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13
212
헬무트
212화
“헬무트 야, 잘 갔다 와. 꼭 우승해라!”
“내년에 보자!”
아침 시간, 아스카와 시안이 손을 연신 흔들었다.
그들은 아직 시험을 남기고 있었지만,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들의 차석 자리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것으로 그레타 아카데미 2학년에서 그들과 마주할 일은 없으리라.
돌아올 때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있을 터. 그때는 바덴에 부는 바람도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돌아올지도 확실치 않지만.’
자신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적어도 이들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레아도.
마침 저 위쪽 창문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보랏빛 파편 같은 것이 창가에서 반짝였다.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어젯밤 충분히 인사를 나눴다. 얼굴을 못 볼 뿐이지, 앞으로 계속 연락할 수는 있다.
아레아가 자신이 연락하겠다고 말했으니까.
헬무트는 무심코 그쪽으로 향하던 시선을 내렸다. 앞에 준비된 마차에서 4명의 인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늦게 오다니, 뻔뻔한 녀석이군.”
시비조로 말하며 레온이 혀를 찼다.
교관 앞이라도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건, 그가 검술 학부에서 그만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쪽에 원한을 품고 있는 얼굴이다. 앞으로 여행길을 피곤하게 해주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보인다.
상관은 없었다. 그리 신경 쓰이진 않는다.
단지, 아쉬울 뿐. 헬무트는 피어오르는 살의를 갈무리했다.
‘죽여 없애는 건 곤란하겠지. 명색이 아카데미 대표이니.’
사고를 가장하여 죽이는 건 어떨까. 아니, 지금 가는 곳에는 대신관들이 있을지 모른다.
아레아가 함께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완벽한 뒤처리는 불가능하다.
기회가 되면 밟아 줄 수는 있겠지만, 죽일 수는 없다. 어둠의 싹 때문이라도.
‘기회가 오겠지.’
저런 녀석들이 끈질기다는 것은 이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갈등을 거친 마음은 다시금 잠잠해졌다. 헬무트에게 익숙한 평온이다.
갈등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가 맞닥뜨린 대부분의 상황은 맞닥뜨리고 나서야 답을 알게 되는 것이었기에.
믿을 것은 이 몸과 검뿐. 앞으로 가는 길에 충실하다 보면 결론이 날 것이다.
페트리샤 교관이 갈등 상황을 차단하듯 재촉했다.
“제군, 어서 마차에 오르도록.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몰라 시일을 넉넉히 잡긴 했지만, 여유 부릴 시간은 없다.”
꽤 오랜 여정이 될 거라 짐은 수북했지만, 인원수가 많지는 않았다.
마법 학부 교수 한 명과 검술 학부 교관 두 명이 함께한다.
도합 일곱 명.
세 대의 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술 학부 교관 두 명은 페트리샤와 알란이다.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교제하기에 둘이 같이 가는 쪽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한 걸지도 몰랐다.
마법 학부의 룩센 교수가 헬무트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1학기에 마법의 이해 수업을 들은 학생이로군?”
“네.”
“자네의 답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이 나네. 물론 그 잘생긴 얼굴도. 검술 학부 수석일 줄은 몰랐구만. 검술 학부치고는 워낙 답을 잘 써서 적성을 잘못 택한 건가 했네만.”
헬무트는 자신이 써냈던 답을 기억해냈다.
어둠의 힘에 관련된 문제였던가. 그때 헬무트는 신전에 반하는 답을 썼다.
마법사이니 그 점에 개의치 않겠지만, 혹시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닐까 헬무트는 그를 힐끗 살폈다.
빙긋 웃는 노교수에게선 별다른 의도를 읽어 낼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룩센 교수님, 헬무트는 검술 학부의 보배입니다만.”
어딜 탐내냐는 듯이 페트리샤 교관이 재빨리 자르고 들었다.
“헬무트야 워낙 모범생이니까 필기시험에도 성실하게 응했겠지요.”
“하하! 그런가. 마법 학부 학생이 아닌데도 내 수업에서 그만큼 좋은 성적을 얻어가긴 쉽지 않은데…….”
몇 마디 더 헬무트에 대한 칭찬의 말을 나눈 그들은 곧 마차에 올랐다.
레온 역시도 벌레 씹은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관에게 주목받지 못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헬무트는 공교롭게도 페트리샤 교관과 아레아가 피하라고 했던 샤를로트와 같은 마차에 타게 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
샤를로트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해왔다.
공손하면서도 태도가 비굴하지는 않다. 예의는 갖췄으나 어딘지 당당하면서도 꼿꼿하다.
절대로 평민은 아니다. 그러면 귀족 중에서도 어떤 위치일까.
헬무트로서는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시선을 느낀 샤를로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그녀와 헬무트는 무척 닮았다. 단지 헬무트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샤를로트는 단정하면서도 좀 유한 구석이 있는 얼굴이었다.
남을 배척하는 차가움은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성격 탓일까.
“아무것도.”
괜히 오해를 사면 곤란하다. 어쨌든 샤를로트는 헬무트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샤를로트를 좋아할 일은 없겠지만, 샤를로트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다.
페트리샤 교관이 피식 웃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헬무트, 샤를로트! 종합 검술 대회를 앞두고 있어! 남녀 학생 둘이 눈 맞고 그러면 곤란해.”
“눈을 맞다니요. 그런 말씀은 좀 그렇습니다.”
샤를로트가 왠지 정색을 했다. 정말로 그런 오해를 받기 싫은 것처럼.
다행히 그녀는 헬무트에게 마음이 없어 보였다.
