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43
242
헬무트
242화
‘정말 당신이 내 형제인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랬다. 미하엘은 하이드에게 끌렸다.
그가 강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쩐지 끈덕지게도 곁에 두고 싶었던 것 같다.
샤를로트에게 느끼는 것과 유사한 집착이었다.
미하엘은 자신의 욕망이 뭔지 잘 알았다. 그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은 없었으므로.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에 가까이 있는 그에게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마저 없었다면, 그 끈질긴 고통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미하엘은 자신이 여전히 하이드를, 아니, 헬무트를 제 아래에 두길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시하기 힘든 소유욕이었다.
혈연에의 끌림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것이 그에게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 어차피 사생아나 방계 따위가 내 위치를 위협할 수는 없지.’
설사 리노사 대공이 헬무트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비를 배반하고 혈통을 뒤흔드는 선택을 하지 않을 자다.
실력, 재능, 그 모든 걸 떠나서 리노사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건 오로지 정비의 자식뿐이었다.
그것은 대대로 지켜져 온 원칙이었고, 리노사 대공은 그 원칙에 어긋나는 선택을 하지 않을 자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든, 내 뜻대로 만들겠어. 원래 야생마를 길들이는 건 힘든 일이니.’
미하엘은 충실히 후계자로서 제 역할을 해왔다.
비록 검을 다룰 수는 없지만, 그가 리노사의 대공이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까다로운 대공도 부인할 수는 없으리라.
초상화가 늘어선 이곳에서 뭔가 걸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미하엘은 그 기분을 뿌리쳤다.
“할 말은 끝났는지요.”
헬무트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헬무트에게도 미하엘은 묘한 존재였다.
제 앞에서 건방을 떠는 걸 쥐어박고 싶으면서도 죽이고 싶진 않았다.
헬무트는 약한 녀석이 기어오르는 걸 참아 주기 힘들어하는, 약육강식에 익숙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미하엘은 하찮을 만큼 약했다.
호위를 달고 오든 그렇지 않든 새끼손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다. 누구도 막아설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상할 만큼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귀찮게 군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조금씩 응해 주게 된다.
그가 방해꾼이 된 지금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도 아스카나 시안 같은 녀석들한테 시달린 탓인가.
‘나도 인내심이 늘었지.’
역시 다리언의 말대로 아카데미 생활은 헬무트를 사람답게 만들었다.
그의 안배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자신은 괴팍하고 폭력적인 늙은이일지라도, 안목만은 있었다.
미하엘은 해사한 얼굴로 웃었다.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렇게 될 거예요.”
그 오만한 선언을 남기고 미하엘은 그 자리를 떠나갔다.
헬무트는 무심한 눈으로 초상화의 빈자리를 다시 쳐다보곤 발을 움직였다.
*
마그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미하엘이 나타나다니.’
미하엘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마그리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하엘은 지나치게 영민한 아이였다. 그가 뭔가를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알아선 안 될 것을.
마그리트는 그것을 우려했다. 입이 무거운 샤를로트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진실이었다.
마그리트는 귀족이었고, 리노사 대공비다.
사랑하는 자식들이라고 한들 마냥 믿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태연스럽게 미소로 마무리하며 그 자리를 빠져나온 마그리트는 처소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표식을 가지고 있다고.’
일순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샤를로트는 마그리트에게 말했다. 헬무트가 ‘마그리트 이레인’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처녀 적 이름이 적힌 펜던트.
마그리트는 자신의 첫 아이를 떠나보낼 때 마지막 선물로 그것을 목에 걸어 주었다.
가는 길이라도 축복이 있기를, 하는 바람을 담아서.
그러나 그 아이는 파헤의 숲으로 보내졌고, 첫 아이를 위하여 만든 펜던트는 아이와 함께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졌다.
그것은 정해진 결말이었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어. 불가능해.’
마그리트는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나 부정하는 그녀에게 회의와 의심이 들어찼다.
만약, 뭔가 실수가 있었다면? 신전에서 잘못 판별한 것이라면? 그들의 신성 마법이 온전하지 않아,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면?
그래서 그 아이가 운 좋게 살아남았다면…….
헬무트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둠의 싹을 품고 태어난 아이는 비록 어린 시절 뛰어난 재능을 보일망정 잔인한 심성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폭주하여 괴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헬무트는 제정신처럼 보였다. 오히려 아주 침착하고 냉정해 보였다.
그는 제 여동생도 손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았다.
다른 출전자들에게도 살의를 드러내긴커녕 침착하게 승부를 결정지었다.
헬무트는 상대를 짓밟아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방안을 서성거리던 마그리트는 고개를 쳐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단호한 빛을 머금었다.
