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58
257
헬무트
257화
1. 바닥으로부터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낭떠러지에서 바닥까지 떨어지고, 그 바닥에서 헬무트의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진 상태로 위를 올려다보면 보이는 것은 오로지 절벽뿐. 그 위에 하늘이 있을 테지만, 그 하늘은 잿빛이었다. 잿빛 하늘을 향해 누군들 기어오르고 싶을까?
절망은 무기력을 부른다. 헬무트는 깊은 무기력에 잠겨 있었다.
장작이 사라진 불은 더 이상 타오를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재뿐인 것 같았다.
생생하고 강렬했던 그의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무표정한 얼굴에는 허무감만이 어렸다.
감정을 쏟아내고 나자 비어 버린 듯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도 증오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기로 한 건지도 모르지.’
공허가 삶을 좀먹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을 한다고 한들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숨 쉬고 살아있는 대로 살아갈 뿐인 마물.
그런 삶을 원치 않았기에, 인간이고 싶어서 이곳을 떠났건만 결국 제자리였다.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폐부를 깊숙이 메우는 공허감에 잠겨서 헬무트가 택한 것은 침묵과 수면.
그는 자리에 드러누운 채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맥없이 하루를 지나 보냈다.
그 하루는,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전에 파헤의 숲에서 살았던 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삶.
이전의 헬무트는 단 하루도 허비하지 않았건만 그때와 지금의 헬무트는 달랐다.
헬무트는 성장했으나, 그를 성장하게 만들었던 동력은 사라졌으므로.
헬무트는 몸에 밴 수련도 때려치우고 시체처럼 지냈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파헤의 숲에 풍성한 마기는 그의 몸을 빠르게 회복시켰고, 어둠의 싹은 서서히 기세를 되찾았다.
이미 한 번 호되게 당해 봤기에 이전처럼은 아니나 헬무트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만큼.
육신은 회복되었으나 마음의 회복은 더뎠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 마음이다. 그러니 헬무트는 치명상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헬무트의 무기력증은 누군가에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인생 최초로, 갓난아기 때보다도 더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헬무트를 하얀 표범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뭐, 돌아온 걸 보고 반갑기는 했지.’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엘라가의 눈에 헬무트의 상태는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갓난아기 때도 잘 울지 않던 놈이 갑자기 질질 짜는 꼴이 희한하기에 내버려 두었는데, 갈수록 가관이다.
허약한 인간 주제에 며칠째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는다.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던 과거는 옛말이고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꼴이 어쩐지 보기 싫었다. 약간 초조감이 일었다.
‘굶어 죽으면 안 되는데.’
어둠의 싹을 가지고 있든 강해졌든, 어쨌든 엘라가 눈에 헬무트는 형편없이 약하고 어린 인간이었다.
그리고 헬무트가 죽지 않게 보살피는 것은 엘라가에게 익숙한 일이다.
그는 여전히 뭔가를 돌보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 습관 때문에 다른 인간들을 돌볼 만큼.
지긋지긋하게도 엘라가는 예전의 습관대로 헬무트에게 먹을 걸 들이밀며 윽박질렀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테냐? 이거나 먹어!]엘라가가 헬무트에게 툭 내민 것은 고기였다. 이제 그의 사냥감을 먹기 좋게 다듬을 요리사도 있었기에 양념까지 되어 있는 육포.
그러나 헬무트는 거기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엘라가는 다시 윽박질렀다.
[사냥하지 않는 놈은 먹을 자격도 없지만, 돌아온 기념으로 특별히 주는 거다. 어서 먹어!]“필요 없어.”
짤막한 거절이 떨어지자, 흉포한 으르렁거림이 거대한 흰 표범으로부터 새어 나왔다.
[크르르르르.]엘라가는 헬무트가 자신의 성의를 거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목구멍에 쑤셔 박아 주랴?]엘라가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일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진심.
