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00
199
헬무트
199화
헬무트와 아레아는 예정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바덴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곧장 바덴의 기숙사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신전을 피해서 그들에게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레아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시간까지 다 합쳐 봐야 고작 이틀밖에 안 걸렸는지라,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막 월요일이 시작되어 다른 학생들이 슬슬 떠나기 시작한 때였다.
차라리 늦게 떠났다면 대신관 일행과 마주칠 일도 없었을 것을.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잘 자.”
방문 앞에서 헤어진 아레아와 헬무트는 그로부터 정확히 12시간이 지났을 무렵 같은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안녕.”
왠지 모르게 아레아가 살살 시선을 피했다. 그 12시간 동안 마력을 회복시키면서 휴식을 취한 그녀였다.
긴박했던 시간이 흘러가고 느슨해진 순간 아레아는 헬무트와 있었던 일을 되짚어 봤다. 왠지 머리가 멍해졌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상황에 아레아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내가 평소에 어떻게 헬무트를 대했지?’
헬무트와 마주하면 새침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던 아레아였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은 행동이었으니 떠오를 턱이 없다.
아레아가 12시간 동안 방문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방에는 먹을 게 없었고, 배가 고팠으므로 아레아는 결국 문밖으로 나왔다.
“안녕.”
반면 헬무트는 태연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그 역시 돌아오자마자 비스 수련장에 틀어박혀서 비스부터 회복하고 본 터였다.
불완전한 상태로 있는 것은 스스로가 불안하다. 그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헬무트가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으, 응? 그렇지. 배고프지.”
“그럼 가자.”
아레아는 얼떨결에 헬무트를 따라나섰다. 둘은 곧 학생 식당에서 나란히 마주 앉아 있었다.
수행 과제는 기본적으로 야외 활동. 바덴의 시내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거기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여기가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음식이 눈에 보이자 허기가 확 치달아 왔다. 아레아는 한산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지금이 몇 시지?”
학생 식당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아레아는 학생 식당을 잘 찾는 편이 아니었다.
번잡한 이곳에서 자리를 잡으면 주변에 귀찮도록 사람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오후 2시야.”
헬무트는 아레아 등 뒤의 시계를 가리켰다. 수행 과제 때문에 빠지는 건 2학년들뿐. 다른 학년들은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 한적함은 유지될 것이다.
‘오랜만에 느긋하네.’
시간에 쫓기면서 온 힘을 다해 던전을 통과하고, 깨어난 직후 신전과의 전투를 치렀다.
헬무트에겐 그 중간에 간격이 있었지만, 아레아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쉴 새 없이 뭔가가 이어진 것이다.
‘그래, 나는 람피오네의 유산을 손에 넣었어. 그리고 헬무트를…….’
전자를 위해 달려왔건만 전자가 더 만족감이 큰지, 후자가 더 큰지 순식간에 흐려졌다.
아레아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크로켓 몇 덩이를 올린 따끈한 카레가 눈앞에 있었다. 배고픔에 눈앞이 흐려졌다.
헬무트는 말없이 식사했다. 마치 식사하면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배운 것처럼.
하지만 그 역시 왠지 모를 간질거림을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문득 시선을 들어 아레아를 보았다.
아레아는 늘 환하게 보였지만, 오늘만큼은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헬무트는 그 사소한 차이점을 발견해 냈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내렸던 아레아는 오늘따라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꼭 건드려 보고 싶은 흐트러짐이다.
‘꼭 고양이 같군.’
그건 아레아를 보면서 헬무트가 종종 느끼는 기분이었다.
아스카는 물론이거니와 시안에게도 차갑기 그지없는 아레아가 제게만 누그러진 태도를 보일 때면 까다로운 고양이를 길들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식사하는데 머리를 쓰다듬었다간 아레아가 화를 낼 것 같았다. 헬무트는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사귀면 머리는 언제쯤 쓰다듬는 거지?’
라는 엉뚱한 의문을 품으면서. 교제하는 사이라는 건 좀 더 밀접한 접촉을 허용하는 사이 같으니 적절한 시기면 아레아도 납득할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웨슬리라거나 검술 학부 녀석들이 어떤 식으로 여자 친구와 어울리는지 봐 둘 걸 그랬다.
헬무트에게 이제껏 관심 밖인 부분이었다. 인간 세상을 종종 관찰하며 익혀 갔던 헬무트지만, 이쪽은 문외한이었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아레아가 왠지 모르게 투덜거렸다. 그의 앞에 있는 접시는 어느덧 거의 비워져 있었다.
며칠을 굶다가 처음으로 한 식사였다. 저도 모르게 해치우다시피 해 버린 것이다.
헬무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쳐다보면 안 되나?”
“아니, 그렇게 보면…… 의식하게 되잖아.”
아레아는 대충 얼버무렸다. 안 그래도 눈빛이 강한 녀석이다. 그 검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에도 압박감을 느끼는 녀석도 있을 만큼.
하지만 그 때문에 그의 진지함이 더욱 잘 느껴졌다. 그의 감정도.
헬무트는 간단하게 답했다.
“의식해도 돼.”
그러니까 자기는 마음 내키는 대로 쳐다보겠다는 소리다.
아레아는 당황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멋대로야.”
둘 다 식사를 모두 마치자, 헬무트가 물었다.
“그보다 우리 수행 과제는 어떻게 하지?”
“아 맞다, 수행 과제.”
아레아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답지 않은 허술함이었다. 오로지 던전에서 람피오네의 유산을 얻는 것만을 생각한 듯이.
아직 람피오네의 던전을 열어 보진 않았지만, 목표를 이뤘으니 모든 게 다 끝난 것만 같았던 것이다.
