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0
19
헬무트
19화
‘놈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헬무트는 과신하지 않았다. 나호가 만들어 준 기회를 잘 낚아챘고 그 기회는 이제 다했다.
어차피 그의 검은 나호의 단단한 본체를 벨 수 없다. 조금 전 일격에도 상당량의 비스를 소모했다.
다리언이 준 검은 무디지 않다. 하지만 나호의 마기를 뚫으려면 막대한 비스가 소모됐다.
‘이대로 빠져나간다.’
헬무트는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곧,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빌어먹을. 멍청한 머리가!
-콰득!
무시무시한 소음에 이어, 우적우적. 질기고 두꺼운 살점이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던 헬무트는 불현듯 뒤를 돌아봤다.
한쪽 머리가 눈을 잃은 머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기괴하다 못해 소름 끼치는 광경.
무방비 상태가 된 다른 쪽을 습격한 나호의 유일해진 머리가 오랜 형제였던 머리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나호의 몸이 머리 부피만큼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잘린 단면에서 검붉은 피와 마기가 치솟았다. 상처는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다.
-쓸모없는 부위는 이제 치웠으니.
나호의 눈이 헬무트를 향해 돌아섰다. 독기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
나호는 이제 머리 하나의 뱀이었다. 갈릴 일 없는 하나의 살의!
-네놈을 배 속에 집어넣어 내 머리와 함께 녹여 주마!
분노에 찬 뱀이 폭사 되듯이 몸을 날렸다. 수만 개의 다리로 뛰듯이 빨랐다. 헬무트가 벌려 놨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헬무트는 검에 손을 가져갔다. 완벽하게 등 뒤에 이르면, 역습을 가한다.
그러나 돌아서 비켜서려는 순간, 갑자기 가속도가 붙은 머리에 정통으로 들이받혔다.
쿵! 바위와 충돌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정신을 마비시켰다.
헬무트는 종잇장처럼 맥없이 허공으로 튕겨 날아갔다.
‘여긴…….’
퍼뜩 정신 차린 곳은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위였다. 가까스로 검을 놓치지 않은 채였다.
울컥, 입안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헬무트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어디라고 꼬집을 것 없이 전신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늑골이 부러졌나?’
뼈가 몇 대쯤 나간 모양이다. 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헬무트는 입안에 고인 피를 모조리 뱉어냈다. 머리가 띵하다. 본능적으로 끌어올린 비스가 몸을 보호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죽었을 것이다.
‘나호는 어딨지?’
바로 연공을 가했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터.
마기가 느껴졌다. 놈은 주변에 있다.
헬무트는 고개만 움직여 놈의 위치를 살폈다. 놈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드리우고 있어 바로 찾았다.
오십 보가량 떨어진 가까운 거리였다. 나뭇잎 사이로 고개를 바짝 세우고 흉흉한 마기를 내뿜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거대한 뱀이 보였다. 놈의 사방은 이미 초토화된 상태.
헬무트의 모습은 위에 드리운 나뭇가지에 가려져 아슬아슬하게 이목에 걸리지 않았다.
원래의 나호였다면 바로 찾아냈을 텐데 머리 하나가 사라졌더니 이상이 있는 모양이다.
놈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감각이 이상해졌겠지.’
머리 두 개로 살아온 놈이 하나의 머리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사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헬무트는 욱신거리는 몸에 힘을 주었다. 일순 거의 바닥을 보였던 비스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마력으로 충만한 숲의 대기가 회복을 도왔다.
아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던 몸이 삐거덕거리며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
-크으으으! 쥐새끼 같은 놈! 어디 숨어 있는 거냐?
콰아아아아! 마기의 파장이 강풍처럼 몰아쳤다.
그 여파가 헬무트가 있는 나무를 넘어트릴 기세로 흔들었다.
헬무트는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쿵!
이가 아래위로 세게 맞부딪혔다.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숨도 못 쉴 만큼 아팠다.
“윽!”
작은 신음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우뚝 선 고개가 바로 움직였다.
사악한 뱀이 날카롭게 웃었다.
-거기 있었구나!
-그르르르르. 진동과 함께 뱀이 움직였다. 바닥을 끌며 기어오는 속도가 파도가 밀려오듯 빨랐다.
절대적인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신의 낫처럼. 상대할 방법은 없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절박한 마음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헬무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쿠궁! 헬무트는 눈을 부릅떴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시야를 가로막았다.
헬무트는 기적처럼 등장한 새하얀 표범의 등을 쳐다보았다. 새하얀 털가죽이 마기를 품고 반들거렸다.
“엘라가!”
-수고했다. 여기서부턴 나에게 맡겨.
으르렁대는 음성에서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변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그는 영역의 경계를 뛰어넘어 달렸다.
쓰러져 있는 헬무트를 발견하고 피 냄새를 맡은 순간 알았다. 늦었다는 것을.
하지만 완전히 늦지는 않았다. 엘라가는 뒤쪽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넌 가라.
“나도 함께.”
싸우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엘라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가로막힌 나호의 눈이 번뜩였다. 엘라가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던 놈의 전신에서 살기가 폭사 되었다.
온전치 못한 상태. 평소라면 싸움을 회피했을 나호지만 그가 겪은 고통이 이성을 날려 버렸다.
다 잡은 먹잇감을 빼앗겨 독기를 품은 뱀.
“엘라가, 나도.”
헬무트는 망설였다. 하지만 엘라가의 뒷모습은 절벽처럼 단단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다리언처럼, 다른 어떤 말도 용납하지 않는 뒷모습.
