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86
285
헬무트
285화
‘이러다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스카는 생각했다. 비관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정신을 놓치고 굴러떨어지지 않은 게 용한 상태였으니까.
엘라가가 땅에 한 번 발을 디딜 때마다 내장부터 골수까지 흔들렸다. 엘라가의 등에 맞부딪힌 전신이 두들겨 맞은 듯이 얼얼했다.
쉬었다 가자고 말을 꺼내 보려고 했으나, 아스카는 그때마다 혀를 깨물뻔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엘라가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만 몰두할 뿐 자신의 등 위에 있는 인간의 상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등 위에 있는 게 세라나 수잔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실어나르는 건 덩치 크고 튼튼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대체 언제쯤 도착하는 거지? 이 망할 숲은 왜 이렇게 넓어!’
분명 며칠 안 되는 짧은 여정이다. 하지만 짧은 여정이라고 해도 이런 고문을 당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 자존심을 챙기는 게 아니었다.
여정 도중에 잠시 쉬었을 때, 엘라가가 바닥에 뻗어서 헉헉거리는 아스카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너, 허약한 녀석이구나, 헬무트와는 다르게.]“누가 허약하다는 거요!”
아스카는 드러누운 채 버럭 성질을 냈다.
“나도 이 정도는, 무, 문제없거든! 그냥 좀 멀미가 나서 그런 거지!”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고 아스카는 뒤늦게 후회했다.
[흐응, 그래. 괜찮다 이거지? 근데 너 헬무트 부하 녀석 아니었냐? 성깔이 제법 있구나.]“아닌데요. 내가 왜 부하입니까?”
[넌 헬무트보다 약하잖아.]아스카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구지 부하는 아닌데요. 같은 학생인데, 그런 게 어딨어요.”
엘라가가 옳다구나 물었다.
[헬무트는 아카데미인가 뭔가에서 어땠냐. 1등이었다면서.]어쩐지 학부모 같은 느낌을 주는 질문이었다.
마물이 인간들의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서 뭘 안다는 말인가?
하지만 마기를 풀풀 풍기는 거대한 표범과 단둘이 함께 있자니 아무리 아스카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헬무트를 키웠다니까.’
아스카는 왠지 ‘어른이 물으니 대답한다’라는 느낌으로 말했다.
“그 녀석은 중간에 들어왔는데……. 뭔가 분위기 있고 차갑고 곱상한 느낌이었죠. 다른 녀석들이 평민이라고 시비 거니까 패주기도 하고.”
[그래? 그럼 문제아 같은 거였냐?]“아니오, 문제아는 저고요. 헬무트는 자기한테 시비 거는 놈 아니면 안 팼어요.”
아스카는 의외로 현실 파악을 잘하고 있었다.
“헬무트는 우등생이었어요. 성적도 우수하고 성실하고 교관들도 높게 평가하고. 일단 실력이 압도적으로 좋으니까. 아카데미 대표로 검술대회에 나가기도 했는데요, 뭐. 그땐 확신하진 못했지만, 헬무트는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아니 바덴에서 가장 강한 검사였어요. 교관 포함해서.”
엘라가의 입꼬리가 헤벌쭉 올라갔다. 자식의 칭찬을 들어 흐뭇한 팔불출 부모 같은 표정이었다.
왠지 아니꼬워진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그럼 뭐해, 눈도 시커멓고 머리도 시커먼 게 눈빛부터가 살벌하고 애늙은이 같구먼. 자기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맨날 분위기 잡고, 겉멋만 들어선. 절대 15살 같지 않았는데.”
[그 녀석은 예전부터 그랬지. 어린 녀석이 웃지도 않고 종일 그놈의 수련인가 뭔가 하느라. 숲을 나가려면 강해져야 한다면서.다리언인가 뭐시기인가 만난 다음부터 맨날 근육 키운다, 검술 수련한다, 땀 뻘뻘 흘리고 다녔지. 뭐, 그때 쑥쑥 자라긴 했지만.]
“다리언이요? 그거 혹시 검성 다리언?”
아스카가 눈을 빛냈다.
아레아한테서 간략하게 헬무트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를 듣긴 들었는데, 그녀도 다리언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그래, 그 인간이 헬무트를 제자로 받았는데…….]“헬무트는 됐고, 다리언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다리언? 그 인간이 인간 세상에서는 검성이라고 불린다지. 그 녀석은 정말로 강했어. 나호조차도 녀석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엘라가는 순순히 아스카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도 오랜만에 새로운 대화 상대와 이야기를 해본 것이다.
특히 누군가의 뒷담을 할 때 둘은 죽이 잘 맞았다.
단지 그때 수다를 떠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었던 탓에, 그다음부터는 휴식이고 뭐고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아스카와 엘라가 일행이 이동해야 할 거리가 가장 멀었다.
그러니 엘라가가 서두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때부터 한 번도 못 쉬었지.’
하지만 안장도 없는 거대 표범의 털을 붙잡고 내달리는 아스카는 점점 그런 사정도 상관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오로지 엘라가의 등에 매달려 있기 위해서 비스를 소모한 터였다. 비스를 이런 데 쓰다니!
‘그냥 뛰어내려서 마물과 싸우는 게 낫겠다.’
아스카가 그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엘라가가 불현듯 멈춰섰다.
아스카의 몸이 앞으로 날아갈 듯이 번쩍 들렸다. 그의 손이 엘라가의 털을 뜯어낼 것처럼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표범!’
그러나 아스카는 균형을 잡자마자, 뭔가를 느끼고 몸을 굳혔다.
짙고 묵직한 마기가 느껴졌다.
엘라가 앞에서 이만한 마기를 발산하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마물은 흔치 않으리라.
