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97
196
헬무트
196화
“으악!”
비명과 함께 피가 흩뿌려진다. 숲에 가득한 것은 인위적인 기운.
빗나간 신성 마법이 바닥과 맞부딪히며 산산이 흩어져 이곳까지 흘러들었다. 피부를 자극시키는 파동.
아레아의 전신에 미세한 반응이 일었다. 평소라면 곤히 잠들어서 회복에 집중할 상태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자극. 마력은 반쯤 돌아왔다. 턱없이 모자라나, 눈을 뜨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던전을 장악하느라 소모되었던 정신력도 거의 온전해졌다.
헬무트에게 말했던 사흘은 최대한으로 잡은 기간이었다. 또한 그것이 목숨이 위중한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뭐지…….’
아레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슬며시 밀어 올렸다.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은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금속음, 부산한 발소리, 그리고 비명과 외침. 온갖 소리로 귀가 혼란했다.
아레아는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느리게 굴러가던 사고가 제 속도로 돌아왔다.
‘헬무트는 어디 있지?’
지키라고 했으니 지키고 있을 그인데, 근처에 없다는 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자신이 눈을 뜬 이유도 그것일 터.
몸을 일으키려던 아레아는 흠칫거렸다. 제게로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진다. 얕은 발소리.
아레아는 다시 잠든 척 눈을 내리감았다. 손끝이 절로 움찔거린다.
혹시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자라면, 마법으로 전신을 태워줄 셈이었다.
살짝 실눈을 뜨자, 하얀 갑옷이 먼저 보인다. 불안한 표정. 숨을 죽이며 조심히 걸음을 내디디는 그자의 정체를 아레아는 단박에 알아챘다.
‘성기사?’
어째서 성기사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혹시 헬무트는, 신전과 싸우고 있는 건가.
어쨌든 결론은 간단했다. 성기사는 적이었다. 헬무트에게든 아레아에게든.
아레아의 발치에까지 다다른 성기사가 싸움이 벌어지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네 녀석이 날뛰는 것도 이제 끝이다.”
자신을 인질 삼을 모양인가 보다 하고, 아레아는 판단을 내렸다.
그가 몸을 굽혀, 아레아에게 손을 내밀던 순간이었다.
퍽! 어디선가 날아온 물체가 성기사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크아아악!”
촤악! 피가 튀었다. 흥건한 액체가 로브 위로 얼룩졌다. 비릿한 냄새가 생생하게 코끝에 스며든다.
나가떨어지듯이 옆쪽으로 쓰러진 성기사가 게거품을 물고 옆구리를 감쌌다. 갑옷을 부수다시피 뚫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꽤 긴 나뭇가지의 끄트머리만이 이쪽으로 빼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아레아는 일단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크으윽!”
성기사가 힘겹게 제 옆구리에 꽂힌 나뭇가지에 손을 가져갔다. 뽑아내고 치료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퍽! 두 번째로 날아든 나뭇가지가 그의 눈을 꿰뚫었다. 터진 안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풀썩 쓰러진 성기사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절명.
아레아는 피로 얼룩진 채 위기 상황에서 벗어났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성기사를 처치한 헬무트는 활을 내려놨다.
‘움직임이 없군. 죽었는가.’
전쟁통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을 그려 낸 헬무트의 표정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성기사 한 명이 몰래 옆으로 돌아드는 것을 감지한 터였다. 아레아를 인질로 잡으려고 한다는 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앞에서 오는 압박이 심해서, 잠시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그가 아레아에게 다다른 순간 헬무트는 활을 꺼내 들었다. 목표를 명중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기사의 신성력을 두른 몸과 갑옷을 뚫을 정도의 위력으로 활을 쏘려면, 비스가 많이 소모된다.
두 발로 성기사를 끝장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소모값도 컸다. 그의 비스는 어느덧 반절 이하로 줄어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로 급속도로 닳아 없어진 것이다.
성기사가 몸에 두른 신성력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면서 싸우는 건 쉽지 않다.
