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73
272
헬무트
272화
“이그렐 님.”
[왜, 은발 인간.]이그렐이 바닥에 느긋하게 주저앉은 채 거만하게 아레아를 꼬나보았다.
막 빗질이 끝난 그의 깃털은 얄밉도록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하도 자주 손질하다 보니 이젠 네 명 모두가 깃털 손질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이그렐 전용 하인 수준이다.
샤를로트나 시안의 표정도 좋지 않았지만, 아스카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이대로는 언제 중앙 권역에 도착할지 모릅니다.”
[뭐 어때, 그 사이에 헬무트란 녀석이 죽지는 않을 텐데? 느긋하게 생각하라고.]자신이 일정을 지체시키는 주제에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말투였다.
아레아는 차가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제안? 좋아, 말해 보려무나.]“파헤의 숲의 하늘을 지배하는 이그렐 님이 이렇게 불편한 방법으로 저희와 함께하시는 것은 저희가 이그렐 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말했다시피 인간을 내 등에 태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야. 분명히 말하지만, 내 발톱에 매달려 가는 것도 안 돼. 이 이그렐 님이 인간에게 탈것으로 이용당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지.]이그렐은 거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레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레아는 차분히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그렐 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기만 하다면, 이렇게 더딘 속도로 가지는 않을 거라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어떻게?]이그렐은 의심쩍은 눈으로 아레아를 쳐다봤다.
‘인간 주제에 어떻게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다는 말이지?’
“이그렐 님과 속도를 맞출 방법이 있습니다. 함께 날아가면 되지요.”
비행 마법은 아니었다. //그건 마력의 소모가 심한 마법인 데다가, 마법사도 둘뿐이다.
아레아에게는 비장의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적군은 아니더라도 아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그렐 앞에서 그 방법을 드러내기가 꺼려졌다.
줄곧 망설이고 있었건만, 냉철한 아레아도 파헤의 숲 안에 들어온 이상 조바심이 일었다.
헬무트가 저 중앙 어딘가에 있는데,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이그렐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차피 쓸 수 없는 방법이니.’
파헤의 숲 상공을 날아가는 건, 다시 말해 수많은 마물의 시야에 적나라하게 노출된다는 뜻.
비행형 마물이 이그렐만은 아닐 테니, 마물들의 공격 범위가 꼭 지상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이그렐과 함께인 그들을 감히 공격할 마물은 없을 테니 안전하게 날아갈 수 있다.
[너희들이 어떻게 난다는 거야? 마법으로?]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왜 진작 꺼내지 않았느냐고 이그렐은 묻지 않았다. 아레아의 숨겨 둔 한 수라는 걸 눈치챈 터였다.
아레아는 말없이 허공을 향해 손을 펼쳤다.
파헤의 숲에 가득한 마기는 마법의 구현을 방해한다.
이곳에서는 대마법사조차 자유롭게 마법을 행사하기 힘든데, 그녀의 능력은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많은 마력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아레아의 손에서 피어오른 새하얀 마력이 빛을 발했다.
지잉!
허공에 둥근 원이 펼쳐졌다.
아주 작은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순식간에 거대하게 벌어지는 입구.
아레아는 작게 주문을 읊조렸다.
“빛의 문.”
던전 일부에 해당되는 아공간을 불러들였다.
‘역시 파헤의 숲에서는 아공간과의 교접에 제약이 있어. 던전을 완전히 여는 건 안 되지만, 그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정도는 가능하지.’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는 던전과 같은 아공간은 기본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만 열 수 있다. 그 자체도 고난이도 마법.
파헤의 숲처럼 짓누를 듯한 마기로 가득한 곳에서 던전으로의 진입은 대마법사라도 불가능하다.
이그렐이 신기한 눈빛으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감상했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남쪽 권역의 지배자라도 제대로 된 마법을 보는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마법인가? 공간을 여는 거로군! 너 제법 실력 있는 마법사로구나!]그리고 하얀 빛으로 가득한 그 입구에서 거대한 물체가 튀어나왔다.
