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96
195
헬무트
195화
헬무트의 예감은 정확했다.
가스칼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어린 것을 좋아했다. 물론, 순수한 의미로 좋아한다는 건 당연히 아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파릇파릇한 어린 육체였다. 생기로 가득한 미성숙한 몸. 부도덕이란 단어가 그를 이끌었다.
대신관으로서 추구하면 안 될 그릇된 욕망은 한 번 맛본 순간 가스칼을 중독시켰다.
그는 문제가 되지 않게 신전에 속하지 않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을 탐했다.
‘위대한 일을 하려면, 가끔은 내 안의 충동을 적절히 풀어 줘야 하는 법이지.’
가스칼은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는 젊었을 적, 대신관 자리에 올랐다. 일찍이 타고난 신성력과 재능은 그에게 쉽사리 권력과 부를 가져다줬다.
신전의 대신관은, 신께 기도나 올리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더 이상 마왕이라는 절대적인 적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 막강한 권력이 한 집단에 쏠려 있다면, 부패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노골적으로 신전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것이 그의 위치였다. 가스칼은 그 위치를 아주 잘 악용해 왔다.
가스칼이 손을 뻗었다.
“내가 그를 한 번 살피지.”
대신관이 직접 아레아의 몸을 관찰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아레아가 신전에게서 자신을 숨기는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헬무트는 팔을 뻗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성기사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무엄한! 어딜 감히 대신관님의 앞을 가로막는가!”
“그는 내 의뢰인이고, 그를 지키는 게 내 일이죠.”
상대가 대신관이란 것도 이유지만, 왠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음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도 남자고 아레아도, 겉보기로는 남자 아닌가. 대체 왜?
대신관 가스칼은 너그러운 웃음을 떠올리며 제의했다.
“내가 자네의 의뢰인을 치료해 줄 수도 있네.”
“그는 다치지 않았어요.”
“뭘 모르는군. 마법사가 저리 수면에 드는 까닭은, 내적으로 손상을 입었을 때지. 마법에 실패했다던가. 내가 그를 낫게 해 줄 수 있네.”
예리한 지적이었다. 날로 대신관은 아닌가 보다. 헬무트는 꽉 막힌 태도를 엄수했다.
“의뢰인은 자신의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어요. 대신관도 예외는 아닐 테죠.”
그제야 가스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성자처럼 온화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거만하고 차가운 표정을 지은 그가 말했다.
“좋아, 용병이라고 했나? 네가 받은 의뢰비의 열 배를 주지. 그걸 받고 여기서는 물러나 보도록 해라.”
갑자기 가스칼이 아레아를 돈 주고 건네받으려는 의도를 알 수 없었던 헬무트는 침묵을 지켰다.
내줄 수 없는 건 당연한 건데, 이런 식으로 요구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됐다.
“가스칼 님, 어찌 저런 녀석에게 돈을 주십니까. 맡겨주시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성기사 한 명이 나섰다. 이런 기회에 대신관 눈에 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가스칼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럴 것 없다. 용병이 의뢰에 충실한 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지. 어린 것이 기특하지 않느냐? 날카로운 구석이 있지만, 곱상한 생김새도 마음에 드는구나.”
그가 끌끌 혀를 찼다.
“네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기에 내 특별히 값을 쳐주는 것이다.”
소름이 일었다. 확실히 헬무트도 어린 시절에는 여자애 못지않게 예쁘장한 소년이었다.
헬무트는 비로소 이자가 왜 아레아를 넘기라고 한 건지 알아들었다.
‘하필 대신관이 그런 취향이라니.’
인간 세상에서도 규탄받는 취향 아니던가. 대신관은 재차 권유했다.
“저 마법사 녀석을 두고 간다면 네게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네 의뢰인도 내 말에만 잘 따른다면 무사히 돌려보내 줄 테니.”
“어서 대신관님의 말씀에 따라라!”
