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3
22
헬무트
22화
2장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
열네 살의 핀은 중소 규모이나 평판이 좋은 페이스 용병단의 말단이었다.
동패를 가진 4급 용병으로 쳐주는 것도 감지덕지할 만한 실력의 소년.
고아로 어린 시절부터 페이스 용병단에 소속되어 잔심부름을 도맡아 왔다.
‘나도 몇 살 더 먹으면 달라질 거라고!’
그러려면 경험이 필요했다. 핀이 이번의 임무에 따라나서게 된 건 잔심부름꾼으로서였다.
페이스 용병단의 다수 용병이 고용되는 큰 의뢰가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으로 맡는 임무라 잔뜩 긴장한데다가 야영에 익숙지 않은 핀은 으슥한 숲속에 머물게 된 것이 꺼림칙했다.
“하필 이런 곳에서 쉬냐고요. 여긴 그 파헤의 숲 근처잖아요.”
“투덜대지 말고 가서 물이나 길어 와. 저쪽에 계곡에 하나 있더라.”
3급, 은패 용병인 타냐가 씩 웃으며 손가락질로 물통을 가리켰다.
핀과 같은 용병단 소속의 그녀는 꽤 인정받는, 실력 있는 용병이었다.
키가 크고, 탄력 있는 몸매의 그녀는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단발에 쾌활한 인상이었다.
용병들 중에선 그나마 핀을 덜 부려 먹고, 성격도 좋은 편이었다.
핀이 머뭇거리며 묵직한 물통을 집어 들었다.
“에이씨, 날도 어두워지는데.”
“에이씨? 말버릇하고는!”
딱! 머리를 쥐어박힌 핀이 입을 삐죽 내밀며 물통을 집어 들었다.
“빨리 갔다 와! 더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에 뭉그적거렸던 걸음이 빨라졌다.
이 숲은, 마물들이 산다는 파헤의 숲과 가까워서 그런지 왠지 우중충했다. 공기도 습한 것이 으슬으슬 느낌이 좋지 않다.
‘빨리 물이나 뜨고 돌아가야지.’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핀은 물속에 물통을 처박았다. 금방이라도 물귀신이 머리를 잡아챌 것 같았다. 물귀신?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뭔가를 본 것 같은데.’
그리고 핀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으아아아악!”
계곡에서 엄청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뭐야? 무슨 일인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오는 핀이 보였다. 용케 다리는 얼어붙지 않은 것 같다. 물통을 어디다 내던졌는지 손이 텅 빈 채였다.
“저, 저기 시체, 시 시체가 있어요! 엄마! 사람 살려!”
용병이라지만 용병단에서 심부름만 했던 핀은 시체란 걸 태어나서 처음 봤다.
용병들이 수군거렸다.
“이런 데 시체가 있다고?”
“저 새끼 저거 겁쟁이잖아. 나무토막 같은 걸 잘못 봤겠지.”
“내가 한 번 확인해 볼게.”
타냐가 앞장서서 핀의 어깨를 붙들었다.
“시체가 어디에 있는데?”
“저, 저기…….”
“앞장 서! 네가 두고 온 물통도 찾아와야 할 것 아니야.”
타냐가 단호하게 말하자 울상이 된 핀은 주춤거리며 앞장섰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인지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계곡에 가까워지자, 핀은 멈칫거리며 손가락질했다.
“저, 저기 있었어요.”
“어디? 이쪽이라고?”
그때,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던 타냐의 눈에 뭔가가 잡혔다.
반쯤 모래에 파묻힌 채 물살에 쓸려서 미미하게 흔들리는 그것은, 나무토막처럼 옆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형체였다.
경각심에 타냐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이런 곳에 시체가?’
의뢰자가 되도록 빨리 용병들이 도착하길 원했기에 그들은 모두가 꺼리는 파헤의 숲 인근으로 틀어 길을 가던 중이었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 시체라니.
타냐는 조심스럽게 시체에 접근했다. 온통 모래투성이의 시체에 가까이 간 타냐가 눈을 부릅떴다.
“핀! 어서 이리 와!”
“네?”
“숨을 쉬고 있어! 여기서 건져 내야겠어!”
*
완벽히 의식이 끊겼다. 동면에 든 것처럼 의식을 유지할 기력마저도 몸을 회복하는 데 모조리 써 버린 모양이었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 헬무트는 자신이 부산한 소음에 둘러싸여 있단 걸 깨달았다.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린다.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키기 무섭게, 헬무트는 날카로운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의 근육이 엇나간 듯이 삐그덕거렸다.
‘여긴…… 어디지? 내가 어떻게 된 거지?’
헬무트는 시선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담요로 몸을 감싼 채 누워 있었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람이라니? 그렇게 낯선 광경을 본 적이 있을까.
헬무트는 오싹하게 얼어붙었다.
“어? 깨어났네?”
그중 한 명이 그가 깨어난 것을 발견해 다가왔다.
“이봐, 정신이 들었어?”
충격에 빠진 헬무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보았다.
단발머리의 여자.
헬무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그 인간 농장의 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처럼 느껴졌다.
헬무트보다 훌쩍 큰 키에 튼튼해 보였다. 얼어붙은 얼굴의 헬무트를 향해 단발머리 여자가 씩 웃었다.
“겁먹지 마. 여긴 안전하니까.”
겁먹은 게 아니라 경계하는 거다. 헬무트는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그녀를 응시했다.