샤를로트는 페트리샤 교관이 아끼는 모범생이자, 놀리는 맛이 있는 학생이었다.
그녀가 은근히 웃었다.
“왜? 눈이 맞을 수도 있지. 멀쩡한 남녀 학생들이 함께하는 여행인데. 무엇보다도 헬무트, 참 잘생겼지 않아? 본인이 둔해서 그렇지 여학생 중에 은근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더라.”
‘그랬나.’
헬무트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도 모르는 새에 아레아가 차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사실입니다만, 헬무트 선배는 제 타입이 아닙니다.”
샤를로트는 딱 잘라 말했다.
헬무트는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면전에서 넌 내 타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는 처음 겪어 봤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좋아할 만한 사람은 없다.
물론, 헬무트야 처음 겪는 경우다 보니 느끼는 감흥 정도일 뿐이었지만.
샤를로트도 아차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그러면 샤를로트의 타입은 뭔데.”
페트리샤 교관이 넌지시 물었다.
이 질문에는 헬무트도 약간 관심이 갔다. 인사를 한답시고 나와서 그녀를 힐끗거리던 누군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고심하던 샤를로트가 답했다.
“품행이 바르고 어른스러운 분이 좋지 않을까요.”
‘아스카 녀석은 안 되겠군.’
헬무트는 간단히 결론지었다. 아스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샤를로트의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건 무리일 테니까.
죽을 때가 되어서야 그렇게 바뀔까.
아스카와 친척 관계로 연결되고 싶지 않은 헬무트에게도 달가운 일이었다.
“외모는? 얼굴은 보지 않나?”
“사람을 볼 때 그 내면을 우선시하지 않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페트리샤 교관은 확신했다. 샤를로트라면 그레타 아카데미 도덕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을 거라는 것을.
하지만 곧이어 샤를로트가 덧붙였다.
“하지만 저도…… 아직 모자란 사람인지라 이왕이면 잘생긴 쪽이 좋습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일 테지만요.”
단호하게 덧붙인 샤를로트가 쑥스러운 듯 마차의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페트리샤 교관이 후후 웃었다.
“솔직해서 좋구나.”
헬무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씨를 느꼈다. 그건 완전히 꺼져 버린 줄 알았던 아스카의 희망의 불씨였다.
그한테도 일말의 가능성은 있을 것 같다. 아주 낮은 가능성일지라도.
*
“선배, 저 헬무트란 녀석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레타 아카데미를 대표할 검술 학부 우승 후보로서 교수진의 관심을 빼앗긴 데다가 내심 관심이 있었던 샤를로트와 같은 마차에 타지 못하게 된 레온은 심기가 불편했다.
헬무트란 녀석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왠지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말투로 선배인 닐스에게 물었다.
검술 학부에서 힘은 곧 서열이다. 학년의 차이가 있다면 조금 우대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레타 아카데미 고학년은 특히나 서열 관계가 뚜렷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실력의 진보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닐스도 자신이 레온의 아래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담담히 답했다.
“소문에는 1급 용병급의 암살자를 꺾었다고 하더군.”
“1급 용병급? 소문일 뿐이지 않습니까. 2학년 주제에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교관님들 입에서 나온 거라면 단순한 소문은 아니지 않을까.”
“그건…….”
레온이 안색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바꿨다.
“뭐 어쨌든, 녀석이 건방진 건 사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닐스는 가볍게 대꾸했다. 레온이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건방진 후배에게는 검술 학부다운 선배의 교육 방식이 있는 법이지요. 그에게 알려 줘야겠습니다.”
닐스는 무심히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레온을 자신이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소한 시비 정도는 검술 학부에서도 흔하다.
도가 지나치면 교관들이 알아서 제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행 중 최고학년 선배로서 한 마디 덧붙였다.
“큰 소란은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이지요.”
레온은 서늘한 얼굴로 웃었다.
*
바덴을 나선 뒤 처음으로 들어선 야영지. 교수진이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논의하러 자리를 비키자, 네 명의 학생이 덩그러니 남았다.
말을 풀고 짐을 내리고 있는데 뒤쪽에서 어떤 부름이 들려왔다.
“너, 헬무트!”
별로 달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선배의 말이 들리지 않나?”
헬무트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네.”
“가서 물을 떠 와라. 네가 할 일이다.”
레온이 물통을 향해 턱짓하며 고압적으로 명령했다.
헬무트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새로운 기분이다. 물을 떠 오는 건 용병들 사이에서도 4급 용병, 말단이나 하는 일이다.
이 녀석은 지금 헬무트를 말단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헬무트는 화를 내거나 그를 응징하지 않기로 했다.
레온의 서열 구분 기준이 학년이라면, 이 일을 할 건 헬무트가 아니었다.
헬무트가 물통 쪽을 지목하면서 지시했다.
“샤를로트, 갔다 와.”
“네.”
그의 떠넘김에 샤를로트는 군말 없이 나섰다.
2학년인 헬무트가 일을 하는 데 샤를로트가 가만히 앉아 있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1학년인 그녀가 말단인 건 당연했다.
비록 그녀의 원래의 신분이 이런 일에 전혀 어울리지 않더라도.
지켜만 보고 있던 닐스의 표정이 황당하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그도 사실은 내심 헬무트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이유는 레온과는 다소 달랐다.
그저 헬무트란 녀석이 은연중에 풍기는 위험스러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회피해 버릴 줄은 또 몰랐다.
샤를로트는 바로 물통을 들었다. 그녀의 두 손이 단단하게 묵직한 물통의 손잡이를 잡아 올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