몇 명의 성기사들이 위협적으로 검에 손을 가져가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응하지 않는다면 끌어낼 참이다.
헬무트는 적의 규모를 가늠했다.
아레아를 두고 가면 헬무트는 무사해진다. 대신관은 그에게 있는 어둠의 싹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성적으로라면 여기서 아레아를 놓고,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헬무트는 파헤의 숲을 나오기 위해서 기나긴 시간을 고련했다. 아직 부모도 만나지 못했건만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지 모를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 됐다. 그 때문에 자신을 숨기며 인내하지 않았던가.
그의 앞에 파헤의 숲을 나와 이제까지 만난 이들 중 가장 강력한 적들이 있었다.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가슴 속에서 뜨겁게 치미는 무언가. 그것이 이성보다 강력하게 헬무트를 이끌었다.
포기하기 위해 강해지지 않았다. 무력하게, 꽁무니를 빼기 위해 검을 쥐었던 게 아니다.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그것이 그 자신이든 언젠가 생길 그 무엇이든.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타협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헬무트는 바람결처럼 중얼거렸다.
“그럴 수는 없겠는데.”
그들이 말뜻을 인지하기도 전에, 검이 뽑혔다.
콰득! 근거리까지 다가온 성기사의 목이 공중을 날았다.
바로 방향을 튼 검이 다른 성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피가 튀었다. 순식간에 두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방심의 대가였다.
“이, 이 녀석!”
외마디 소리와 함께 검을 뽑아든 성기사 3명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작 3명이다. 팔마 기사단장을 해치운 상대에게, 3명이라니!
헬무트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스쳤다. 그는 유감없이 실력을 드러냈다.
대응하기도 힘든 빠른 검격이 성기사들에게로 닥쳐왔다. 곧 3구의 시체가 더해졌다. 평화로운 숲은 금세 피 냄새로 물들었다.
“아, 아니 이런. 어떻게 이런 일이…….”
어느새 훌쩍 성기사들 틈으로 물러난 가스칼은 경악에 잠겼다.
조금 전까지 그의 앞에 얌전히 서 있었던 검은 머리 소년을 쳐다봤다. 새로이 발견한 것처럼.
고요하디고요한 검은 눈이었다. 그의 손에 쥔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살육을 자행한 얼굴에는 섬뜩할 만치 표정이 없었다.
대신관은 그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비스를 발견했다. 불길한 잿빛의 비스. 거기서 은은하게 풍기는 이 느낌은.
가스칼은 눈을 부릅떴다.
“네 녀석, 설마!”
설마라고 말은 했지만, 틀림없다. 저 나이의 소년이 저만한 비스로 성기사들을 베어 낼 정도면.
게다가 그의 비스 속에서 느껴지는 건 분명히, 마기였다! 가스칼의 우렁찬 고함이 떨어졌다.
“어둠의 싹을 가진 녀석이다. 속히 대열을 짜라!”
다행히 그들의 관심은 아레아에게서 헬무트에게로 옮겨간 듯했다.
헬무트는 등 뒤의 아레아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가 의식을 잃고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마음껏 실력을 내보여도 될 테니까.
‘아레아가 깨어나기 전에 모두 정리해야지.’
아레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르리라. 헬무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이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뭐든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사나우면서도 자신만만한 전의.
어둠의 싹은 더 이상 그에게 도망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싸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이.
‘모두 죽이고 입을 막는다.’
적들의 혼란이 가라앉기 전, 헬무트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
“크악!”
“으으윽!”
싸움이 시작되고 조금 지나자, 하나둘씩 사상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세 명이 더 죽었다. 목숨을 잃을 만큼의 상처를 피한 자들은 신관들이 회복시킬 수 있었지만, 그때뿐이다.
신성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회복에도 한도가 있다.
성기사들은 수가 많았으나 갑옷을 입은 데다가 숲에서의 싸움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못했다.
