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42
241
헬무트
241화
“궁에서의 생활은 좀 어떤가요.”
“편안합니다.”
대공비는 혼자였다. 저편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사람을 물리고 온 모양이다.
대화를 하고자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설핏 웃었다.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평민이라고 들었는데.”
평민 주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미하엘조차도 헬무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귀족 저택에서 생활해 본 적 있습니다. 제게는 귀족 후견인이 있었습니다. 후견을 받고 아카데미에 들어왔지요.”
“그레타 아카데미에 편입했다고 들었어요. 귀족 후견인과는 어떻게 아는 사이죠?”
“제 스승님과 친분이 있는 분입니다.”
미하엘은 검성 다리언이 헬무트의 스승일 거란 의심을 대공비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에 관해 몇 마디 대화가 오갔다.
리노사 대공비는 절대로 서둘러 캐묻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 신중함이 어머니의 성격이라는 걸 헬무트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절대로, 제 발밑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었다.
귀족으로서 자랐고 귀족으로서 살았기에.
대공비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나요.”
“숲속에서 살았습니다. 스승님과 둘이서. 사냥을 하고, 검술을 배우면서요.”
비껴가던 대공비의 시선이 바로 헬무트에게 꽂혔다. 그녀는 느릿하게 물었다.
“부모님은요.”
“어릴 적에 버려져 고아였습니다.”
“저런…….”
둘은 어느덧 함께 나란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이 차가 있지 않았다면 대공비와 헬무트가 이렇게 단둘이 함께 있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짐작은 가나요?”
“짐작은 합니다. 하지만 버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찾을 생각은…… 없나요?”
“그분들이 원하시는지 알 수 없어서요.”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있다. 평민으로 태어나고 귀족으로 태어난 것보다 절대적인 것.
헬무트가 어둠의 싹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때문에 버려진 것처럼.
헬무트는 파헤의 숲을 나옴으로써 어둠의 싹을 가진 인간은 그곳에서 살아나올 수 없다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서 가능했던 일이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렇군요. 그립지는 않나요?”
“그립습니다.”
헬무트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 그리움 때문에 그가 이곳에 온 게 아닌가.
리노사 대공비는 입을 닫았다. 그들의 걸음은 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벽에는 리노사 대공가의 역사를 말해 주듯 초상화가 일렬로 나열되어 있었다.
혈통의 힘은 강렬했다. 닮은 구석이 두드러지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헬무트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길을 멈추었다.
“여긴.”
초상화의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현 대공과 대공비에 이어 누군가의 초상화가 놓여야 할 자리.
지금보다 앳된 얼굴을 한 미하엘과 샤를로트의 쌍둥이 초상화 바로 옆이었다.
헬무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는 왜 비어 있는 겁니까.”
리노사 대공비는 잠시의 침묵 뒤, 입을 열었다.
“초상화를 그리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흔적이지요.”
헬무트는 그곳이 자신의 자리임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라토나에 그의 흔적 따위는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헬무트란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조차도 지워져 버린 것처럼. 헬무트 자신이 펜던트를 가지고 있고, 어머니가 여기 있지 않았다면 헬무트는 자신이 태어난 자리가 이곳인지 영영 알 수 없었으리라.
그는 그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묻은 존재였으니까.
빈 공간을 들여다보던 대공비의 안면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힘겹게 토해내듯 고백했다.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던 내 첫 번째 아이예요.”
헬무트는 말을 삼켰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가끔씩, 그 아이를 떠올려 보곤 하죠.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리 아프지 않거든요. 그 아이가 멀쩡히 자라났다면 어떻게 자라났을까. 리노사의 혈통대로, 검을 쥐었겠고 아마 훌륭한 검사가 되었겠죠. 리노사의 후계자로서 훌륭히 자라났을 거예요.”
리노사 대공비는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헬무트를 보고 놀랐어요. 헬무트는 내 상상 속의 그 애가 성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거든요.”
가슴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아니, 통증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었다.
헬무트는 리노사 대공비를 쳐다봤다. 그녀 역시도 헬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노사 대공비의 눈빛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희망.
