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199
198
헬무트
198화
그날 헬무트는 아레아에게 긴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껏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놓는 날이 올 거라는 상상. 그것은 어렴풋하기만 했었다.
무겁디무거워, 제 안에 가라앉아 있었던 비밀을 최초로 꺼내 놓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헬무트는 어둠의 싹을 가졌기 때문에 파헤의 숲으로 버려졌다. 파헤의 숲을 나온 순간부터, 그 사실은 누군가의 목숨을 취해서라도 숨겨야 할 비밀이 되었다.
침묵하고 힘을 숨기며 은밀히 살아왔던 시간이, 어느덧 몸에 배어 있었다.
아레아에게도 비밀이 있었지만, 그것은 헬무트의 것과 완전히 동등하진 않다.
아레아는 신전과 척을 진 것이지, 세상과 척을 진 게 아니니까.
헬무트는 달랐다. 그가 가진 것은 밝혀진 즉시 세상으로부터 내몰리는 진실이었다.
아레아는 되물었다.
“네가…… 파헤의 숲에서 나왔다고?”
“그래.”
헬무트는 담담히 대꾸했다. 헬무트가 어둠의 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대마법사 안티올도 그가 파헤의 숲에서 자라났다는 것을 몰랐다.
파헤의 숲을 나온 최초의 인간. 믿기지 않는 기적에 대해서 들으면서도 아레아의 눈빛은 살짝 흔들렸을 뿐 크게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어둠의 싹을 가진 인간이 신성 결계를 통과하여 파헤의 숲을 나올 수 있을지 이론을 펼쳐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론도 현실에 닿지 못했다.
“어떻게?”
헬무트는 간략하게 제가 사용한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완성된 이론이 아니며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것도.
아레아는 시선을 마주한 채 신중하게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마법사답고, 아레아다웠다.
그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헬무트는 잠시 무거운 기분에 잠겼다.
이제 아레아는 거의 모든 것을 알았다. 그것은 헬무트의 파멸을 손에 쥐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가볍게든 무겁게든 그것을 휘두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를 쥐여 주는 건 분명히 현명하지 못한 짓이리라.
다리언의 말처럼 인간은 간악하고 배신을 일삼으니까. 하물며 만난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은 사이가 아닌가.
그러나 믿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힘든, 흔들림 없이 고정된 믿음이었다.
말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 충동이 심장을 뜨겁게 할 만큼 간절하고도 강렬했다.
언젠가 진실을 말할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가.
고독하게 홀로 싸워왔다. 헬무트는 뿌리를 옮겨 인간 세상이라는 새로운 대지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아레아에게 진실을 알린다는 건 그에게 변화였다. 변화는 모험이다. 모험에는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아레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린 나이에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삶을 살아온 소년, 헬무트를.
물론 헬무트는 아레아가 가엽게 여길 만큼 여리고 연약한 소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비로소 헬무트에 대해서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까지 품고 있던 의문들이 차례로 맞춰졌다.
아레아는 말을 골랐다.
“나도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
비밀을 털어놓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레아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찬찬히 털어놓았다.
그녀가 신전의 공적 대마법사 하이케의 제자이자 손녀라는 것을.
하이케는 과거 사건을 일으켜 신전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마법사. 마음먹고 몸을 숨긴다면 신전으로서도 쫓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하이케를 쫓던 신전의 손길은 그녀와 동떨어져 살던 아들 부부에게 이르렀다.
하이케가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건 숨어 있던 아레아 한 명뿐이었다.
“나는 하이케를 많이 닮았어. 신전에서는 하이케의 손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그 때문에 남자로 변장하고 아카데미에 들어왔던 거야.”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여자애다. 아카데미에 남학생으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려우니까.
또 바덴의 아카데미는 신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장소다.
“그렇게까지 아카데미에 들어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나는 신전에게 쫓기면서, 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할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레타 아카데미 마법 학부는 그런 힘을 쌓기에 최고의 장소거든. 내가 아무리 전승 마법사라지만 그레타 아카데미의 마법 학부는 명성 높은 곳이니까. 마침 하이케와 학장도 인연이 있었지.”
“너는 신전에 복수할 생각인가?”
“복수라. 좋은 감정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일단은 이번처럼 그쪽에서 나를 건드는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하진 않으려고.”
말을 마친 아레아가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 역시 같아.”
이번처럼 신전이 시비를 걸어오는 거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굳이 쳐들어가서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헬무트는 어둠의 싹을 가지고 있다. 어둠의 싹을 가진 그가 신전과 싸워 봐야 역시 파헤의 숲에 버려질 만했다는 평가나 들을 뿐이다.
피와 살육이 따를 수밖에 없는 길. 그것은 다리언이 바라는 바도 아닐 터였다.
다리언은 헬무트가 강한 검사답게, 검성인 그가 그러했듯이 힘에 대한 의무를 짊어지고 바른길을 걷길 바랐다.
그가 복수를 포기한 이유에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대단한 악당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머니를 찾길 바랐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가족들도.
그들을 위해서라도, 헬무트는 가급적 조용히 지내야 했다.
하이케의 일로 아레아가 부모님을 잃었듯 헬무트가 적을 만들면 피해를 입는 건 그의 가족들이 될 테니까. 그 적은 신전만은 아닐 터였다.
