 보라는 듯이 말하는 아레아의 보랏빛 눈동자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아레아가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예사로운 과제는 아닐 테다. 하지만 그도 긴장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세한 건 떠나기 전날까지 정리해서 말해 줄게. 다만 과제는 쉽지 않을 거야. 그건 확실해.”
헬무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쉽지 않은 과제라면, 점수를 더 높이 받을 수 있겠지. 난 상관없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소원은 없애지 않는 게 좋겠어. 내게도 이로운 일이니, 소원을 쓰면 불공평하니까.”
헬무트는 원래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를 선호했다.
이걸로 뭘 요구할지 모르는 아레아에게서 소원 두 개를 모두 없앨 수 있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헬무트는 굳이 그걸 남겨 둔다고 말한 자신의 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저절로 입에서 말이 나왔다.
‘그래, 불공평하긴 하니까.’
헬무트는 친구라는 단어로 대충 자신을 이해시키기로 했다. 그 단어가 요즘 잘 들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래, 잘 부탁해.”
아레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빛이 몰려드는 듯한 눈이 황홀해지는 미소였다.
그것만으로도 헬무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나 아레아한테 약한 건가.’
힘의 우열과 다른 의미의 우열. 그것을 깨닫게 된 헬무트였다.
이제야 실감하게 된 것이지 쭉 그랬던 것 같기는 하다. 아레아의 마력은 감추어졌으나, 이상하게도 그 매혹은 자신에게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아레아 본연의 무언가일지도.
헬무트는 흔쾌히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단 일주일이지만, 둘만의 동행이 정해졌다. 아카데미 밖에서, 바덴 밖에서 아레아와 단둘이 함께하는 건 처음이다.
룸메이트도 함께 한 두 사람이니, 대수롭지 않은 동행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건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어쩌면, 무언가 변화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 두 사람 모두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불안하면서도 그 어떤 전투보다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슴 떨리는 예감이었다.
*
“모두, 외부 활동이니 그레타 아카데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게 행동에 각별히 유의하도록. 또한 어디까지나 조별 과제이니 단독 행동은 삼가기를 바란다!”
교관의 설명은 공지된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페트리샤 교관은 사고치지 말라며, 아스카 쪽을 노려보며 강조에 강조를 했다.
“아씨, 저 마녀 매번 나만 가지고 그런 다니까.”
아스카가 투덜거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조의 구성원과 수행할 과제에 대해서는 아레아가 따로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기로 했다.
헬무트가 할 일은 별 거 없었다. 그냥 옷가지를 비롯하여 약간의 짐을 챙기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편했다.
“그래서 아레아와 둘이 같이하기로 한 거지?”
시안의 질문에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카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너희는 어디로 가는데? 우리랑 행선지가 비슷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는 넷이서, 아니, 헬무트도 함께하는 쪽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반쯤 놀러가는 마음이었다.
수행 과제라는 명목의 이런 야외 활동은 사람이 많아야 재밌는 법이다.
“아레아가 말해 주지 않았어. 말해 주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겠지.”
헬무트도 아레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은밀함이 요구되는 일이다.
아무리 실력 있는 검사가 필요하다지만 그런 걸 같이 하자고 할 정도면 자신에겐 좀 믿음이 있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좋은 쪽으로.
헬무트에게도 아레아는 각별했지만, 아레아에게 헬무트는 유일했다.
아레아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점도 내보이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아스카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무슨 보물찾기라도 하러 가나. 둘이서만 쑥덕쑥덕하고 있어.”
“넌 어디로 갈 건데. 네 말대로, 행선지가 겹칠 수 있잖아.”
“알면 피하려고?”
아스카가 미심쩍게 물었다. 그와는 달리 시안은 순순히 말해 줬다.
“우린 별거 없어. 바덴 동쪽에 자연의 기운이 많이 모여드는 계곡이 있대. 그리로 가 보려고. 운 좋으면 정령 하나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가서 낚시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후자를 강조하는 것이 반쯤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놀러 가는 마음인 듯싶었다. 아주 화색이 만연하다.
시안은 덕담처럼 말했다.
“너희는 왠지 수행 과제랍시고 거창하고 위험한 거 할 것 같은데. 조심하도록 해.”
“그런 거 있으면 같이 하지. 위험한 거 재밌잖아.”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도 굉장히 낚시에 마음이 쏠린 모양인지, 휴일에 바덴으로 나가서 물건도 사며 준비하자고 권했다.
헬무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좀 더 일찍 떠나게 될 것 같아. 아마 내일.”
말로 시간 내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이라고 했다. 아마 마법으로 이동하게 될 터. 그렇다고 해도 일정을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소원까지 쓰겠다고 했던 거군.’
헬무트는 그제야 납득했다. 아깝지는 않았다.
아레아가 굳이 이 시기에 그런 빠듯한 일정으로 움직이는 이유는, 짐작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혹시나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학기 중이니 먼 거리의 그레타 아카데미 학생에게 초점이 돌아오진 않으리라.
아레아가 하려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예사로운 일은 아닐 터.
‘궁금하군.’
아마 그 답은 오늘 밤 알게 될 터였다. 그리고 바로 내일 떠나게 될 거다.
아레아는 제출 서류에 전혀 다른 과제에 대해서 위장용으로 적어 낼 것 같았다.
“뭐? 그렇게 일찍?”
“그럼 오늘 보는 게 마지막이겠네. 잘 갔다 와!”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학기 중에. 이번 여정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지, 퍽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