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82
281
헬무트
281화
4. 결계를 넘어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날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앞으로 할 일이 심상치 않을 것을 예감하고 빠릿빠릿해진 터였다.
헬무트는 회포를 풀긴커녕 종일 검만 휘둘렀다.
아레아는 마치 마법학부 교수처럼 팔짱을 끼고 섰다.
졸지에 강의 비슷한 걸 듣게 된 엘라가와 이그렐도 순한 양처럼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아레아는 그들을 쭉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겠습니다.”
그녀의 손이 허공에 펼쳐졌다.
환상 마법이 허공에서 구현되었다. 중간이 넓은 판으로 구분된 원형의 구.
“이것이 신성 결계입니다. 이 신성 결계를 그대로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우선 이 신성 결계를 흔드는 겁니다.”
구의 사방에 하얀빛으로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중앙에 빨간 점이 찍혔다.
“말했듯이 이 중앙의 핵은 사방에서 뻗어져 나오는 신성력을 결집합니다.
그건 다시 말해, 사방의 핵으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결집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결계가 약해진다는 뜻이겠지요.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방해할 수는 있습니다.
바깥에서 항시 신성 결계의 상태를 살피는 루멘의 신도들이 이변을 눈치채기 전에요. 이 신성 결계야말로 신전이 존재하는 목적, 그 자체니까요.”
신성 결계는 아주 오랜 세월, 그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은 채 고요하게 유지되었다.
거기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신전에서도 심상찮게 느낄 터. 다시 결계를 원래대로 돌리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신전에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대마법사 안티올과 하이케.
결계에 이변이 생기면, 그들이 저 밖에서 신전의 시선을 빼앗을 테니까.
그 틈을 노려, 결계를 빠져나간다. 그것이 아레아의 계획이었다.
“이것으로 신성 결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네 개의 원형 금속판. 빽빽하게 세밀한 마법진이 그려진 그 가운데 커다랗고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마치 물결처럼 그 안에서 마력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바다처럼 막대한 마력이 거기에 깃들어 있었다.
시안이 중얼거렸다.
“와, 이걸 여기서 보네. 아다만티움! 세상에서 가장 많은 마력을 담을 수 있는 보석이지. 희귀한 것도 희귀한 거지만, 저 정도 크기면 어마어마하게 비싼데 네 개나 돼!
게다가 마력을 저만큼 담으려면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수년 이상이 걸렸을 거야.”
아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신성 결계의 핵 위에 올려 두면, 작동할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네 개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하나라도 작용하여 신성 결계의 균형이 깨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균형의 틈을 비집고 나가려는 것이지 신성 결계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헬무트가 예리하게 꼬집었다.
“그렇다면 네 말은, 일행을 나눈다는 뜻이군. 네 방향에서 동시에 그것을 작동시켜야 하니까.”
“그래,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작동시키는 게 좋아. 그리고 최대한 빨리 이 중앙 권역에서 합류해서 결계를 빠져나가야 해.”
“저것은 얼마나 오래 작용하지?”
“길어야 사흘. 더 짧을 수도 있어. 최대한 빨리 와야 해. 만약 이 신성 결계가 루멘의 의지 그 자체라면, 위협을 감지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
그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는 점이 변수라면 변수였다.
“사흘 안에 중앙 권역으로 돌아와 합류해야 한다는 거로군.”
“출발한 지 나흘 후, 정오. 그때 결계의 핵 위에 이것을 올려놓는 거지. 핵에 가까이 가면 이게 위치를 말해 줄 거야.”
“그렇다면 일행은 어떻게 나눌 셈이지?”
아스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야 슬슬 좀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행을 나눈다면 이제까지처럼 생각 없이 아레아를 따라다닐 수는 없는 거니까.
드디어 파헤의 숲에 들어오고 나서 최초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그동안 검을 갈고닦아온 터였다. 흥분감으로 그의 눈빛이 생생해졌다.
“일단 남쪽은 쉽지. 이쪽에 권역의 지배자인 이그렐 님이 계시니까.”
[응? 나?]이그렐이 괜스레 백치미를 보이며 눈을 깜빡거렸다. 괜스레 끼어서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터였다.
괜히 아레아가 그를 끼워준 게 아니었다. 준비는 다 했어도 여건상 네 방향 결계를 모두 약화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지는 않았는데, 그가 있어 일이 더 쉬워졌다.
“이그렐 님은 신성 결계에 가까이 접근하기 힘드실 겁니다. 저걸 넣어 두는 건 우리 중 한 명이 하면 됩니다. 그러니 한 명만 데리고 남쪽으로 가주세요.”
이그렐이 항의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해? 지금 내 등에 인간을 태우라는 거냐!]“등에 태우지 않아도 됩니다. 매달려서 가도 되니까요.”
어쨌든 자신이 할 건 아니기에 아레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서 그 정도 불편쯤이야 못 견딜 녀석이 없었다.
[안 할 거면 왜 내 영역까지 와서 죽치고 있냐? 할 일도 없는 게. 그냥 해 달라면 해.]엘라가가 마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이그렐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무식한 표범. 이래서 길짐승이 힘을 가져선 안 되는 건데. 그래서 나와 함께 갈 건 누군데? 네가 함께 갈 거냐?]가는 김에 깃털 손질을 받아야겠다고 작심한 이그렐이 인간들을 둘러 보았다.
당연히 아스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레아가 제일이지만, 샤를로트와 시안은 비슷비슷하다.