‘어차피 싸움은 피할 수 없겠지.’
그게 어느 때건, 헬무트는 신전과 싸우게 될 거였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그 길을 복수심으로 걸을 필요는 없었다. 여기 한 사람, 더 같은 길을 걸을 사람이 생겼다.
아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 다 피를 보는 걸 즐기는 성품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짓밟으며 군림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평화를 스스로 거머쥘 힘을 갖는 게 그들의 바람일 것이다.
대화를 마치자 침묵이 떨어졌다. 둘은 나란히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었다.
마법으로 이 일대를 대거 정리한 아레아는 마력을 회복시키는 중이었다. 이동 마법을 펼쳐서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어느덧 어둠에 잠긴 숲은 언제 전투가 펼쳐졌냐는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조용해지니 아까 전 있었던 일이 떠오른 아레아는 왠지 어색해져서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헬무트를 만났을 때 느꼈던 건 마법사의 운명이 아니라 이렇게 될 거라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단단히 닫혀 있었던 마음을 그가 비집고 들어왔다.
빠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낯설었다. 차차 익숙해져야 할 터였다.
헬무트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사귀면 뭘 해야 하는 거지?”
일단 관계가 바뀐 건 알았는데, 그 후는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 아레아는 답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건 아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바덴에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아레아는 팔찌를 끼웠다. 다시 마법의 효과가 펼쳐지며 아레아는 소녀에서 소년으로 변모했다. 이동 마법을 쓸 정도로 마력이 회복되었다.
“이제 가야겠어.”
헬무트는 숲 쪽을 돌아보았다.
“이 일로 우리를 추적해 오지 않을까.”
“대신관이라면 주기적으로 신전과 연락을 할 테니까. 곧 이변을 알 테지. 여긴 바덴과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그레타 아카데미에 의심의 시선이 돌아오진 않길 바라야지.”
아레아의 손에서 하얗게 빛이 일었다. 수정 구슬을 통해 어딘가와 대화한 아레아는 설명했다.
“흔적은 내가 대강 지웠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하이케에게 말했으니 곧 이곳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질 거야. 대신관 일행은 이 숲에서 사라진 게 될 테지. 인위적으로 흔적을 지운 거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알 테지만, 우리에게 혐의가 돌아오진 않을 거야.”
아레아가 방금 연락을 취한 건 바로 하이케였다.
이런 일에 하이케의 도움을 빌리는 건 내키지 않지만, 아레아의 마력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이케만큼 확실히 이곳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 안되면 하이케가 덮어쓰면 그만이다. 애초에 아레아가 신전과 척을 진 건 그녀 때문이었으니.
아레아는 얼른 덧붙였다.
“너에 대한 건 하이케도 몰라.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끽해야 여자 친구 때문에 신전과 싸운 대범하고 생각 없는 녀석 정도로 알까. 왠지 낯이 뜨거워진 아레아는 헛기침했다.
“이제 돌아가자.”
그녀는 헬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헬무트는 말없이 그 손을 움켜쥐었다.
새롭게 새겨진 관계가 낯설었다. 혼란한 운명에 다른 이를 휘말리게 해도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잘된 건가.’
그것은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최초로 뭔가를 가졌다는 느낌.
이 손을 두려움이나 걱정 때문에 놓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 한 결정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
아레아와 헬무트가 사라진 자리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은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미세하게 마력의 기운이 남은 숲을 돌아보곤 대지의 기억을 읽어냈다.
대마법사의 마법은, 아레아가 흩어 버린 기억을 완벽하게 되살려 냈다.
“어둠의 싹을 가진 아이라…….”
하이케는 미간을 찌푸렸다. 헬무트란 녀석이 아레아와 특별한 사이가 될 거라는 걸 진작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남몰래 축제를 지켜보았으니까.
그때 헬무트란 소년을 보면서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일단은 묻어 두었던 터였는데 이렇게 알게 되다니.
“내 손녀답게 골치 아픈 녀석을 골랐어.”
아레아에게 그런 녀석을 붙여 두는 건 좋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하이케에겐 적이 많았다. 그 적에 또 적을 얹을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제거해야 한다. 아레아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 소년, 정체를 들키는 걸 감수하고 아레아를 구하려 했다는 말이지.”
하이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상황에서 좋아하는 여자애건 어쨌건 버리고 혼자 내빼는 녀석들 천지였다.
하지만 헬무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고 싸우는 쪽을 택했다.
“어둠의 싹을 가졌다는 걸 빼면 마음에 드는걸.”
하이케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대마법사답게 그녀에게 편견은 거의 없었다.
일단은 지켜본다.
“뭐, 나도 괜히 간섭했다가 미움을 사는 건 사절이니까.”
아레아는 하이케를 가족 취급하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부모님을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이케는 아레아의 미움과 냉대마저도 받아들였다. 그녀의 과오였으니 용서받는 것까지 바라면 큰 욕심일 터였다.
미움받든 어쨌든 하이케에게 아레아는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무언가.
“어떤 녀석인지는 상관없어. 아레아에게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다짐하듯 중얼거린 하이케는 마법을 펼쳤다.
이곳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운다. 만약 신전이 추적한다더라도 혐의는 그녀에게 돌아올 터였다.
그게 하이케가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