“서류에는 뭐라고 써냈는데?”
서류 작성은 아레아가 홀로 도맡았다. 아니, 이번 수행 과제 전반을.
물론, 헬무트는 그에게 기대된 역할 이상의 것을 수행해 냈지만.
아레아가 대마법사 람피오네의 던전을 탐사한다는 주제로 서류를 써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람피오네의 던전이 공략당했다는 사실도 언젠가는 밝혀질 터.
다른 무언가를 해 두는 편이 증거가 남지 않는다.
‘신전뿐만 아니라 마법사들도 추적하려 들겠지.’
람피오네의 던전이 공략당한 시점과 대신관 살해 시점이 비슷하다는 걸 혹시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두 사건에서 연관성을 찾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레아와 헬무트에게 이르지는 못하리라. 시체조차 남기지 않았으니.
아레아는 기억을 더듬었다.
“뭐라고 적었더라. 아아, 생태 조사인가. 자료는 다 있어. 하지만 아마 거기 갔다 왔다는 증거 자료를 제출해야 할 텐데.”
숲은 여기서 말로 이틀 거리였다. 꽤 멀었다. 하지만 아레아의 마법이면 어렵지 않게 닿을 거리이기도 했다.
헬무트는 바로 제의했다.
“그럼 가자.”
“벌써?”
“빨리 갔다 오는 게 낫지 않나?”
모처럼 수업이 없는 주간이다. 아레아면 보고서도 금방 쓸 테니 수행 과제니 뭐니 후딱 처리하고…….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건 혼자만 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쳐다볼 새라 주변을 돌아본 아레아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자.”
*
살짝 데면데면한 상태로 약간의 채집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아레아가 자료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내일 제출하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 두 사람의 손이 잠깐 맞닿았다. 헬무트가 붙잡은 것이다.
“내일은…….”
아레아는 두리번거리며 누군가가 주변에 있는 건 아닌지 의식했다. 이쪽은 남자로 변장하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다행히 복도 쪽 끝 방이라 인기척은 없었다. 헬무트는 제의했다.
“점심 무렵에 바덴에 나가 볼까.”
어차피 에단은 저택에 없을 테고, 명색이 수행 과제 기간인데 교관 저택에서 노는 것도 영 마땅치 않다.
“내일, 그래.”
아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옆방이지만, 이별의 시간이었다.
둘은 잠시 그 자리에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은 채로.
복도를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을 때야 그들은 비로소 등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섰다.
“잘 자.”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서.
*
다음 날, 헬무트는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수련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불쑥 방문이 열리고, 아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지 풀어진 느낌의 어제와는 달리 완벽하게 각이 잡힌 모습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저런 머리를 쓰다듬을 수는 없다.
헬무트는 기회를 놓친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아레아가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뭘 하면 좋을지 생각했어.”
과제를 작성하고 난 뒤에 한참을 고민에 잠긴 아레아였다.
계획을 중요시하는 그녀였다. 헬무트에게는 별다른 계획이 없는 것으로 보였고, 그렇다면 바덴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할 일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아레아는 그 이후를 생각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바덴에 나가보자는 헬무트의 막연한 계획을 그녀는 구체적인 스케줄로 바꾸어 놓았다. 자그마치 남은 수행 과제 기간 동안 모두를.
작성하다 보니, 왠지 데이트라고 하기에는 묘한 게 되어 버렸지만. 그건 헬무트의 의견도 반영하면 된다.
“자, 이걸 봐.”
헬무트는 아레아가 내민 스케줄 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의욕이 이는지 아레아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너는 다른 계획 있어?”
빈칸을 지목하며 이렇게 일정이 비어 있으니 조정할 수 있다고 아레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헬무트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사실 그에게는 딱히 계획이 없었다. 일단 아레아와 만난다는 것에 역점을 뒀을 뿐.
점심을 먹는다. 서점에 들른다. 혹은 상점에 들른다. 이후 카페에 들려서 책을 읽는다. 아레아의 계획은 대체로 이랬다.
‘독서에 굉장히 비중이 높은 것 같은데.’
독서라니. 헬무트는 아카데미를 다닐 때 아니면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건 그다지 헬무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렇게 하지.”
“좋아.”
아레아는 생긋 웃었다. 그 환한 미소에 심장에 찌릿함이 몰려왔다.
괜히 어둠의 싹이나 제 심장에 문제를 돌렸던 때가 우스울 만큼. 그는 이제 명확히 답을 알았다.
둘은 곧 점심을 먹고, 카페에 앉았다. 카페에는 이것저것 책이 구비되어 있었다. 음료를 마시면서 책을 읽는, 그런 장소인가 보다.
서점에서 다수의 학문 서적을 구입한 아레아는 책을 테이블에 쌓아 두며 권했다.
“여기에 가볍게 읽을 만한 책도 많아. 하나 가져다가 읽어봐.”
그리고는 재빨리 새로 산 책에 코를 박는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 집중도 잘했다.
이건 마치 아레아의 평범한 일상에 헬무트 한 명이 추가된 듯한 구도였다.
헬무트는 서점의 책꽂이 쪽을 돌아보며 ‘지금부터 시험공부를 하자’라는 말을 들은 기분을 느꼈다.
‘성적에는 보탬이 되겠어.’
어쩌면 자신에게 시험공부를 미리부터 하라는 걸 이런 식으로 피력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의도대로 함께 있는 건 되었다.
헬무트는 곧 아무렇게나 골라든 ‘대저택 살인사건’이라는 책을 읽은 후, 생각보다 독서에 취미를 붙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덴에서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