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56
255
헬무트
255화
끝났다. 모든 것이.
매캐한 마기로 가득한 파헤의 숲의 공기는 그에게 차라리 안온했다.
인간 세상에서 산 지 1년여. 그러나 그보다 더 익숙한 공기였다.
헬무트는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완벽하게 인지했다.
돌아오는 과정은 나가는 과정과 비교할 수 없이 간단했다.
대신관이 펼치는 신성마법은 마기를 가진 자에게는 가히 절대적인 힘이었다.
바로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여긴 어디지.”
파헤의 숲에서 무작위로 어딘가에 떨어졌을 터. 누구의 영역일까. 이제는, 다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헬무트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지독한 감정이 몰려들었다. 그가 간신히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은 쉽사리 놓였다.
절망, 그것이 헬무트를 집어삼켰다.
심장이 울렁거리고, 속이 뒤집혔다. 곧, 격렬한 통증이 밀려 왔다.
근육과 혈관을 일제히 갈아 버리는 듯한 통증!
몸이 뒤로 꺾이고, 저절로 공중에 떴다. 마치 진공 상태인 것처럼.
심장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구멍! 엄청난 인력이었다.
그의 심장이, 아니 어둠의 싹이 물을 흡수하듯 주변의 마기를 미친 듯이 빨아들였다.
파헤의 숲에 가득한 마기가 급속도로 헬무트에게로 밀려들었다.
헬무트의 비스는 회복이 미미한 상태였고, 그 비어 버린 몸을 마기가 넘치도록 가득 채웠다. 죽고 다시 태어나는 듯한 과정.
절망은 어둠의 싹에게 모든 것을 넘겼다. 그 과정을 겪는 사이 의식은 가라앉고, 헬무트의 몸은 처음으로 완벽하게 지배권을 빼앗겼다.
잠시 후, 사방이 고요해졌다. 파헤의 숲 한 구역의 마기가 이토록 흐려진 적이 있을까?
공중에 올라 있던 헬무트는 살포시 바닥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순간, 헬무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크르르르.”
크나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눈빛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은 포악한 본능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파괴하리라.
헬무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엘라가는 언제나처럼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그는 한 해가 넘도록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마음 편하게 게으름을 피울 자유! 늘 그를 견제하던 재수 없는 놈도 죽었고, 육아의 고통에 시달리게 만들었던 녀석도 사라졌다.
그 때문에 좀 허전하긴 했지만, 엘라가는 덜 손이 가는 좋은 대체재를 찾았다.
죽이고 지배하는 마물의 습성과는 달리 다른 누군가를 돌보는 데 취미를 붙인 엘라가였다.
‘편하고 좋구만.’
길게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그의 옆에는 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작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해맑은 얼굴의 소녀는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기색으로 엘라가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심지어 소녀는 거대한 꽃 왕관을 만들어 엘라가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파헤의 숲에서 흔치 않게, 색이 알록달록하면서도 독성을 품지 않은 꽃들이었다.
‘응?’
불현듯 엘라가는 뭔가를 느꼈다. 바닥이 울렸다. 숲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거대한 파동.
저편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꼭 태풍이 불고 있는 것처럼.
[뭐냐, 이 파동은.]엘라가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머리에서 꽃 왕관이 툭 떨어져 내렸다. 소녀가 울상을 지었다.
“꺄아, 엘라가 님?”
[조용히 해. 이럴 때가 아니야. 넌 빨리 저 안에 들어가 있어. 어딜 좀 갔다 와야겠으니.]엘라가는 소녀를 냉큼 꼬리로 낚아채어 근처에 있는 집안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그 안에서 여인 한 명이 창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엘라가 님?”
[내가 올 때까지 집 밖으로 나오지 마라.]“예.”
엘라가는 날듯이 달렸다. 거대한 표범은 놀랍도록 민첩하게 숲 속을 질주했다.
파동이 느껴진 곳은 그의 영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호기심이 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도착한 엘라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응? 아주 초토화로군.’
기막히게 조용했다. 마치 죽음이 지나간 자리처럼. 부서지고 뭉개지다시피 한 나무들과, 토막 난 마물의 시체.
꽤 강한 놈이다.
그리고 저편에, 마기로 넘실거리는 한 인영이 보였다. 놈의 움직임은, 엘라가가 나타난 순간 기막히게 멎었다.
‘인간?’
엘라가는 긴장도 하지 않고 그리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파헤의 숲에서 엘라가를 긴장하게 할 만한 존재는 거의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인간이라면 더더욱.
드리워진 그늘 속에서 놈의 모습이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헬무트?]엘라가의 동공이 커졌다. 엘라가는 어렵지 않게 상대를 알아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제 품 안에서 싸고돌며 기른 놈이다. 좀 커지고 체취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못 알아볼 리 없다.
하지만 반가움을 느낀 것도 잠시, 뭔가 이상했다.
상대는 엘라가를 알아본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살의에 찬 포악한 눈동자로 엘라가를 경계하듯 쳐다볼 뿐이다.
헬무트가 바로 달려들지 않음은, 엘라가를 알아봐서가 아니라 그의 본능이 엘라가가 강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엘라가가 눈을 찡그렸다.
[이 녀석 뭐지? 갑자기 나타나서는.]눈빛이 맛이 간 게,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는다. 몸에서 풀풀 풍기는 마기도 예사롭지 않다. 반 마물화된 상태.
하지만 마물인 엘라가에게 마물화된 헬무트의 상태는 별거 아니었다.
엘라가는 태평하게 꼬리로 바닥을 쳤다.