‘어차피 이대로는 짐만 될 뿐이야.’
언제나 냉정하게 생각하라고 배웠다. 헬무트를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을까? 다리언과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었다면, 이것도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이별 앞에 담담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엘라가였다. 가슴 속에 뜨끈한 물살이 퍼져 갔다.
헬무트는 등을 돌렸다. 붙박인 발길을 억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져야 엘라가도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누린내 나는 흰 고양이가! 감히 내 영역에 들어와?
-넌 못생긴 머리가 하나로 줄어들어서 그나마 봐 줄 만해졌구나?
-안 그래도 네놈이 늘 거슬렸지. 오늘 끝장을 보겠어!
-머리 두 개로도 안 되던 게 하나로는 되겠어? 어디 한번 해 보라고!
곧 두 권역의 지배자가 맞붙었다. 공간을 넘어 권역으로 퍼져나가는 두 개의 마기.
사나운 울부짖음과 굉음이 대기를 진동시키며 주변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동안 파헤의 숲이 마냥 평화로웠던 것처럼 요란한 전투였다.
헬무트는 그곳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거의 바닥까지 비스가 소진된 상태. 몸도 엉망이다.
하지만 나호와 엘라가의 냄새가 모두 묻어 있는 헬무트를 습격하는 마물은 없을 터.
헬무트는 순조롭게 엘라가의 영역에 들어섰다. 두 마물의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탓에 둔중한 파동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전투의 여파가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했는지 마물들은 주변을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헬무트는 바위에 앉아 숨을 골랐다. 걷는 게 용할 만큼 망가진 몸은 이제 걷는 것 정도는 무리 없이 해냈다.
믿을 수 없는 회복력이다. 비스가 있다고 한들 인간이 이런 회복력을 가질 수 없다는 걸 헬무트는 안다.
‘어둠의 싹.’
나무에서 떨어진 충격에서 몸을 보호하느라 비스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순간, 헬무트는 배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불씨 같은 것을 느꼈다.
서서히 자라나고 있어서 그 크기를 가늠하지 못했던 불씨.
뜨겁다기보단 차갑고 피를 얼리듯 섬뜩한 힘이었다.
견제하던 비스가 자리를 비운 순간, 어둠의 싹이 자유로워지는 건 당연했다.
비스가 비운 자리에 슬며시 손길을 뻗은 그 힘은, 손상된 그릇을 고치려는 것 같았다.
주변의 마기를 먹어 치우며 손상된 근육과 살을 재생시켰다. 마치 쓸수록 유해한 효력 강한 약을 강제로 쓰는 듯한 느낌.
그대로 뒀다간 몸을 회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헬무트를 점령하려고 할 것이다.
‘일단은 비스를 회복한다.’
헬무트는 검을 쥐고, 힘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를 다스려 주는 검의 힘, 비스. 다리언이 그에게 안겨 준 선물이었다.
“음.”
몇 시간 후 그는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차오른 비스가 어둠의 싹을 누르며 그의 안을 메우고 있었다. 없는 게 허전할 만큼 익숙해진 힘이다.
헬무트는 손을 쥐었다 피며 몸 상태를 살폈다.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군.”
완벽한 상태는 아니지만 팔 할 정도는 회복한 느낌이다. 길을 가다 보면 더 나아질 것이다.
“중요한 고비는 넘겼으니, 괜찮겠지.”
지체할 여유가 없다. 어둠의 싹을 누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조금이나마 마기를 흡수한 그것은 이전보다 커졌다.
헬무트는 약간 조급해졌다.
“이제 신성 결계가 문제인데.”
헬무트는 품에 손을 집어넣어 책자를 끄집어냈다. 너덜너덜해지긴 했어도 다행히 읽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에루고의 말을 떠올리며 지도를 들여다봤다. 가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위치는 알 듯하다.
“이제는 결계를 통과하는 것만 남았어.”
결계만 통과하면 밖이다. 길다면 긴 시간을 그걸 위해 애써오지 않았나.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파헤의 숲 밖, 인간 세상. 그곳은 어떤 곳일까? 어머니는 헬무트를 기억할까. 그중 아무것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짐을 챙겨 든 헬무트는 나호의 영역 쪽을 돌아봤다.
엘라가는 걱정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하지만 불안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엘라가라면 충분히 나호를 해치울 수 있다.’
머리 하나를 잃은 나호가 멀쩡할 리 없다. 그리고 멀쩡한 상태의 나호도 엘라가를 상대로 감히 싸움을 걸지 못했다.
엘라가는 승리를 거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흐름이,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것 같았다.
‘싸움이 길어지는데.’
나호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면 엘라가로서도 상대하기 쉽지 않을 터.
어쨌든 나호를 그렇게 만든 건 헬무트였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틈을 보인다면, 벨 수 있다. 끝까지 집중하면 충분히 반격을 가할 수 있다.
헬무트는 그 사실을 되새겼다.
‘나호의 핵을 삼키면 엘라가의 힘도 커지겠지.’
긍정적인 점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강한 자가 지배하는 이 파헤의 숲에서 나호의 핵은 엘라가에게 큰 선물이 될 터.
물론 엘라가 같은 게으른 표범에게 별로 쓸모없는 힘일지도 몰랐다.
“안녕히.”
어디선가 배웠던 인사말을 읊조리며, 헬무트는 짐을 챙겨 엘라가의 영역을 떠났다.
이제는 마지막 과제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