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62
261
헬무트
261화
2. 네 명의 길.
새해가 시작될 무렵, 한차례 분주함이 휩쓸고 지나간 그레타 아카데미는 아직도 분위기가 산란했다.
한해가 끝나면 아카데미를 떠나는 이와 찾는 이가 교차하기 마련이다.
오늘은 떠날 이의 차례. 졸업식을 마치고 하나둘 제각기 길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여기 떠나는 이가 있었다.
하얀 로브. 마법사의 표식 같은 옷을 입고 머리까지 후드를 뒤집어쓴 호리호리한 인영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스쳐 지났다. 가벼운 기척과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
하얀 로브의 인영은 소수의 인원에게 허락된 출입증으로 어렵지 않게 아카데미 심처에 발을 들여놓았다.
똑똑. 작은 소리와 함께 이내 문이 열리고,
“학장님.”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는 동요하지 않고 인사말을 건넸다.
“졸업을 축하한다, 아레아. 이제는 네 진정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겠구나.”
“네.”
심장에 찌르르한 전율이 흐른다. 기다렸던 순간은 오히려 무겁게 찾아왔다.
앞으로 갈 길이 결코 녹록하지 않기에.
아레아는 후드를 걷어 내렸다. 서릿빛 머리카락 사이로 자수정같이 선명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섬세하게 세공된 새하얀 얼굴은 빼놓을 곳 없이 아름다웠다. 결함 없는 미의 구현 같은 모습.
마법으로도 남자인 척하기에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이제 가장할 필요가 없었기에, 마법을 거둔 채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것은, 그녀의 본모습을 알고 있는 상대.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학장은 여운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반강제로 그녀, 아레아를 받아 들인지 6년.
무시무시한 재능과 독기를 가진 소녀는 이제 한 명의 마법사로서 완전히 우뚝 서 있었다.
아마 그녀는 대마법사란 이름에 가장 가까우리라.
그리고 그 이름을 차지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천재적인 재능에 노력이 결합되면 이런 모습이로구나. 아마 향후 수백 년간 이보다 더 뛰어난 졸업생은 그레타 아카데미에 나타나지 않겠지.’
그런 아레아가 이 자리에 있도록 일조한 것이 학장 자신이었다. 학장은 새삼 감회에 잠겼다.
아무리 마법사에게 자유로운 사고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남의 인생을 휘두르고 법과 상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마녀 하이케. 그녀와 생김새가 너무도 닮아, 학장은 아레아에게 호의적일 수 없었다.
후원자라고는 해도 항상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딱딱하고 원칙적인 태도를 고수해 왔던 학장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경계도 물러졌다. 성격은 어떠할지 몰라도, 아레아는 훌륭한 마법사였다. 우수한 학생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아카데미에 네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다.”
학장으로서도 고심 끝에 꺼낸 소리였다.
물론, 아레아라는 천재적인 마법사는 그레타라는 작은 그릇에 담기에는 너무도 과분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전과 척을 질 위험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아레아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지요. 이제는 좀 아카데미를 떠나고 싶군요. 6년이나 이곳에 있었어요.”
그레타 아카데미는 마법학적 지식의 보고. 또한 몸을 숨기며 마법을 학습하기엔 최적의 장소.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다. 이제는 계획한 것을 실행에 옮길 때다.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일, 위험부담이 큰일이기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학장의 표정에 근심이 서렸다.
“네 조모와 같은 삶을 살기는 바라지 않았건만, 다른 의미로 그렇게 하고 있구나. 네가 하는 연구에 대해서 들었다. 파헤의 숲으로 가려고 하는 거냐?”
불길에 뛰어드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삶.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가. 아레아의 재능은 하이케를 능가했으나, 하이케는 대마법사가 된 이후에야 신전과 척을 졌다.
‘하이케의 손녀. 또한 저 아이의 성향상, 멀든 빠르든 언젠가는 신전의 공적으로 선포될 테지만.’
고작 스물도 안 된 나이. 그렇게 되기는 이르지 않은가. 신분을 세탁하는 것도, 아직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데.
아레아는 명쾌히 답했다.
“알고 계실 것 같았어요.”
학장의 눈은 아카데미 구석구석에 미친다. 아레아 역시도, 자신이 학장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모든 것을 다 혼자 할 수는 없다.
누구도 발들이지 못한 영역에 손을 대려면 다른 사람의 성과나 조력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아레아는 천천히, 마법 학부 교수 중 자신의 연구에 협조해 줄 이를 찾아 접근했고 성과를 얻었다.
물론 그 움직임은 모두 학장에게 읽혔다.
학장은 타이르듯이 말했다.
“파헤의 숲은 금지된 영역이다. 어떤 마법사도 그 결계를 뚫어 낸 적이 없지. 그리고 그 결계 안쪽은 마물로 가득하다. 신전에서 네 연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대 마물전에 마법사는 그리 유리한 전투 능력을 가지지 못했지. 아무리 너라도 죽을 수 있어.”
“그레타 아카데미에서는 위험하다고 해서 연구를 포기하는 건 마법사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가르치지 않던가요.”
“무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무모하지 않기 위해서 준비했지요.”
아레아의 눈빛에 비친 것은 자신감이었다. 그녀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한 학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는 여기, 돌봐 주신 것에 대해서 인사하러 왔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그녀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 못내 학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를.”