성기사를 해치우려면 꼭꼭 보호하는 머리보다는 신성력을 두른 갑옷을 꿰뚫어 내야 했다.
놈들은 호흡이 잘 맞았고, 이쪽의 움직임을 봉쇄하며 간간이 날아오는 신성 마법은 한 번이라도 직격당했다간 치명적이었다.
그 한 번을 피하기 위해서 헬무트는 고도의 집중력을 기울였다.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면,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방심은 없다. 쉽지 않으리라 예상한 전투.
하지만 쉽지 않음에도 헬무트는 꽤 순조롭게 잘 해내고 있었다. 스스로도 의외다 싶을 만큼.
이제 서 있는 성기사의 수는 5명뿐이었다. 모두 사냥당하는 공포 속에서 하얗게 질려 있다. 루멘에 대한 신앙심조차도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누를 수 없는 듯이.
도망치지 않는 것은 그들을 뒤에서 독려하고 있는 대신관의 존재 때문이리라.
‘내 생각보다 나는 강하군. 아니, 강해진 건가.’
파헤의 숲에 있었을 때조차 그는 이런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강해진 것일 터.
파헤의 숲을 나온 이후로 겪은 모든 경험이 헬무트를 성장시켰다.
‘아레아는 이제 안전하겠지.’
그가 깨어나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헬무트는 흡사 살인마처럼 성기사들을 도살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이 모습, 어쩐지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신성력의 영향인지 살인에 반응하여 그를 억누르던 어둠의 싹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의 싹을 가진 자는 살인마가 된다고 한다.
헬무트는 이 상황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원치 않더라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면, 이는 역시 어둠의 싹을 가진 자의 운명이 아닐까.
이성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반면 신경은 예리하게 곤두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 피를 씻어 내고 아카데미로 돌아가려면, 아레아는 몰라야 했다. 모르기를 바랐다.
헬무트는 다짐 속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이제 남은 놈들은 몇 안 된다. 가장 강한 대신관이 남아 있긴 하지만, 신속히 처리하고 이곳을 정리할 셈이었다.
‘이, 이런 쓸모없는 놈!’
마법사 쪽으로 빼돌린 성기사가 쓰러진 순간, 대신관 가스칼은 속으로 노성을 터뜨렸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은 그의 주변에 아직 그를 따르는 자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신관님, 어떻게 합니까.”
“저 괴물은 너무 강합니다! 성기사들이 모두 쓰러지면…….”
신관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성기사들 다음은 그들의 차례다.
가스칼이 대신관다운 점 하나는, 적어도 신전에 속한 자들 앞에서는 대신관다운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모두 마음을 다잡거라. 악이 아무리 강성해도, 우리는 루멘의 신도들이다! 적 앞에서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된다!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할지니!”
가스칼은 결심했다.
‘위험 부담을 안고서라도 저 녀석을 해치워야겠어.’
어둠의 싹을 가진 자다. 애초에 만만히 볼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건만, 섣불리 싸움이 시작되어 이미 크나큰 희생을 치러 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쓰러진 자들의 목숨값을 받아 내야 한다. 저 오만하고 사악한 어린 녀석에게!
‘어둠의 싹을 가지고 이성을 지킨 채 이만큼 싸울 수 있는 놈이라니.’
신전에 얼마나 큰 위협을 가져다줄 것인가. 소름이 일었다. 가스칼은 명령했다.
“신관들은 성기사들과 합류하여 놈을 봉쇄하는 데 힘쓴다.”
성기사가 몇 남지 않았다. 몇 남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신관들이 신경 쓸 이들은 적었다.
아직 놈은 한군데 모여서 통째로 신성 결계를 이루고 있는 신관들 쪽에 손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서서 공격하려고 든다면 주저 없이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흩어짐으로써 위험해지는 건 가스칼뿐만 아니라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구역 정화 마법을 준비하겠다. 놈이 내 쪽으로 향하는 것만 막거라. 활을 쏴서 공격할 틈도 주면 안 된다.”
