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83
282
헬무트
282화
아레아의 시선이 움직였다.
“헬무트와 제가 가겠습니다.”
헬무트에게 꽂힌 눈동자에 빛이 찰나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이그렐과 엘라가가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북쪽 권역의 지배자를 상대하려면 인간 중 가장 강한 이들이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
당연히 헬무트와 아레아가 제격이었다.
“일부러 둘이 같이 다니려고 그런 거 아니지?”
아스카가 의심스러운 기색을 떠올렸다.
여긴 복작복작하고 시선도 많아서 둘이서만 함께 있기가 어려웠다.
재회 이후로 헬무트와 아레아는 제대로 둘이서 대화를 나눌 시간도 갖지 못했다.
헬무트는 검 수련을 했고, 아레아는 자신의 계획을 검토하기 바빴으니까.
어찌 보면 아레아가 서두르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빨리 모든 일을 매듭짓고, 이 파헤의 숲을 빠져나가 느긋하게 함께하기 위해서.
지금은 오로지 계획에 몰두할 때다.
“더 좋은 의견 있어?”
아레아는 부정하는 대신, 나직이 물었다.
아스카는 입을 닫았다. 반박할 구실은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정해졌다. 시안과 아스카, 샤를로트가 서로를 긴장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함께 행동하는 것만을 생각했지, 이렇게 떨어져서 움직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그들이다.
‘괜찮겠지.’
“앞으로 두 시간 후에 채비를 마치고 출발합니다. 동쪽 끝까진 엘라가 님이 함께할 테니 전력으로 달리면 이틀이면 충분하겠지요.
이그렐 님은, 이틀 후 이곳에서 남쪽으로 출발해 주시기를.
출발한 지 나흘 후, 정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일 후, 그때 물건을 가동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안에 이곳 중앙 권역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레아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물건을 가동하는 게 아니라, 사흘 안에 중앙 권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결계가 다시 힘을 되찾기 전에 출발해야 하니까요.
물건을 가동하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무리하진 마십시오. 계산상으로는 하나만 가동해도, 신성 결계의 균형을 깰 수 있습니다.
적어도 동쪽과 남쪽, 서쪽 중 한 군데에서는 무난히 가동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가장 변수가 많은 곳은 북쪽. 권역의 지배자들과 함께하지 않는 그곳이었다.
‘북쪽의 칸트라.’
헬무트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놈에 대해서는 이름밖에 들어본 적이 없다.
헬무트는 나호와 싸울 때보다 훨씬 강해졌지만, 현재의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비교 대상인 엘라가도 훅 강해져 버려서, 스스로의 수준을 재어 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요.”
그때 세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저도 싸울 수 있는데.”
자기 역할이 배정이 안 되니 말해 본 거였다.
아레아는 너처럼 약한 녀석은 도움이 안 되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대신, 조금 더 부드럽게 말했다.
“중앙 권역에서 네 어머니를 지켜. 며칠간 이곳은 비어 있을 테니까.”
“저도 결계에 들어갈 수 있어요!”
물론 그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마물과 싸울 때 그녀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이그렐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이틀 후에 출발하라 이거지? 그럼 난 이틀 동안 엘라가의 영역에서 뒹굴고 있을 테니, 넌 내 깃털 손질을 하렴. 네가 평소에도 엘라가 털을 손질하지 않니.]엘라가 불만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너, 왜 내 인간들을 마음대로 부려 먹을 생각을 하냐.] [어차피 네 영역에 있을 건데. 내가 직접 도와주기까지 하잖아. 잠깐 빌려준다고 생각해.] [뭐라는 거야. 어차피 비듬 떨어트리며 날아다니는 것밖에 할 일도 없는 게.] [누가 그런 걸 떨어트린다는 거야! 난 깨끗하거든! 냄새나는 털 짐승 주제에 정말.]그렇게 두 마리 마물의 투닥거림을 끝으로 대화는 끝났다.
그것으로 파헤의 숲 탈출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헬무트, 조심하길 바라요.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네요.”
떠나기 전, 수잔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선 세라도 헬무트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갔다 와요. 스승님!”
헬무트는 냉담하게 말했다.
“돌아다니지 말고 집 안에만 있어.”
어머니가 딸과 함께 남편을 배웅하는 듯한 광경이다.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친근함에 아레아의 눈매가 왠지 차가워졌다.
“마치 가족처럼 보이는군요?”
엘라가가 눈치 없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내가 저들을…….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헬무트의 새카만 눈동자가 경고를 담고 직시하자, 엘라가는 말을 돌렸다.
계속 지껄이면 엘라가의 가장 취약한 부위인 콧방울을 세차게 후려칠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쪽의 의사와는 무관한 엘라가의 생각 때문에, 자신이 피해 보는 일은 피하고 싶은 헬무트다.
아레아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저들을?”
[아무것도 아니야.]엘라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왜 헬무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아레아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떠나기 전 샤를로트에게 아다만티움과 식량을 건네주었다.
“중앙의 보석이 빛으로 위치를 알려줄 거야. 그곳에 올려놓으면 돼.”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샤를로트의 비장한 인사를 뒤로하고, 그들은 바로 출발했다.
아스카, 시안, 헬무트, 아레아. 인간 네 명 중 셋은 아레아의 골렘에 올라탔고 헬무트만이 엘라가의 등에 올랐다.
안장도 없이 표범에 등에 오르는 건 다들 사양이었다.
헬무트도 골렘에 올라도 되었지만, 그랬다간 엘라가와 소통할 수 없다.
헬무트는 잘 버텼다.