소수가 다수로 싸우기에 적합한 지형. 나무와 나무 사이로 다람쥐처럼 넘나들며 공격하는 헬무트는 그 움직임을 눈으로 포착하기 힘들 정도였다.
“포위진을 형성해라! 움직임을 좁혀야 한다!”
초조해진 가스칼이 명령하자, 신관 하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움직임이 너무 빠릅니다!”
“잠시만 발을 붙들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신성 마법으로 놈의 어둠의 싹을 정화해 버릴 테니!”
어둠의 싹이 없으면 저깟 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에게 마기가 가져다주는 힘은 놀랍다.
하지만 마기는 신성 마법에 취약했다. 신성 마법으로 마기를 제거해 버리면 상대는 급격하게 힘을 잃었다.
가스칼은 어둠의 싹을 가진 인간이 폭주해 날뛰는 것을 제압한 경험이 있었다.
자주는 아니나 십 년에 한 번 정도는 일어나는 일이다.
그때마다 힘든 과정을 거치기는 했으나, 그때의 상대는 이런 식으로 까다롭지는 않았다. 그저 이성을 잃은 강력한 괴물에 불과했을 뿐.
성기사를 다수 투입하여 움직임을 봉쇄하고 정화시키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대는 이성을 지키고 있었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그들을 상대한다. 마치 노련한 사냥꾼처럼!
가스칼은 이를 갈았다.
‘어린 녀석이 어떻게 저런 실력을.’
어둠의 싹을 가진 자들은 육체부터가 남들과는 다르다. 비스나 마법으로 강해지는 것도 수월하다.
하지만 검술이나 싸우는 방식은 학습하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것.
신성 마법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마법은 시전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적은 한정된 공간에 멈춰 서 있는 것 자체를 피했다.
‘그래, 용병 출신이라 이거지. 신전에 도움을 청해야 하나.’
여기 있는 전력도 결코 적은 수가 아니지만, 어둠의 싹을 가진 녀석을 잡기엔 충분한 수도 아니었다. 초반에 성기사 다섯을 허무하게 잃은 게 컸다.
‘빌어먹을, 어둠의 싹을 가진 녀석이란 걸 왜 몰랐던 거지?’
놈의 기운은 너무나도 은밀했다. 놈이 비스를 내보이고 나서야 가스칼은 그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뭐, 좋아. 어쨌든 이대로는 안 돼.’
어둠의 싹을 가진 자가 나타났으니 신전에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틈이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지금 가스칼은 자신을 비롯하여 신관들을 감싸는 결계를 치고 있었다.
신관들은 결계 안쪽에서 회복과 수호의 마법으로 성기사들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신성 마법은 결계를 통과할 수 있어서 지장이 없다. 하지만 원거리 교신은 이야기가 달랐다.
신전 쪽으로 연락을 취하려면 이 결계를 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놈은 바로 가스칼을 노릴 것이다.
누구를 잡아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때 타격을 입는다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내지 못하리라.
여기는 숲이다. 이동해 오기도 마땅치 않은 장소이니 지원이 여기까지 오려면 수 시간은 걸릴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불현듯, 가스칼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그 마법사 녀석. 그 녀석 때문에 싸움이 시작된 거였지.’
어둠의 싹을 가진 인간은, 살짝이라도 신성 마법을 빗맞았다간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본능적으로 신전을 보면 피해 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싸우는 것을 택했다. 그건 그 마법사를 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저렇게 눈에 띄게 싸우는 것도, 자신에게 신경을 돌리기 위함이리라.
‘그 녀석이 약점이로군.’
마법사는 녀석의 뒤쪽에 있었다. 거기에 접근하여 마법사를 손에 넣어야 한다.
가스칼은 등 뒤에 있는 성기사 한 명에게 은밀하게 명령했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 들키지 않게 뒤쪽으로 은밀히 돌아서 마법사를 확보해라.”
“저는 가스칼 님을 지켜야 합니다.”
“날 지키고 싶다면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어서 움직여!”
성기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