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14
213
헬무트
213화
‘이 자식이 지금 뭐하는 짓거리지? 감히 샤를로트에게!’
이렇게 되면 자신에 대한 샤를로트의 인상도 나빠질 게 아닌가.
레온의 안면이 불룩거렸다. 그는 싸늘하게 잘랐다.
“샤를로트, 그만둬라. 나는 헬무트에게 시켰다.”
“제가 할 일입니다.”
샤를로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레온이 헬무트에게 서열을 잡으려고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딱히 헬무트를 감싸려는 의도가 아니다. 헬무트가 자신에게 시켰다면, 자신이 하는 게 맞는 일이었다.
헬무트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녀가 할 일이라는군요.”
어쩐지 얄미운 모양새였다.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화를 추스른 레온이 내뱉었다.
“네놈은 생각이 있나? 어찌 저런 작은 여자아이에게 저런 걸 시키지!”
검술 학부 녀석들은 대개 덩치도 크고 근육도 발달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여자인 샤를로트는 작고 연약해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녀가 검술 학부 1학년 수석이고, 비스를 다룰 줄 아는 검사라는 사실을 떠나서 못할 일을 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그 느낌에서 헬무트는 자유로웠다.
파헤의 숲에서는 아름다운 꽃도 인간을 잡아먹는다.
그는 샤를로트가 강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제가 하는 게 맞습니다. 선배, 저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물통쯤은 들 수 있습니다.”
헬무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샤를로트가 잘라 끊었다. 모욕을 당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물통을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샤를로트의 반응에 이를 악물었던 레온의 낯빛에 싸늘한 기운이 번졌다.
‘샤를로트가 설마 저 녀석을?’
그럴 리 없다. 하지만 헬무트란 녀석, 외형만은 그럴싸하지 않은가.
반감이 일었다. 레온은 샤를로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놀랍도록 반반한 외모와 품성을 보건대 고위 귀족가 출신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대개의 귀족가의 여식들은 학문이나 마법을 갈고 닦는다.
검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귀족 소녀라니, 얼마나 희귀한가.
그 희귀함에 레온은 샤를로트에게 관심을 두었다. 그녀를 손에 넣는다는 건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리라.
이번 기회를 틈타 조심스럽게 접근할 생각이었는데, 시작부터 망쳐졌다.
저 헬무트란 녀석 때문에!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레온은 거친 소리로 비난을 퍼부었다.
“내 그레타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로, 평민과 말을 섞을 일이 없어 그 미천함을 알지 못했다! 여자에게 제 일을 떠넘기다니 과연 평민다운 생각이다. 내가 너를 과대평가한 모양이로구나!”
평민과 같은 곳에서 수학하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사실이나, 레온은 검술 학부 최정점에 있었다.
애초에 그의 주위에 득시글거리는 녀석들은 모조리 귀족이다.
자연히 평민에 대한 차별 의식을 드러낼 일이 없는 것이다.
아카데미의 교육도 그것을 규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필 평민이 거슬린 순간, 의식이 삐져나왔다.
눈에 보이는 결점이라면 모조리 꼬투리를 잡아야 한다.
레온은 어디까지나 싸움의 원칙에 충실했다.
헬무트는 단박에 끊었다.
“선배의 생각에 샤를로트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군요.”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이건 뭐지?’
헬무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마치 치정 싸움의 한가운데에 놓인 듯했다. 문제는 헬무트가 샤를로트를 놓고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거다.
보다 못한 닐스가 끼어들었다. 평민 어쩌느니 하는 것은 레온이 약간 지나치다고 생각한 참이다.
그는 원칙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헬무트를 편들고 싶지는 않았다.
“샤를로트는 리노사 출신이라고 들었다. 리노사로 향하는 지금, 리노사 출신의 귀족에게 이 같은 허드렛일을 맡기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헬무트의 고개가 살짝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리노사에 가면 어차피 시중인이 딸린 숙소에 머물 게 아닌가.
아카데미 선발 인원들에겐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줄 터였다.
그전까지 허드렛일을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리노사 사람들은 모를 테니까.
어쨌든 헬무트는 레온이 뭘 시키든 할 생각이 없었고, 샤를로트는 떠넘김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거면 되었다.
헬무트는 차갑게 잘랐다.
“그녀가 리노사 출신이든 아니든 주어진 일을 하는 데는 상관없습니다.”
싫으면 거부하면 그만이다. 헬무트도 샤를로트가 거부하면 나도 안 한다고 할 생각이었다.
레온이란 이 녀석, 그냥 대련을 청하면 될 것을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귀찮았다.
그리고 레온은 드디어 헬무트가 생각한 대로 움직였다.
“그래, 네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다. 내가 네 녀석의 정신머리를 고쳐 줘야겠다!”
레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었다.
두들겨 패 줄 명분을 찾았던 것인가.
‘뜻대로는 안 되겠지만.’
헬무트는 무심하게 그를 봤다. 이런 약한 녀석들 손봐 주는 것도 이제는 지루하다.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죽이지 않을 정도로 강도를 조절해야 하니까.