파헤의 숲은 약육강식의 세계. 약한 놈은 강한 놈의 말에 따라야 한다.
헬무트는 묘한 데서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짜증 나.’
바깥세상에서 헬무트는 자신보다 강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 쪽수에 밀렸을 뿐이지.
새삼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이 상황이 헬무트의 무뎌진 감각에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귀찮게.’
그러나 어쩌겠는가. 엘라가는 강했고, 자신의 말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헬무트에겐 검이 없었다.
헬무트는 억지로 육포를 씹어 삼켰다.
엘라가는 헬무트가 육포를 먹는 것을 어미 새라고 하기에는 흉흉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에야 떠나갔다.
엘라가는 종일 붙어 앉아서 헬무트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 일은 날마다 반복되었다. 물론, 길게는 아니었다.
엘라가는 배려심이나 이해심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마물이었고, 헬무트가 왜 저런 식으로 굴건 그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엘라가의 눈에 헬무트가 게으름 피우는 것으로 보이고, 그게 눈꼴사납다는 게 중요할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엘라가는 소리쳤다.
[넌 언제까지 내가 잡아다 주는 걸 먹고살 테냐! 모자란 녀석!]하지만 헬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구박 속에서 헬무트는 귀를 막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결국 엘라가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바깥에서 뭔 일이 있었는데? 네 엄마가 저주받은 놈은 필요 없다며 널 또 내버리기라도 하든?]그 질문에 헬무트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제야 엘라가는 알아챘다.
[그랬군, 그런 거였어. 어쩐지 상태가 이상하더라니.]기껏 인간 세상으로 보내줬더니, 배신당한 채 돌아왔다. 엘라가는 잠시 후 툭 하니 한 마디 내뱉었다.
[멍청한 놈.]그 말은 위로의 의미가 절대로 아닌, 순전히 비난이었다. 엘라가에게는 당하는 놈이 잘못인 것이다. 물론 제가 당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렇게 쓸모없이 살 테냐. 죽으려고?]꼬리로 툭툭 치자 헬무트는 메마르게 내뱉었다.
“날 좀 내버려 둬.”
최초로 어떤 감정이 그의 안면에서 묻어나왔다. 그건 짜증이었다. 그러나 그 짜증 위로 다시 허무감이 덮였다.
자극에는 반응하나 그 반응은 금세 묻혔다.
엘라가는 굴하지 않고 물었다.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 그럴 건데?]“…….”
헬무트는 기약 없는 답변을 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엘라가는 그의 침묵에서 희망을 읽었다.
헬무트가 완전히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삶의 의지가 꺼진 것은 아니로군.’
욕망은 인간을 살아가게 한다. 이제 헬무트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인간치고는 강한 놈이니 언젠가는 다시 일어서겠지.’
엘라가는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헬무트는 이 파헤의 숲에서 살아남아 바깥세상에 다다른 최초의 인간 아닌가?
하지만 그 ‘언젠가는’이 도래할 때까지 엘라가는 마냥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엘라가는 공감 능력 떨어지는 마물이었고, 또한 헬무트가 부모로부터 어제 버림받았어도 오늘 괄시하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그런 그치고는 많이 참은 것이다.
‘내가 도와줘야겠군.’
두들겨 패서라도 말을 듣게 만드는 것이 엘라가다웠다.
하지만 그도 헬무트에게는 꽤 물렀다.
엘라가는 좀 더 온건한 방식으로, 헬무트를 도와주기로 했다.
짐승은 먹고 마시고 사냥하며 바쁜 삶을 산다. 헬무트도 응당 그런 삶을 살아야 했다.
특히나 엘라가는 부지런한 마물이었다. 헬무트가 떠나서 한가해지자 새로운 것들을 돌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도움이 되겠군.’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엘라가는 바로 그녀를 찾아갔다.
[수잔.]집 밖에서 부르자 여인 한 명이 창문을 열고 얼굴을 보였다.