아레아는 생각해 놓았다는 듯 바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은 샤를로트가 좋겠군요.”
샤를로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만 쉽고 편안한 일을 맡을 수는 없습니다!”
이그렐을 따라가서 신성 결계에 핵을 설치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 그건 가장 간단하고 위험부담이 적은 일이다.
샤를로트는 아직 죗값을 충분히 치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위험한 일을 맡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식의 특혜는 가당하지 않다.
하지만 아레아의 반응은 싸늘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군. 네가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네가 아스카보다 약한 전력이기 때문이야. 마법사인 시안은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 남은 건 너밖에 없지. 저런 어린애한테 이런 일을 맡길 수는 없잖아?”
아레아의 손가락질을 받은 세라가 움찔했다. 항의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아레아에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에 아레아는 엄청나게 아름답지만 싸늘하고 무서운 언니였다.
이그렐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은 그의 눈빛이 유독 초롱초롱했다.
엘라가가 엄포를 놓았다.
[너 헛수작 부렸다간 날개를 찢어 놓을 줄 알아! 뱀도 먹었겠다 새를 못 먹을 건 없지.] [누가 헛수작을 부린다는 거냐. 이 고상한 이그렐 님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중간에 인간 한 명 빼돌리면 어떻게 될까 슬쩍 호기심을 품던 이그렐이 찔끔해서 성질을 냈다.
아레아가 가볍게 매듭지었다.
“그럼 그렇게 남쪽은 해결된 것으로 하고. 이제 북쪽, 동쪽, 서쪽을 정해야겠지.”
엘라가가 뚱하니 중얼거렸다.
[동쪽은 나호의 영역이지. 나호가 죽었으니 그쪽은 별로 위험할 것도 없지 않나?]헬무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라가가 내버려 둬서 동쪽은 마물 천지가 되었어. 권역 지배자들의 눈치를 볼 것 없는 영역이니까.”
[그럼 이번엔 내가 인간 한 명 달고 동쪽으로 가면 되는 거냐?]“아뇨, 엘라가 님은 그런 마물들을 상대하셔선 안 됩니다. 엘라가 님이 상대해야 할 건 그런 하찮은 마물이 아니니까요.”
그가 상대할 건 권역의 지배자.
그것이 그녀의 계산이었다. 아레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렇군, 서의 바하렉과 북의 칸트라. 그들이 있었지.]나호의 핵을 삼킨 엘라가는 권역의 지배자 중에서도 가장 위에 선 강자였다.
필수적으로 다른 권역을 지나야 하는 이 시점에서, 지배자를 상대할 엘라가를 동쪽에 낭비하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동쪽에 인원을 많이 낭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그렐 님과 샤를로트를 제외하고 모두가 동쪽으로 가서 시작할 겁니다.
동쪽에는 한 명을 남겨 두고 바로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면 됩니다. 그 한 명은, 정해진 시간에 물건을 작동시키고 중앙 권역으로 오면 되는 거죠.”
아스카가 반문했다.
“가는 건 쉽지만, 결국 올 때는 그 많은 마물을 헤치고 와야 한다는 거잖아? 혼자서.”
설마 그게 자신이 될까 불안하면서도 흥분되는 기색이었다. 싸움닭 기질이 어디 가진 않았다. 그 상대가 마물일지라도.
“이그렐 님이 이동이 빠르니, 남쪽에서 일을 처리하고 바로 동쪽으로 날아와 줄 수도 있으시지. 엘라가 님도 마찬가지. 하지만 시간상 동쪽에서 중앙 권역으로 오다가 합류해야 하긴 할 거야.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있지. 시안.”
모두의 시선이 가만히 있던 시안에게 박혔다.
“나? 나 혼자?”
시안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스카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안위를 좀 더 걱정했다.
보조적으로는 활동해도 주도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다.
그가 아무리 숲에 친숙한 정령 마법사라고 해도, 그게 마물의 숲은 아니었다.
마법사는 자고로 전투 상황에서는 검사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너는 정령 마법사니 마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고, 이그렐 님에게 네가 어디 있는지 알리기도 쉽지. 그래서 너야.”
아레아의 이유는 논리적이었다. 부정할 수 없게끔.
시안은 울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이제 북쪽과 서쪽을 결정해야겠군. 엘라가는 어디로 가는 거지?”
헬무트가 물었다.
아레아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근 몇 년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빛.
그는 확실히 살아난 상태였다. 이전처럼 그저 무기력하게 살아나갈 뿐인 그가 아닌, 파헤의 숲을 나간 그때 이상으로 의욕에 차 있는 상태.
그리고 그 의욕을 그에게 안겨 준 이는 연인에게 부드러워진 말투로 대답했다.
“서쪽. 서의 바하렉을 상대하셔야 할 테니까.”
[서의 바하렉이 북의 칸트라보다 더 말이 안 통하고 성질 사나운 녀석인 건 확실하지. 나호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잠도 잘 안 자는 데다가 후각도 발달해서 내 냄새를 묻힌 너희들이 영역을 침투하면 득달같이 달려들 테니, 웬만하면 피하기도 힘들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칸트라 녀석이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뭐, 운 좋으면 놈을 마주치지 않고 지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지.]
“엘라가 님은 아스카와 함께하시면 될 겁니다. 바하렉을 상대하시는 사이, 아스카가 신성 결계로 향하는 거지요. 그리고 북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