우습게도, 레온은 자신이 이기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의 실력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그는 곧 그게 큰 오산이며, 이 그레타 아카데미 선발 인원 중 누가 우승 후보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맞붙기 전, 방해꾼이 나타났다.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마친 교수진이 나타난 것이다.
이리로 향하던 그들은 레온과 헬무트 사이에 이뤄진 대치를 보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알란 교관과 페트리샤 교관 사이에는 근무 중에 딱히 분홍빛 기류가 흐르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알란 교관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레온이 단박에 부인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지어낸 듯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니요. 후배와 대련을 할까 했는데, 적절한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교관 앞에서 싸워 본대 봐야 얻을 게 없다. 그가 바라는 건 사실상 대련이 아니었으므로.
알란 교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소한 다툼에 일일이 끼어들어 봐야 악영향을 줄 거라는 판단이다.
‘헬무트 녀석이 호전적이지는 않은데, 묘하게도 싸움을 부른다는 말이야.’
차갑고 위압감 서린 분위기 때문인가.
헬무트는 왠지 모르게, 특히 검사들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실력을 잴 수 없는 모호함. 외견은 유약한 것에 가까우나 분위기는 그렇지 않으니 그 모순이 건드려 보고 싶은 것이다.
판단할 수 없기에 판단을 하려면 건드려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헬무트가 바소르에서 유독 시비가 많이 붙은 것이기도 했다.
페트리샤 교관이 주변을 돌아보며 물었다.
“샤를로트는?”
“물을 뜨러 갔습니다.”
사실 마실 물은 충분히 가져왔고, 마법사도 있는 터였다.
딱히 물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알란 교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물을…… 음, 뭐 1학년이니 샤를로트에게 시킨 건가. 하지만 단독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 이곳은 그레타 아카데미가 아니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늘 함께 다니는 것을 염두에 두도록. 헬무트, 네가 물가로 가 봐라.”
“네.”
헬무트는 흔쾌히 자리를 떠났다.
물가를 내려가니 샤를로트가 물을 가득 채운 물통을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근심이 서린 얼굴이었다.
‘혼자 들기 무거운가.’
샤를로트가 그렇게 힘이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헬무트는 물었다.
“무거워서 못 드는 건가?”
샤를로트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헬무트는 자신이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누굴 노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습관이었다. 특히 이런 숲에서는.
“선배는 참 기척이 작군요.”
샤를로트는 언제든 습격당할 수 있는 외부에서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부끄러운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혼자 들 수 있습니다. 곧 돌아가려고 했어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가 보셔도 됩니다.”
“교관님이 단독 행동은 안 된다더군.”
“……그랬군요. 그럼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샤를로트의 안색이 어두웠다. 대충 살피건대, 몸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마음의 문제.
‘혹시 내가 일을 시켜서 그런 건가.’
그게 왜 기분 상할 일인지 명확한 이유는 몰랐으나, 할 말은 있었다.
“너한테 시킨 건 사감이 아니었어.”
헬무트 스스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인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두 선배의 반응을 보니 뭔가 이상한 짓을 한 건가 했다.
‘나도 아직 인간 세상에 완전히 익숙해진 건 아니니.’
그러나 샤를로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물론 그와 별개로 불필요한 일을 굳이 서열잡이를 위해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굳이 사족을 덧붙이는 것은 그녀답다. 샤를로트도 바보는 아니었다.
“제가 그 일로 기분이 상했다면, 그것은 선배의 탓이 아닙니다.”
헬무트의 탓이 아니라면 레온의 탓이라는 거다. 결론은 명쾌했다.
잠깐 침묵이 깔렸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 침묵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헬무트는 선 채로 느긋이 기다렸고, 샤를로트는 흘러가는 물살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불쑥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 선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뭐지?”
마그리트 이레인에 관한 거라면 말해 줄 수 없다.
아직 헬무트도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샤를로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사소한 고민입니다만, 물을 사람이 없군요. 단지 선배는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주실 것 같아서…….”
그 말에는 너는 무슨 말을 들어도 아무 생각 없을 것처럼 무신경하다는 듯한 판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헬무트는 불쾌해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는 무신경하니까.
“말해.”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잠깐 아레아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레아에게도 비밀로 하라고?
샤를로트와 말을 많이 섞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헬무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샤를로트는 자신과 혈연관계다.
그는 찰나의 고민 끝에 내뱉었다.
“그러지.”
샤를로트의 입에서 천천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배는, 형제가 자신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형제가 없어서 모르겠는데.”
일단 싫어할 형제가 있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감정 아닌가.
인간은 권력을 위해서 형제도 부모도 죽인다. 형제끼리 사이가 안 좋다는 게 대수로운 일인지 모르겠다.
샤를로트는 그 사실에 마음을 쓰는 듯이 보이지만.
“형제가 아니라면, 혈육이라고 하지요. 가족이라는 말도 괜찮겠군요. 모른 척할 수 없는 사람이 선배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미하엘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리노사로 출발하자 마음이 더욱 술렁였다.
미하엘은 또다시 편지를 보내왔다. 리노사에 도착하자마자 얼굴을 보길 원한다는 편지였다.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해 마음이 녹았다기엔, 샤를로트가 아는 미하엘은 그런 무른 소년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