“네, 엘라가 님!”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는 여인은 단정하게 묶은 고동색 머리카락에 예쁘장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20대 후반의 매력적인 인간 여자. 전혀 꾸미고 가꿀 일 없는 파헤의 숲에서도 그렇게 보일 정도면, 바깥세상에서도 꽤 미인으로 여겨졌으리라.
수잔은 귀족이었다. 귀족이면 으레 그렇듯이 세력다툼에 휘말린 그녀는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함께 파헤의 숲에 던져졌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검이건 마법이건 그 어떤 힘도 없는 인간 여자가 파헤의 숲에서 살아남는 것은 요원한 일인데, 에루고를 만나서 살아남았으니까.
그리고 더 운이 좋은 점은, 그녀가 에루고의 손아귀에 놓인 지 얼마 안 돼서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그녀가 있는 인간 농장의 주인도.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나호가 죽자마자 놈의 영역 근처에 도사리고 있던 마물들은 연약한 인간들을 향해 탐욕스럽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공세와는 차원이 달랐다.
부상을 입은 에루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호가 깨어났기에 더 이상 마물이 설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연구실 밖으로 나선 그는 바로 예리한 이빨에 산채로 물려갔다.
다른 인간들도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나호와 에루고 없이 그들은 무력했고, 습격한 마물들은 인간들이 숨죽이고 있던 집 벽을 부술 만큼 강력했다.
엘라가가 나호의 핵을 흡수하고 바로 인간 농장을 찾았을 때, 모든 일은 거의 끝나 있었다.
그 많던 인간들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탐욕스러운 마물들에게 남김없이 삼켜졌다.
수잔은 딸을 꼭 껴안고 에루고의 연구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운 좋게 문이 열린 에루고의 연구실로 피신한 그녀는 거기서 소량의 물과 식량만으로 며칠을 버텨 냈다.
가장 견고한 은신처인 에루고의 연구실은 마물들의 공세에도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생존자는 그들뿐이었다. 수잔과 세라가 살아남은 것은, 그녀가 딸과 함께 도망치는 사이 다른 이들이 제물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엘라가는 냄새로 그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들은 연구실 밖에서 엘라가가 말을 걸자 기겁했다.
[어이, 거기 인간들. 상태는 어떻지?]인간과 소통이 될 만큼 지성을 갖춘 마물. 흉악한 나호와는 달리 하얀 털의 아름다운 표범인 엘라가에게 그들은 금세 마음을 열었다.
사실 수잔과 세라는 엘라가의 자비에 기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냥 연구실에서 버티고 있어 봐야 식량이 떨어지면 어차피 끝이다.
“저, 저희는 괜찮아요.”
[살아남은 건 너희 둘뿐이로군.]엘라가는 혀를 찼다. 자신이 돌봐 주지 않는다면 이 둘은 다른 인간들이 그랬듯이 마물들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엘라가는 고민할 것 없이 이 두 인간을 자신의 그늘로 받아들였다.
왠지 엘라가에겐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선택이었다.
헬무트를 지키고 길러냈듯이, 엘라가는 그녀들에게도 그리할 것이다. 그건 엘라가의 취미 생활이자 습관이었으니까.
‘수컷을 길러 봤는데 이번엔 암컷인가.’
그리고 후자 쪽이 확실히 더 기르는 맛이 있었다.
헬무트는 귀염성 없고 건방진 녀석이었는데 반해 수잔과 세라는 귀엽고 사근사근했으니까.
무엇보다 이 둘은 엘라가를 신뢰하고 따랐다.
사냥감을 잡아 오면 바로 집 밖으로 뛰쳐나와 그를 맞이하는 수잔과 세라를 보면서 엘라가는 마치 가장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그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인간에게 입은 상처는 인간으로 낫게 하면 되지.’
엘라가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수잔을 향해 말했다.
[네가 할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