엘라가의 몸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과 충격을 고스란히 버텨 내면서. 아스카가 곧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
고역스러운 여정 끝에 그들은 어김없이 동쪽의 끝에 도달했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흐른 뒤였다.
신성 결계에서 거리를 두고 엘라가가 멈춰섰다.
신성 결계가 가시거리에 잡히는 순간부터 신성력이 그의 마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강렬한 느낌은 아니지만, 근처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마물은 힘을 잃는다.
엘라가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으으, 기분 나쁜 느낌. 저런 걸 자기 영역 근처에 두고 어떻게 사냐.]헬무트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물었다.
“엘라가는 신성 결계를 처음 보나?”
[그렇지. 중앙 권역에는 하늘 위에나 있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하지만 눈으로 본 적은 없어도, 엘라가는 신성 결계에 대해서 알았다.
마성의 각성을 통해 본능적으로 체득한 지식.
헬무트는 동쪽 끝의 신성 결계를 주시했다.
그의 어둠의 싹 역시도 반응하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비스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콱.
하늘에서 골렘이 날아 내려와 바닥에 발톱을 박았다.
아레아와 시안, 아스카가 바닥에 내려섰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시안이 중얼거렸다.
“이제 여기, 나 혼자만 남고 다들 간다, 이거지?”
동쪽은 주인 없는 땅.
아무리 신성 결계 가까이라 위험할 게 없다지만 마음이 불안한 시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파헤의 숲에서 혼자 있는 건 담력 시험이나 다름없다. 폭포도 있는 남쪽에 비해 동쪽은 그저 파헤의 숲의 연장 같았다.
“넌 저기다가 발동만 시키고 돌아오면 되잖아. 내가 문제지.”
아스카가 경계하듯 엘라가를 쳐다봤다.
아무리 헬무트를 키운 마물이라곤 하지만, 엘라가는 덩치부터가 크고 무시무시한 마기를 지녔다. 그 엘라가와 함께 다른 권역의 지배자가 있는 서쪽으로 가야 한다.
이 거대한 표범 등위에 올라타서 매달려 가는 것도 고역스럽지만, 두 마물의 싸움에 휩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가 맡은 임무가 일행 중에서 두 번째로 어려운 임무였다.
엘라가가 콧방귀를 뀌었다.
[안 잡아먹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가야.]“누가 아가란 거……!”
발끈하던 아스카는 입을 다물었다.
헬무트야 워낙 엘라가에 익숙하니 만만히 대하고 있는 것이지만, 엘라가에게선 아무리 왕년의 미친개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기운이 풍겼다.
[뭐, 바하렉이 성질 더럽다곤 해도 그건 예전 이야기지. 이제는 내가 훨씬 더 강하니까.]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안심하라는 투였다.
이미 나호가 죽어서 힘의 균형이 깨졌는데, 권역의 지배자 하나가 더 사라진대도 이상하지 않다.
성격이 노골적으로 포악하지는 않다고 해도, 엘라가 역시 마물.
꼭 평화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정 수틀리면 죽여 버리면 되는 거고.’
엘라가는 느긋이 생각했다. 차라리 그는 이그렐에겐 우호적이었다.
그건 이그렐이 적절할 때 수그릴 줄 아는 성격이었던 탓이기도 했다.
“크게 위험하진 않을 거야. 이걸 받아.”
아레아가 시안에게 마력석과 식량, 아다만티움을 건네주었다.
“신성 결계로 진입하려면, 마법사인 너도 마력의 소실을 겪을 거다. 최대한 일을 서두르고, 나온 직후 마력석을 사용해서 마력을 보충해.
그다음부터는 중앙 권역으로 조심히 돌아오면 되는 거다. 엘라가 님이나 이그렐 님과 합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시안이 긴장한 얼굴로 물건을 받아 들었다.
“알았어.”
헬무트가 엘라가 쪽을 돌아봤다.
“엘라가, 시안에게서 마기를 빼내 줘.”
파헤의 숲에서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몸에 마기가 깃들기 마련이다.
헬무트의 요청에 엘라가는 시안에게 자연스레 앞발을 들이댔다. 짐승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비치는 거대한 앞발이었다.
시안의 낯빛이 자연스럽게 창백해졌다.
하지만 엘라가는 개의치 않고 아주 가볍게, 두드리듯이 시안의 가슴께에 앞발을 올렸다.
곧 시안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미약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기의 잔재였다.
“뭔가 말끔해진 기분인데?”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제 손을 들여다보자 헬무트가 대꾸했다.
“여긴 신성 결계 근처니까 더 마기가 쌓이진 않겠지.”
“그런데 아레아, 이거 아다만티움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그냥 신성 결계 쪽으로 가지고 가면 되나?”
“그걸 들어 봐.”
“어라? 이거…….”
시안이 신성 결계 쪽으로 아다만티움을 내밀자, 아다만티움으로부터 가느다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푸른 빛은 가늘지만 선명하게 신성 결계의 어떤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안이 감탄하며 외쳤다.
“이걸 따라가면 되는 거로군!”
아레아가 차분한 투로 이야기했다.
“며칠간 근처에서 머물다가 정해진 때가 되면 움직이도록 해. 아직은 아니야.”
시안이 아다만티움을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야 며칠 좀 심심하겠지만 위험하지는 않겠지. 너희들이야말로 몸조심해.
특히, 아레아와 헬무트. 아무리 너희가 강하더라도 권역의 지배자씩이나 되는 마물이면 만만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엘라가까진 아니더라도 이미 그들은 이그렐을 만나 본 터였다.
그만한 마물이 그들에게 적대적이라면, 그 이후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