[뭔 일 있었냐? 아니, 그보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너 이그렐이 바깥으로 잘나갔다고 하던데.]대답은 없었다. 왜 이 녀석이 파헤의 숲에 떡하니 나타났는지부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엘라가는 헬무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정신이 훼까닥 했어도 전처럼 앞발로 좀 굴려보면 알아서 실토하지 않을까.
하지만 헬무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헬무트의 본능은 충동적이었다. 무시무시한 마기를 지닌 표범이 다가오는 것에 위협을 느낀 헬무트는 바로 공격적으로 돌변했다.
여태까지 다른 마물에게 그랬듯이, 적을 찢어발기리라. 그것이 절대적인 명제처럼.
그러나 엘라가는 달려드는 헬무트를 가볍게 꼬리로 쳐냈다. 퍽!
[뭐하는 거냐? 대련하자고?]엘라가는 비뚜름하게 나가떨어진 헬무트를 응시했다.
헬무트의 눈빛에 살의가 비쳤다. 그는 고장 난 것처럼 엘라가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의 전신에서 제법 강력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거 도전인가?’
엘라가는 콧방귀를 끼었다.
엘라가는 한 번도 헬무트한테 져 본 적이 없었다. 미쳐서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날뛰는 놈에겐 더더욱 질 리가 없다.
나호의 핵까지 삼킨 엘라가보다 강한 녀석은, 이 파헤의 숲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퍽, 퍽, 퍼벅! 헬무트의 시도는 번번이 틀어 막혔다.
귀찮아진 엘라가는 헬무트를 쳐서 쓰러트리곤 그 위에 앞발을 올려 올라탔다.
[그 잘난 검인지 뭔지는 어디다 두고 무식하게 맨몸으로 덤벼서 언제 날 이겨 먹겠냐.]엘라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인간의 무기는 그 육신에 있지 않다. 그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엘라가의 마기를 뚫고 그에게 상처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헬무트는 들어먹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제압당한 주제에 밋밋한 이빨로 엘라가의 털을 물어뜯고 발작해 댔다.
“크아아악!”
발작하며 날뛴다고 한들 작디작은 인간이다.
엘라가는 헬무트를 앞발로 짓누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군.’
엘라가는 그대로 헬무트의 마기를 빨아들였다.
마기가 풍요로운 파헤의 숲에서 마물이 광기를 보이는 일은 흔하지 않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 듯 편안한 환경이니까.
어둠의 싹도 마물과 속성이 비슷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자극당했건, 원래라면 오래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헬무트는 인간이니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이것은 마기의 중독 증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면 마기를 빼내 주면 된다.
어둠의 싹은 놀랍도록 유순하게, 저보다 강한 존재인 엘라가의 의도에 복종했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안 것이다.
헬무트의 몸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약간의 비스만 남긴 채.
헬무트는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렸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이 답답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저를 짓누르는 거대한 표범을 올려다봤다.
“엘라……가?”
[그래,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상황이 인지된 순간, 헬무트는 숨이 막혔다.
‘내가 무엇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할 말도 없었다.
엘라가의 질문이 이어졌다.
[밖에서 원하던 걸 찾았냐?]“응.”
[그런데 왜 넌 이 꼴이냐.]헬무트는 엘라가를 노려봤다. 싸늘한 눈빛이었다.
“날 내버려 둬.”
[뭐라는 거야. 도와줬더니. 좋아, 내버려 두지.]삐친 엘라가는 헬무트를 내버려 두고 홱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헬무트는 혼자 남았다. 거기에 쓰러진 채로. 그는 무미건조하게 속으로 읊조렸다.
‘엘라가는 여전하구나.’
아마 저쪽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심장이 텅 빈 것처럼,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헬무트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덧 새카만 어둠에 둘러싸인 하늘을.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둠의 싹에 몸을 맡기고 파헤의 숲을 헤집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위험한 적도 만나지 못했다. 자신을 망치는 일조차도 헬무트에겐 쉽지 않았다.
또다시 엘라가가 그를 구해 주었다.
‘엘라가는 마물일 뿐인데…….’
마물은 혈육보다 더한 애정을 그에게 주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울컥, 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순간 달콤하고, 지독하게 아팠던 기억.
어머니에게서 느껴지던 애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헬무트가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하더라도 버릴 수 있었다.
사랑하더라도 배신할 수 있었다.
아껴도 등 돌릴 수 있었다.
헬무트는 인간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애정을 믿었을 뿐이다. 그가 알았던 이들은 애정을 배신하지 않았으므로.
쓰라리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배움의 고통이 너무도 커서, 헬무트는 다시는 숲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
파헤의 숲에 있을 때의 헬무트는, 가진 게 없었으나 고독하지 않았다.
열망을 품고 달려가는 삶이 고독할 리 없다. 저 위에 별이 보이고, 언젠가 거기에 이를 수 있다면.
고된 훈련에 지쳤을 때조차도 그 열망이 그를 이끌고 채웠다.
그러나 파헤의 숲 밖에 나가서는 어땠나.
헬무트는 많은 것을 얻었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졌던 것조차 잃은 채로.
배신? 아니다. 헬무트가 겪은 것은 상실이었다. 무엇으로도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
아직 눈앞에 어른거리는 빛이 있었다. 달빛의 한 자락 같은 그 빛 속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비친다.
하지만 그 빛조차도 꺼진다면, 그때는.
거대한 공허가 그를 집어삼킨다. 타는 듯한 열기와 함께 느껴지는 것은 심장을 지지는 듯한 고통.
그의 안에서는 뭔가가 무너져 내렸고, 아마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헬무트는 눈을 감싸 쥐었다.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