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71
270
헬무트
270화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엘라가?”
영역을 둘러보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엘라가에게 세라가 바로 말을 걸었다.
엘라가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흘낏 그녀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 있기는. 별일 아니다.]“파헤의 숲에 무슨 변동이 생긴 건 아닌가?”
헬무트가 꼬집어 묻자 엘라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내 영역과는 상관없는 일이야.]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무슨 일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헬무트가 꼬집었다.
“중앙 권역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로군.”
엘라가는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바깥에서 누군가 신성 결계를 통과해서 들어왔어. 물론 인간들이겠지.]세 명 모두가 움찔했다. 오랜만의 추방자들이었다. 근 몇 년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파헤의 숲은 마치 하나의 생태계 같았다. 그렇기에 외부로부터 누군가가 들어오는 건 마치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변화다.
유달리 예민한 감각을 가진 놈들, 특히나 권역의 지배자들은 외부로부터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느낀다.
나호의 경우에는 은밀히 부하들을 보내서 다른 영역에 떨어진 인간까지도 수집해 왔지만, 다른 권역 지배자들은 대체로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제 영역을 살피지는 않았다.
엘라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번 파동은 좀 이상하긴 했는데. 아무튼……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수잔이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엘라가 님, 그렇다면 그 인간들은…….”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예정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말해 두겠는데, 나도 내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엘라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말했다.
마물이 이타주의자일 수는 없다. 천성부터 그렇지가 못하다.
엘라가는 헬무트의 생각과는 달리, 별로 제 수중의 인간들이 새끼쳐서 수를 불리고 마을을 형성하는 그런 농장적인 일에 관심이 없었다.
인간 셋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영역도 아니고 멀찍이 어딘가에 떨어져서 죽어갈 인간들까지 그가 돌아볼 필요 있을까.
엘라가는 파헤의 숲 중앙 권역을 지배한다.
이미 그의 영역은 충분하도록 컸으므로 나호의 영역까지 그의 영역에 편입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인간 농장을 제외한 나호의 영역은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았다.
바깥에서 들어온 이들은 파헤의 숲 어딘가에 떨어지지만, 그게 결계로부터 가장 먼 중앙 권역인 경우는 드물었다.
엘라가에게 있어서 헬무트를 주운 건 정말로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다.
수잔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 가여운 이들이로군요. 적어도 가는 길에 고통이 없기를.”
얼굴과는 달리 이미 포기한 눈빛이었다. 그녀도 귀족 여인. 잠깐 생각 끝에 마음을 달랬을 뿐 굳이 그들을 구하러 가자고 나서지는 않았다.
파헤의 숲에 떨어지는 이들이 꼭 선량하다는 법은 없으니까.
수잔처럼 불운하게 반역의 바람에 휘둘린 이도 있지만, 에루고 같은 사형당해 마땅한 범죄자들도 파헤의 숲으로 추방당했다.
그렇게 사악한 짓을 벌여 추방당하는 자들은 과반수가 넘었다.
괜히 알량한 동정심으로 그들을 구해서 지금의 평온한 생활을 해칠 필요는 없다. 그녀에겐 어린 딸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어린 딸의 생각은 달랐다. 세라가 화가 난 표정으로 외쳤다.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요! 엘라가도 엄마도 실망이에요!”
엘라가가 콧방귀를 끼었다.
[무슨 실망이란 거야. 난 마물이거든? 마물이 인간 구하는 거 봤어?]“세라……. 어쩔 수 없잖니. 파헤의 숲에 떨어지는 인간들을 모두 엘라가 님이 데려와서 보호할 수는 없잖니.”
“하지만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봐야 알잖아요!”
“그들이 꼭 구해야 할 사람은 아닐 수도 있어.”
“그들 중에 나 같은 어린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래, 친구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냐? 난 시끄러운 어린애는 너 한 명이면 충분하다.]애교가 많은 건 많은 거고, 세라는 때로 귀찮도록 시끄럽기도 했다.
그건 헬무트 어린 시절과 똑 닮았다. 헬무트도 수시로 질문을 해대며 그를 귀찮게 했으니까.
그래도 엄마인 수잔이 함께라서 받아줄 상대가 있으니 다행이었다.
세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바보 표범! 나빴어!”
[거참, 내 영역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니까? 넌 인간들 개념으로…… 그래, 저 먼 옆 나라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구하겠다고 할 거냐?]“그, 그건 아니지만.”
[물론 나는 다른 놈 영역에 떨어진 인간도 구할 수 있지. 하지만 그럼 짐이 더 늘잖아. 난 3명으로도 충분하다고! 내 영역이 인간 냄새로 뒤덮이는 건 사양이란 말이다.]헬무트가 그때 태연스레 나섰다.
“짐을 줄이는 방법이 있어.”
모두의 이목이 헬무트에게 집중되었다. 세라는 헬무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마침 할 말도 있었겠다, 기회를 볼 것 없이 헬무트는 자연스럽게 권유했다.
“세라와 수잔을 내보내면 되잖아.”
아주 간단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곧 세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릴 영역 밖으로 쫓아내겠다고요?”
“우리를 내보낸다고요? 그건, 파헤의 숲 밖으로 내보낸단 뜻인가요?”
수잔이 재차 묻자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라가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와, 이렇게 헬무트가 말을 많이 하는 거 처음 봐!”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수잔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엘라가 님이 우리 몸에 밴 마기를 빼주면 우리는 신성 결계를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이죠? 세라는 물론이고, 나도 힘들지만 통과할 수는 있을 거고.”