“물 뜨러 간 놈이 걸레짝이 된 널 보고 비명을 질러서 정말 시체를 건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해서 다행이야. 너, 왜 그런 곳에 그런 꼴로 있었던 거야?”
쏟아지는 말들에 헬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아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이 낯선 시선들. 이 여자의 목소리며 말투가 잘 와 닿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울 뿐. 적의가 실려 있지 않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한가? 이름이 뭐야?”
“헬무트.”
정신을 차린 헬무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데.”
헬무트는 다리언이 건넨 조언을 떠올렸다.
‘너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랐다. 뭐라 말해야 할지 곤란하다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둘러대라. 머리에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는 건 흔한 일이니까.’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아 머뭇거리는 듯이 말한 게 의도치 않게 진실성 있어 보였다. 타냐가 얼굴을 팍 찌푸렸다.
“그래? 이거 곤란하군. 기억을 잃었다니. 크게 외상은 없어 보였는데 머리를 다쳤나?”
곧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헬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타냐야. 페이스 용병단의 3급 은패 용병이지. 네 검은 옆에 있어. 그 검, 좋아 보이던데?”
무심코 맞잡은 손은 기묘하게 따뜻했다.
선불 맞은 듯 놀라 손을 거둬 낸 헬무트는 바로 파헤의 숲으로부터 가져온 물건들을 확인했다. 펜던트도.
혹시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해서 세게 묶어 놨는데, 다행이었다.
돌에 쓸리기라고 했는지 표면이 우그러지고 더럽혀져서, 안을 확인하지 못했을 것 같다.
“효과가 좋은 약을 몸에 발라 놨으니 그래도 살만할 거야. 너도 꽤 회복력이 좋은 모양이던데?”
헬무트는 뒤늦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각이 반쯤 마비되어 느끼지 못했다.
“옷이…….”
갈아 입혀진 채였다. 그리고 안쪽으로 덕지덕지 연고가 발리고 붕대가 감겨 있었다.
“네 옷 너덜너덜하다 못해 걸레짝이길래 저기 저 녀석이 갈아입혔어. 약도 저 녀석이 발라줬으니 이따가 고맙다고 말해!”
타냐는 옆쪽에서 담요를 깔고 잠들어 있는 소년을 향해 턱짓했다.
“아, 그리고 참. 너 반말밖에 할 줄 모르는 거 아니겠지?”
눈을 부라리는 모습에서 헬무트는 기시감을 느꼈다.
“네.”
“좋아, 그래야지.”
괴리감이 들 정도로 표정이 확 바뀐 타냐가 활짝 웃었다.
그녀는 헬무트가 자신의 몸을 살피는 사이, 모닥불 쪽으로 다녀와서 빵을 푹 담근 수프 그릇을 내밀었다.
“자, 어서 먹어.”
‘다리언이 바깥에선 함부로 먹을 것을 받아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헬무트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여자에게 나약하고 돌봐 줘야 할 소년으로 비치는 것 같았다. 그런 상대에게 이상한 걸 먹이진 않을 거다.
음식을 눈앞에 두니 위장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몹시도 허기졌다.
헬무트는 일단 배를 채우고 나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파헤의 숲 밖에서의 첫 식사는 볼품없었으나 맛있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아니요, 여기가 어딘데요.”
“디케이 숲이잖아. 몰라? 기억 안 나?”
“네.”
타냐는 식사를 마친 헬무트에게 이것저것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기억을 잃어 본 적은 없지만 헬무트는 애초에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자연스럽게 기억 상실 증상을 흉내 낸 것 같다.
타냐는 헬무트가 아주 일부의 상식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걸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이거 참 미치겠네. 그럼 기억나는 게 뭐야?”
“제 이름이요. 그리고 제가 검을 쓸 줄 안다는 거요.”
거짓을 지어 내기 힘들면 한정된 진실만을 말하라는 다리언의 가르침을 헬무트는 또다시 충실하게 수행해 냈다.
“검은 좀 쓸 줄 알아? 그건 다행이네. 일단 몸부터 좀 나아야겠지만. 일어설 수는 있어?”
헬무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증이 남아 있긴 하지만 두 번째 의식을 잃기 전보단 몸이 한결 뜻대로 따라 주었다.
동면에 가깝게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타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은 괜찮은 것 같고, 머리는 의원한테 보이면 나으려나? 약을 지어 먹어야 할 텐데 마을에 가면 의원한테 가 보지.”
옆에서 한 사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이, 타냐. 새로 심부름꾼이라도 들일 셈이야?”
“시체 같은 몰골로 그런데 버려져 있던 애야. 불쌍하지도 않아? 기억도 잃었다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걸어 나갈 수 있을 때까지는 돌봐 줘야 할 거 아니야.”
사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그렇지.”
타냐는 헬무트의 어깨를 턱 짚으며 호쾌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넌 내가 당분간 책임진다.”
당황스러웠으나 그녀의 밝은 갈색 눈동자와 이까지 드러나는 미소에 비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호의였다.
그들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서 다른 꿍꿍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 어딘지 겪어 본 것 같은데.’
헬무트는 까마득히 오래전, 비슷한 상황을 맞이해 본 적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파헤의 숲에서.
‘누군가에게 주워져서 돌봄을 받을 운명이란 것도 있나?’
그런 게 있다면 아마 헬무트의 운명인 듯하다.
헬무트는 이 의무감 넘치는 은인에게 자신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았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감돌았다.
“고마워요.”
그러나 타냐는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보다 너 좀 씻어야겠다. 이따 핀이 깨어나면 같이 세수라도 하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