이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
‘드디어.’
학장실을 나서면서 아레아는 호흡을 내쉬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성공률이 어떤지 재어 볼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가야 했다. 그동안은 실패율을 줄이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래, 위험한 계획이지.’
홀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계획. 그래서 그 계획에 필요한 이들이 있었다.
아레아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음을 옮겼다. 팔찌를 끼자 그녀의 모습은 다시 위장을 뒤집어썼다. 걸음을 재촉하며 아레아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그들이 함께할까.’
몇 년 전 아레아는 자신의 계획을 그들과 공유했고, 그동안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
그동안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있고, 잃을 것이 있는 이들이니까.
하물며 짧은 시간 쌓은 우정 따위에 목숨을 걸려 할까.
아레아는 회의했으나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그녀도 그 짧은 시간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에 잠긴 사이 약속된 장소에 가까워졌다. 아카데미 한쪽의 한적한 공터.
“여어, 아레아!”
저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로브를 입은 온화한 얼굴의 청년. 누구에게나 호감을 이끌어 낼 법한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앳되어 보이는 그의 곁에는 머리 하나만큼 더 키가 큰 금발의 훤칠한 청년이 팔짱을 낀 채 자리하고 있었다. 삐딱하게 이쪽을 꼬나보면서.
“늦었잖아, 3분!”
아레아는 그의 트집에 응하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었다.
“둘 다 왔네.”
‘내 생각만큼 멍청이들이로군.’
학장의 생각과는 달리 무모한 건 자신이 아니라 이들 쪽이었다.
아레아는 자신이 정확히 뭘 하려는지 알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만, 이들은 그저 아레아의 계획에 목숨을 거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그들은 아레아의 계획에 편승함으로써 얻을 만한 이익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목숨을 잃을 위험성만 안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꺼이 여기에 왔다.
‘나를 대체 어떻게 믿고.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지…….’
증거를 보여 주긴 했으나 아레아의 설명은 불친절했고, 모든 것을 말해 주지도 않았으나 그들은 기꺼이 아레아를 따를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약 4년 전.
그러나 그 4년 동안 그들의 결심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 감동적인 광경을 아레아는 조금 어이없는 기분으로 바라봤다.
그들을 끌어들인 건 간단한 이유였다.
‘개똥도 쓰고자 하면 쓸데가 있다고 하니까.’
냉소적인 미소가 그녀의 안면을 스쳤다.
검술 학부 수석 졸업자, 아스카. 그리고 마법 학부 차석 졸업자 시안. 6년 내내 마법 학부 수석이었던 아레아는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제는 완연한 성인으로 자라난 그들은, 신체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실력 또한 갖추었다.
그간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실력을 갈고닦는 데 힘을 쏟은 그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졸업 후 이 계획을 위해서였다.
4년 전 그날 아레아가 ‘너희들이 할 일은, 강해지는 거야.’라고 말했으니까. 어쩐지 리더처럼 되어 버린 아레아였다.
‘내 예상보다 더 쓸 만해졌어.’
이만하면 파헤의 숲에서 도움이 될 만한 전력이다.
“뭐, 설마 너 우리가 안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냐?”
아레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시안이 버럭 성질을 내려는 아스카를 제치고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봐.”
“그 전에, 한사람 더 올 사람이 있어.”
일부러 좀 늦게 불렀지만, 성격상 미리 와 있을 거였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마침 그 사람이 도착한 터였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아스카와 시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너, 너!”
“왜 쟤가 여기 있어?”
거기에 나타난 것은, 차분하고 단정한 생김새가 도드라지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리노사 대공녀이자 헬무트의 여동생, 그리고 검술 학부 5학년 수석 샤를로트.
이제는 성인의 태를 갖춰 가는 그녀는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해 보였다.
“이렇게 뵙는군요, 선배님들.”
“넌 아카데미 졸업하지도 않았잖아?”
“아니, 아스카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 전에 저 애는…….”
시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곧 그의 눈빛에 떠오른 것은 분노였다.
“리노사의 사람이잖아! 어떻게 저 애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어! 말이 돼?”
그건 시안이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격렬함이었다. 샤를로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찾은 게 아니야 그녀가 먼저 나를 찾아왔어.”
아스카와 시안의 시선이 샤를로트에게 꽂혔다. 시안의 눈빛은 불타고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아스카의 눈빛은 차분함에 가까웠다.
두 사람의 성격을 생각하자면 완벽히 반대였다.
아레아는 설명을 시작했다. 4년여 전, 헬무트가 라토나에서 실종된 방학 이후였다.
아레아는 방학 중에 라토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파악하고 아스카와 시안에게 접촉하려던 차였다.
부쩍 수척해진 샤를로트가 바로 아레아에게 찾아와 대화를 청했다.
“헬무트 선배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혈육을 또다시 사지로 몰아넣은 뻔뻔스러운 리노사의 여식.
그 순간 아레아의 얼음 같은 심장에도 균열이 일었다. 분노가 치솟은 아레아는 샤를로트에게 공격 마법을 행사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아레아는 가까스로 냉정하게 마음을 추슬렀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는 건지, 일단 들어나 보지.’
아직은 자신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기에.
샤를로트는 아레아에게 순순히 라토나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레아는 샤를로트가 자신을 떠볼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