“예.”
“그럼 헬무트는요? 헬무트는 가지 않을 건가요?”
“저는 그 방법으론 못 나갑니다.”
“어째서죠?”
헬무트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간단히 답했다.
“어둠의 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당신들에겐 그게 없고요.”
단호한 대답에 수잔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헬무트는 그게 든든한 자신과 함께 나가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숲을 나가지 못하는 그의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껴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길…… 나갈 수 있다고? 인간 세상으로?”
사람들을 구하러 가자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세라는 어느덧 헬무트의 말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급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세라가 좀 더 실력을 쌓고 성장하고 나서 나가도 됩니다. 마을을 뒤져보면 나가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가면…….”
수잔이 고개를 저었다. 한층 밝아진 기색이었다.
“귀족 가문은 은행에 비밀 계좌를 개설해 놓지요. 거기에 우리 두 사람이 부족함 없이 지낼 정도는 있을 거예요.”
“그럼 문제없군요.”
헬무트는 이제 쓸 일 없어진 자신의 재산을 떠올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다리언의 재산은 루크 예거에게 다 주는 쪽이 나았을 텐데.’
한때 재산을 모으는 데 관심이 있었던 그답지 않게, 헬무트는 마음이 넉넉해졌다. 하지만 어차피 루크 예거는 팔마 기사단장이 되었을 터. 부와 명예가 따르는 자리에 올라 있을 테니 부족함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이제 헬무트의 재산은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양도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르거니와 세라나 수잔에게 양도한답시고 괜히 엮이지 않는 쪽이 좋다.
혹시나 꼬리가 밟히면 리노사를 적으로 돌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곳에선 워낙 가진 게 없이 살다 보니 떠나려고 해도 딱히 준비할 건 없겠군요.”
수잔은 당장에라도 떠날 수 있다면 떠나려는 듯이 말했다.
엘라가의 그늘에 있었던 탓에 딱히 힘들게 살진 않았지만, 파헤의 숲의 환경 자체가 인간에게는 적대적이었다.
특히나 아무 힘이 없는 그녀에겐 더욱 가혹한 환경.
마기로 가득한 공기는 숨이 막혔고, 하늘은 늘 우중충했다. 먹을 것을 먹고 입힐 것을 만들고, 단순한 노동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대화를 나눌 상대라고는 어린 딸 세라뿐이었다.
“엘라가가 마기를 빼주고 신성 결계 근처까지 데려다주면 충분할 겁니다.”
그때 엘라가의 불만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왜 그래야 해? 마치 내가 당연히 허락할 것처럼 말한다?]세라가 검술을 배우는 걸 보면서 언젠가 그들이 파헤의 숲을 나갈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예상외로 반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정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마물의 소유욕? 어느 것이든 그리 대단한 반발은 아닐 터.
“짐이라면서. 돌보기 귀찮다고 평소에 말했잖아.”
헬무트는 차분히 지적했다. 뜨끔한 기색을 보인 엘라가가 투덜거렸다.
[그럼 다 커서 귀여운 맛도 없고 징그러운 너와 둘이서 이 파헤의 숲에서 지내자는 건가? 난 싫은데.]“원한다면 나도 다른 곳으로 떠나지.”
[누가 그러래?]수잔이 결심한 듯이 말했다.
“저, 엘라가 님. 저는 괜찮으니 세라를 보내주세요. 저 아이는 인간 세상에서 얼마 살아보지도 못했는걸요. 저야 나가도 세라한테 짐만 될 거예요.”
세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난 엄마 없이 안 나갈 거야!”
왠지 혼란한 분위기가 되었다. 엘라가가 나쁜 놈이 되는 분위기이기도 했지만, 마물인 엘라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태연한 표정의 그를 향해 헬무트가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
“엘라가, 쓸데없이 고집부리지 말고―.”
[고집 아니거든? 생각해 봐. 파헤의 숲에서 나갈 때 넌 세라보다 강했지?]엘라가는 아마 그럴 거라는 듯이 말했다.
세라와 헬무트의 실력 차이가 그의 관점에서는 도토리 키재기라서 구분할 수 없는 듯이.
왠지 모르게 거슬리는 기분이 든, 헬무트는 힘주어 대답했다.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그래, 그리고 넌 인간 세상에서 더 강해졌지. 안 그래? 네가 인간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였지?]“단순히 1대 1로 맞붙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지.”
다리언과 같은 강자는 극히 드물고, 또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쨌든 헬무트는 그런 자를 만나 본 적이 없었으니 그건 사실이다.
엘라가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보기엔 여전히 헬무트는 약하고 어린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실제로 엘라가는 헬무트가 미쳐 날뛸 때도 어렵지 않게 제압했다.
아무리 인간이 약하다지만, 헬무트가 그 정도나 되던가?
엘라가는 사소한 의구심을 접고 호응했다.
[그래, 네가 그 정도라고 치자. 하지만 그런 너조차도 인간 세상에서 호되게 당하고 이 파헤의 숲으로 쫓겨났잖아?]“그건, 내가…… 배신을 당해서.”
[그래, 배신을 당했든 어쨌든 말이지. 나가고 싶다고 해서 잘되라고 보내줬는데, 너도 그런 꼴이 되어서 돌아왔잖냐. 그걸 보고도 내가 또 보내주고 싶겠냐. 안 그래?]잠시, 할 말을 잃게 하는 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