쿵!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땅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떨어진 그것은 이그렐의 몸 크기의 반이나 될 정도로 거대했다.
금속성의 황금빛을 띤 그 물체는 바위처럼 보였다. 마법진이 빼곡하게 새겨진 거대한 바위.
그러나 곳곳에 길게 금이 가 있어, 조각조각 분리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공간을 닫자 아레아의 미간에 땀이 한줄기가 배어 나왔다.
순식간에 많은 양의 마력을 소모했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져 마력석을 꺼내어 움켜쥐었다.
급속도로 마력이 빨려 나간 마력석이 곧 평범한 돌덩이가 되어 손안에서 부스러졌다.
그때 불쑥 시안이 중얼거렸다.
“골렘인가?”
아스카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냥 바위처럼 보이는데? 어딜 봐서 골렘이야.”
시안은 확신하는 조로 말했다.
“저 마법진, 틀림없이 골렘이야. 그러고 보니 대마법사 람피오네는 골렘 쪽에 조예가 깊었어. 하지만 저런 형태의 골렘은 처음 보는걸. 골렘은 원래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지기 마련이거든. 근데 저건 형태가 없잖아. 그렇다는 건, 설마.”
아레아는 설명하는 대신 이그렐 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모방.”
그르릉.
각인된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위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금이 간 부분이 벌어져 분리되어 재조합됐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형태를 그려 냈다.
모방의 대상은 명확했다.
이그렐.
기이이잉!
두 갈래로 갈린 몸체가 허공에서 매끄럽게 뻗어 나가 날개를 이뤘다.
중앙에 상대적으로 작은 몸통이 이루어지고 그 위에 형성되는 머리와 날카로운 부리. 아래로는 길게 뻗은 다리와 발톱.
곧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금속성의 금빛을 띤 거대한 새였다.
이그렐보다는 약간 작은 크기의 새 형태의 골렘.
깃털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퍼덕이는 날개가 비행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불현듯 어떤 기억이 스쳤다. 아레아가 흐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변형 골렘, 이것을 내 수중에 넣기 위해서…….”
아레아는 하이케의 말을 듣고 던전을 깊숙이 탐사한 끝에, 람피오네가 숨겨 둔 이 골렘을 발견했다.
아마도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일 강력한 마법의 결산.
아레아는 헬무트와 연락을 끊고, 골렘을 확보하기 위해서 람피오네가 겹겹이 두른 결계를 뚫어 내기 시작했다.
혹시 신전과 싸우게 된다면 변형 골렘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보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악수가 되었다. 결계를 뚫고 골렘을 장악하기까진, 아레아의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리고 거기에 완전히 몰두하여 연락이 끊어진 사이, 헬무트는 배신 당해 이곳 파헤의 숲으로 내쫓겼다.
그러나 어쨌든, 아레아는 이 골렘을 손에 넣었다.
골렘의 변화에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던 이그렐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게 하늘을 난다고? 금속이면 무겁지 않나?]“비행형으로 전환 시에는 경량화 마법과 바람 마법이 발동됩니다. 구현한 형태를 마법으로 뒷받침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우와, 이런 게 있다는 걸 왜 말 안 했어!”
시안이 감탄하자, 아스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쟤는 우리를 친구라고 생각 안 한다니까. 여태까지 불친절한 거 봐라. 그냥 너희는 닥치고 날 따라오라는 식이잖아.”
“필요하니까 꺼냈지, 구경거리로 쓸 물건이 아니야.”
딱 잘라 말한 아레아는 바로 이그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그렐 님은 중앙 권역을 향해가시면 됩니다. 저희가 바로 뒤따를 테니까요.”
[고작 저런 게 날 쫓아올 수 있을 것 같아?]“예.”
아레아의 깔끔한 대답에 이그렐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곧 엄포를 놨다.