“내가 내 아이를 내 뜻으로 떠나보내지 않았듯, 헬무트의 부모님도 헬무트를 그들의 뜻으로 떠나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평민은 귀족과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그녀와 달리 자신의 의지로, 가난 때문이든 제 삶을 지키기 위해서든 태어나선 안 될 아이였기 때문이어서든 아이를 버리는 부모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리노사 대공비는 그런 가능성을 무시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저 자신이 해 주고 싶은 말을 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헬무트가 돌아온다면, 저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자신의 첫 번째 아이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받아들일 것처럼.
그 말이 헬무트를 움직였다.
그를 막아서던 벽이 허물어졌다. 헬무트는 바로 입을 열었다.
“제가 대공 전하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공녀 저하와도 그랬지요.”
불순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어떻게 평민이 감히 리노사의 대공, 그리고 대공녀와 닮았다는 말을 입에 담는가.
하지만 리노사 대공비는 그의 무례를 책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의 묘한 기류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래요, 헬무트는 리노사의 혈통으로 보이더군요. 내 눈에도.”
“저는…… 리노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도 이곳 라토나에서.”
헬무트는 대공비의 눈을 직시했다. 흡사 대공의 사생아임을 고백하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님을, 대공비는 깨달았다.
푸른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부모님이 이곳 라토나에 아직 있나요?”
헬무트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증거라던가 표식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요. 찾아볼 수 있을 거예요.”
대공비의 목소리가 최초로 떨림을 머금었다.
“표식이 있습니다. 제가 버려졌을 때,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이요.”
“그게 뭔가요?”
그러나 헬무트가 대답하기 전에, 저편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여기 계셨군요, 어머니.”
흠칫 놀란 것은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화에 몰두하고 있었던 탓에 헬무트조차도 이리로 접근하는 그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마치 밀회의 현장을 방해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미하엘.”
“이곳으로 향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천사 같은 미소를 머금은 금발 소년은 리노사 대공비에게 먼저 시선을 주었다.
마치 헬무트의 존재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했으리라.
거리가 있었고, 그렇게까지 가까이 왔다면 헬무트가 먼저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테니까.
“그런데 샤를로트의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군요.”
“그래, 샤를로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대공비는 사르르 웃었다. 거짓말이었다. 헬무트는 그녀가 이 대화의 내용을 미하엘이 모르길 바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헬무트도 마찬가지였다.
“리노사 대공가의 초상화라…….”
미하엘의 시선이 잠시, 대공비가 쳐다보던 빈 공간에 머물렀다. 그곳의 존재를 미하엘도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할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만 가 보아야겠어.”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여건이 안된다는 것을 확인한 리노사 대공비는 먼저 자리를 떠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마음껏 둘러보도록 해요. 미하엘 조금 후에 보자꾸나.”
그녀는 다시 차분해진 눈빛으로 헬무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훼방꾼 미하엘과 헬무트는 둘이서 그 자리에 남겨졌다.
의식적으로 레온만 찾고 헬무트를 홀대하고 있던 미하엘이었다.
바로 떠날 줄 알았던 그가 헬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헬무트, 당신은 잘 지내고 있나요?”
“네.”
짤막한 대답에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혹시 어머니를 사모하고 있는 건 아니죠? 아직 젊고 아름다우시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헬무트는 미하엘 앞에서는 유독 말하는데 신경을 썼다. 하이드로 그를 대했듯이 저도 모르게 말을 놔 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왜 어머니 앞에선 당신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 같을까요.”
“착각이겠지요.”
헬무트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이젠 거짓말도 꽤 익숙해졌다.
미하엘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곧 싸늘해졌다.
“그렇다면 주의하는 게 좋겠어요. 대공께서 자리를 비운 지금,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저를 찾으신 건 대공비 전하입니다만.”
헬무트는 간결하게 사실을 지적했다.
어쨌든 그는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많은 귀족을 만났고, 그들 중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아카데미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자신의 동생인 미하엘이라면, 어쨌든 그건 더욱 잘 되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그가 리노사의 대공자고 자신을 경계하고 있어도.
“그 말투, 정말로 건방져. 그래서 당신다워요. 그 점이 마음에 들었지만.”
미하엘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부정이 따라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그 뒷말을 꺼낼 수 없었다.
머리로는 적으로 규정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은 헬무트를 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그 괴리감이 묘했다.
미하엘에게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