“예!”
재빠른 녀석이라 신성 마법을 피해 낸다면, 피해 낼 수 없는 마법을 쓰면 된다.
구역을 통째로 정화해 버리는 것. 비록 신성력이 대거 소진되는 데다가 신성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방어가 느슨해지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너로 인해 오늘 신전이 치른 희생은 잊지 않으마! 부정한 자여.’
가스칼은 이를 바득 갈았다.
***
신관들이 두셋씩 뭉쳐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저들끼리 꽁꽁 뭉치고 결계 속에 숨어, 성기사들에게 회복 마법을 걸고, 신성 마법으로 견제하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싸우던 자들이었다. 그게 보통 신관의 싸움 방식이리라.
육체적으로 싸우는 자들이 아니니 맨몸뚱이를 드러내면 일반인 만큼이나 취약할 수밖에 없다.
헬무트는 재빨리 눈치챘다.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는 건 뭔가를 시도한다는 거로군.’
홀로 남은 것은 대신관 가스칼. 여기 있는 그 어떤 자들보다도 우선순위로, 헬무트가 반드시 해치워야 할 자였다.
혹여 윗사람이랍시고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워서 도망치면 곤란하다. 다리언의 원수.
하지만 노골적으로 그쪽으로 다가갈 수 없게끔 신관들의 신성 마법이 집중적으로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가스칼 쪽을 노리는 걸 택한다면 우박처럼 신성 마법이 그의 행로마다 떨어질 것이다.
‘그쪽을 헤치고 대신관을 노릴까, 아니면.’
헬무트는 잠시 갈등했다. 대신관이 괜히 홀로 떨어져 있진 않으리라. 미끼이거나 다른 뭔가가 있거나.
만약 다른 뭔가가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스칼을 노리는 게 맞았다.
하지만 미끼라면 그쪽으로 향하는 게 저들의 의도대로 행동하게 된다.
“사악한 자여, 죗값을 치러라!”
먼 거리에서 견제하던 신관들은 가까이서 교대로 자신들의 몸을 보호하는 결계를 치고, 신성 마법을 펼쳐왔다.
새하얀 빛이 번쩍하며 이쪽으로 밀려왔다. 흡사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헬무트는 그 파도 하나하나를 피해야 했다.
범주가 좁혀드니 더 피하기 까다로워졌다.
그가 올라선 곳을 넘어 바로 뻗어 오는 마법에 헬무트는 나무를 재빨리 건너뛰었다. 신성 마법을 맞은 나무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듯이 멀쩡했다.
‘오직 마를 사르는 마법이라 이거지.’
숲을 부수는 건 헬무트와 성기사들. 신성 마법은 오로지 마기만을 사를 뿐이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진 지 꽤 된 지금에도 숲은 제법 멀쩡했다.
마치 헬무트란 존재를 이 숲과는 다른, 이질적인 어떤 것으로 배척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헬무트는 결정을 내렸다.
‘신관들을 먼저 처리해야겠군.’
그들이라고 해서 대신관을 신경 쓰느라 무시할 만큼 잔챙이가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모두 피해 냈지만, 그들이 펼친 신성 마법에 한 번이라도 빗맞으면 조용히 있던 어둠의 싹이 발작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쪽은 페널티를 안고 싸우는 상황이니.
‘비스를 소모해서라도 결계를 부순다.’
뭉쳐서 강력한 결계는 개개로 분리되면 약해진다.
대신관과 신관들이 뭉쳐있을 때 그들의 결계는 헬무트로서도 뚫어내기 힘들었다.
마기를 띤 비스가 증발하며 엄청나게 소모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헬무트는 신성 마법도 비스로 베거나 막아 낼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소모값 때문이었다.
보통의 비스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마기가 섞인 헬무트의 비스는 유독 신성력을 상대로 할 때 과다하게 소모되었다.
‘내게도 그리 여력이 많지 않다.
남은 비스로 빠르게 승부를 봐야 했다. 헬무트의 검은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