[그럼 따라와 봐. 대신 너희들이 뒤처진다 싶으면 나는 다시 걸어갈 거다!]이그렐은 서서히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새에게서 일어나는 마기를 실은 바람이 네 명의 인간을 후려쳤다.
그의 몸이 서서히 허공으로 들렸다.
느긋하게 깃털 손질이나 받으면서 중앙 권역을 향해 천천히 가려고 했던 이그렐이었다.
그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 이 인간들을 알차게 부려 먹자고 결심한 터였다.
하지만 요 며칠 날지를 못했더니, 좀이 쑤신 게 문제였다.
그는 새.
새의 본능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다.
이그렐은 다른 마물들에게 깔끔하게 손질한 깃털을 뽐내면서 파헤의 숲 상공을 날아가고 싶었다.
‘어차피 내 속도를 따라오긴 힘들 테니, 일단 같이 가는 척했다가 빨리 날아서 대충 따돌려야지.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너희가 너무 느리다는 핑계로 다시 걷자고 하면 되지, 뭐.’
이그렐이 하늘로 떠오르자, 아레아가 손짓으로 지시했다.
“등에 올라타. 바로 따라간다.”
네 명이 재빨리 등에 오르자, 새의 등 위에 한 줄 형태로 네 개의 안장이 구현되었다.
“와, 뭐야. 이거 완전 대단한데?”
시안이 혀를 내둘렀다. 그도 마법사지만, 마법사의 눈으로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골렘이었다.
아레아가 제일 앞에 앉고, 몸을 묶어 주는 금속 띠를 허리에 찼다.
“어서 앉아.”
샤를로트, 아스카, 시안 순으로 하나같이 자리를 잡고 앉아 허리에 금속 띠를 찼다.
모두가 불안한 듯이 허리춤을 매만졌다. 새 위에 앉아서 나는 건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다.
그들 모두가 준비를 끝마칠 때쯤, 이그렐은 어느덧 완전히 하늘 위까지 올라가 그들을 재촉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그늘이 그들을 덮었다.
“가자.”
아레아가 명령을 내리자, 골렘이 날개를 모았다.
그오오오, 쿠왕!
곧 골렘의 다리가 바닥을 박차고, 화살처럼 하늘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휘잉!
이그렐과 가까운 상공에 이르렀을 때쯤, 양 날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퍼졌다.
골렘은 허공에서 정지했다.
그러나 그 반동이 탑승자들의 몸 전체를 울렸다.
“으아아악!”
몸이 튕겨 나가며 금속 띠가 팽팽히 당겨지자, 아스카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배짱 좋은 검사라지만, 그건 땅에서의 일이지 하늘에서의 일은 아니다.
어느덧 바닥이 아득하게 멀었다. 본능적인 공포심이 일어나는 높이였다. 이렇게 높이 날아올라 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몸까지 흔들리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으윽!”
시안도 바람의 정령을 소환한 채로 신음을 토했다.
샤를로트는 하얗게 질린 채 말이 없었다. 고소공포증에 정신이 달아난 눈치였다.
시안이 항의했다.
“무슨 출발이 예고도 없이 이래! 날갯짓해서 천천히 날아올라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골렘이지 실제 새가 아니니까. 방식이 좀 다를 수 있지. 대신 빠르기는 할 거야. 걷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레아는 얄미울 정도로 차분하게 대꾸했다.
사실 그녀도 이 골렘을 비행형으로 구현해 본 건 처음이었다.
‘괜찮겠지. 안정성은 테스트해 봤으니.’
마법사가 둘이니 추락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태연하게 생각했다.
이그렐은 금세 저를 따라 날아올라온 골렘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법 빠르구나? 좋아, 그럼 한 번 날아가 볼까?]호승심이 도진 이그렐이 날개를 세차게 퍼덕였다.
비록 마법의 보조를 받고 있다지만, 골렘 따위가 제 속도를 따라오진 못하리라.
이그렐은 확신했다.
‘어디 한 번 따라와 보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날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