‘그 애를 다시 만나 봐야겠어.’
만날수록 명료해지며, 만날수록 흔들렸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혹시 리노사의 핏줄을 이어받은 저 수상한 소년이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그 어떤 생각도 본능의 끌림보다 우선하지 않았다.
리노사 대공비가 아닌 마그리트로서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기로 했다.
*
늦은 밤이었다. 헬무트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의 원인과 귀결은 그 자신의 강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은, 제가 태어난 땅에 와서도 옅어지지 않았다.
신전이 존재하는 한 그는 벼려진 검이어야 했지만, 신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헬무트는 살아온 대로 살아갈 것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그는 검사였고, 검은 그의 삶이었다. 그걸 손에서 놓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헬무트는 요즘 목검이 아닌 진검으로 수련했다.
라토나에서 산 검에도 이제 익숙해져서 편안하게 다룰 수 있었다.
다리언의 검보다는 못할지라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 위장도.
‘미하엘이 뭔가를 눈치챘을까.’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 마음에 걸린다.
어쨌든 미하엘이 자신을 귀찮게 하겠다는 듯이 말하긴 했지만,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었다.
개인 수련장은 고적했다. 방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그밖에 드나들 수 없는 장소였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은 잠겨 있다. 리노사는 검사를 우대한다.
그래서 검사를 위하여 특별히 이런 개인 수련장이 딸린 처소를 준비해 둔 것이다.
‘슬슬 들어가 볼까.’
왠지 마음이 산란했다. 의식적으로 집중하긴 했어도, 그리 성과는 없을 것 같다.
요즘 아레아도 잠수를 선언하고 말을 걸어오지 않아서 할 일이 퍽 없었던 터였다.
그러나 그가 이동하려던 순간, 바깥으로 연결된 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발소리였다. 하지만 헬무트는 흠칫 멈춰 섰다.
몇 번 듣지 못한 발소리였건만, 귀에 익었다.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사로잡힌 듯이 헬무트는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삐그덕. 자물쇠가 열리고 문이 움직였다. 긴 치맛자락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조명을 받은 금발이 눈부셨다. 우아한 귀부인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 입던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평상복에 가까운 차림으로. 잠시 빠져나와 들린 것처럼.
그녀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굳어 있던 헬무트는 짤막하게 인사했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이런 시간에 자신을 찾아오다니. 신중하디 신중한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으리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하지만 겉으로 차분함을 유지하는 헬무트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신색도 고요하기만 했다.
마그리트는 평온하게 말했다.
“매일 이 시간에 수련을 한다고 들었어요.”
헬무트의 방에는 수시로 시중인이 드나든다. 외부인이니 감시의 목적도 있으리라.
헬무트는 대개 검을 수련하려고 내려올 땐 시중인에게 말해 두었다.
“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대답해 주겠어요?”
마그리트는 주저하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리노사 대공비가 행적을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조심스레 이곳에 왔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하십시오.”
“아까 말한 표식을, 내게 보여 주겠어요?”
“예.”
마그리트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고, 헬무트는 묻지 않았다. 그는 단지 움직였다.
수련장 한쪽에 놓인 망토로 다가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의 손에서 황금빛의 물체가 끌려 나왔다.
표면이 우그러진 펜던트를 보면서 마그리트의 두 눈동자가 수표면처럼 흔들렸다.
마치 기억의 그물에 뭔가가 걸린 듯이.
“이것입니다.”
마그리트는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를 낚아챘다.
뚜껑이 열리고, 그녀는 그 안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가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탕! 바닥에 떨어진 펜던트가 묵직하게 공기를 울렸다.
마그리트는 이제 전신을 떨고 있었다. 펜던트를 향하던 시선이 위로 들렸다.
온갖 감정이 흘러넘치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헬무트.”
신음처럼 토한 그녀의 두 손이 허공을 향해 뻗었다.
헬무트는 저를 안아오는 어머니를 마주 끌어안았다. 와락 안은 품이 뜨거웠다.
아니, 뜨거운 건 그녀가 아니었다. 배 속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헬무트.”
어머니가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불렀다. 그녀의 돌아온 아이를.
그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번진 어깨가 따스했다.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헬무트는 마치 이 순간을 위하여 살아온 것처럼 느꼈다.
아레아의 경고는 뇌리에서 잊혔고, 헬무트는 자신이 결국 이럴 수밖에 없었음을 깨달았다.
리노사에 오기로 한 순간부터, 아니 어머니를 본 순간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만약 이 순간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치르리라.
그것이 그의 각오이며 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