피부 위로 쭈뼛 소름이 곤두섰다. 강력한 적, 그것은 감각 이전에 본능이 먼저 느꼈다.
바닥에 울림이 일었다.
파스스.
거대한 무언가가 저 앞에서 나무 사이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 무언가의 모습을 목격한 순간, 아스카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호랑이였다.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 털 위에 검은 줄무늬가 반들거리는 거대한 몸집.
날카롭고 새하얀 이는 순식간에 사냥감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 같았다.
같은 맹수라고는 하지만, 놈은 엘라가와는 달랐다. 어둠 속에서 마주한 즉시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은 포악함을 담은 그 두 눈.
파헤의 숲 권역의 지배자라고 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한 그대로였다.
놈은 경계하듯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먼저 입을 연 건 놈이었다.
[이거, 이거 엘라가 아닌가. 내 권역에는 무슨 볼일이지?]이렇게 노골적인 적의를 담은 마물의 음성은 처음이다.
사납다더니, 정말 사나운 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이그렐이 유순하게 느껴질 만큼.
‘꼭 악당 같잖아.’
아스카는 슬쩍 엘라가의 등 뒤로 내려섰다. 놈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놈은 아스카의 존재를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달고 온 인간은 뭐지? 최근에 결계가 흔들렸지. 저건 나한테 주는 선물인가?]바하렉은 웃는 듯이 소리를 냈다. 크르릉 거리는 목 울음이 오싹하게 들렸다. 엘라가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내가 네놈 입에 넣어줄 건 흙밖에 없다. 난 그냥 지나가려는 거니까 비켜. 볼일 끝나면 가마.]‘이 표범 그냥 애초에 싸울 마음인 건가?’
아스카는 엘라가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남의 땅에 온 것치곤 말투가 시비조다.
하지만 엘라가는 마물. 자기보다 약한데 자기한테 적대적인 녀석한테 곱게 말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엘라가, 네놈이 지금 나호를 해치웠다고 나를 업신여기는 거냐! 감히 내 권역에 발을 들이다니!]바하렉이 살기를 드러냈다.
바하렉은 미세하지만, 엘라가보다 강했다. 4년 전에는 말이다.
나호보다 엘라가가 강하듯 그런 사소한 우위였다. 보통은 호랑이가 표범보다는 강하니까.
바하렉은 그 우위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시 말해, 엘라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소리다.
그는 마성을 깨우친 마물이기에 본능을 이길 만큼 자아가 강했다.
[널 업신여기는 건 아니고, 글쎄 난 지나가야겠다니까? 서쪽 끝에 들렸다가 바로 갈 테니 그냥 내버려 두지그래?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거 괜히 야옹대지 말고.]같은 고양이과 주제에 엘라가는 바하렉을 고양이 취급하듯 말했다.
바하렉의 눈매가 단번에 살벌해졌다.
[4년 전만 해도 빌빌 기던 하얀 고양이 놈이!] [누가 빌빌 기어? 네가 하도 성질이 더러우니 상대하지 않은 거지. 노란 고양이 주제에!]엘라가는 저가 먼저 고양이 취급한 주제에 고양이 소리를 들으니 발끈한 것 같았다. 아마 표범과 호랑이한테는 고양이라는 소리를 하는 게 모욕인 듯싶다.
아스카가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서 있는데, 문득 엘라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파란 머리. 입 열지 말고 들어. 거의 다 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 내가 저놈을 상대할 테니, 너는 그냥 결계를 향해 달려라. 가는 길에 마물이 좀 나타날 수도 있어. 그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그것은 질문인 듯 질문이 아니었다. 무조건 해내야 하는 순간.
앞으로 나타날 마물이 얼마만큼 강한지는 엘라가도 모른다.
바하렉은 그래도 제 영토에 다른 마물들이 서식하는 것에 관대한 편이었으니까.
숲이 무성해서 시계가 확보되지 않는다고 하나, 아직 신성 결계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엘라가의 기준에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가 아스카의 기준과는 같지 않을 터.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엘라가가 바하렉과 싸운다면, 어쨌든 그 여파가 엄청날 터. 아스카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다행히 방향은 가늠할 수 있지.’
아스카는 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엘라가의 등 위를 벗어난 것만은 잘된 일이었다. 차라리 마물을 상대하며 위험한 게 나았다.
[좋아, 그럼 스리슬쩍 옆쪽으로 빠져서 가라. 내가 저놈을 묶어 둘 테니.]엘라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카는 발을 움직였다. 그가 조금 멀어지자마자 엘라가의 몸에서 새카만 마기가 피어올랐다.
전투태세를 방불케 하는 느낌. 엘라가가 도발적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입만 놀릴 거지?] [엘라가.]바하렉이 짓씹듯이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이미 하찮은 인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엘라가가 밟고 있는 땅은 바하렉의 것이고, 엘라가는 그의 권역을 침범한 침입자니까.
그것은 이 서쪽 권역의 지배자인 바하렉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땅히 응징해야만 했다.
[그래,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과연 네가 얼마만큼 강해졌을지!]바하렉에게서 마기가 폭사되었다. 몸 전체가 까맣게 보일 만큼 짙은 마기였다.
[5년 전인가, 그때가 떠오르는군.]엘라가의 입가가 휘어져 올라갔다. 바하렉의 것 못지않은 사나운 미소였다.
5년여 전 그때, 나호는 헬무트를 거의 죽일 뻔했다. 뒤늦게 도착한 엘라가는 나호와 맞서 싸웠고, 놈을 찢어발기고 그 핵을 취했다.
그때의 승리자는 엘라가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러하리라. 엘라가는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 주지.’
엘라가는 거만하게 명령했다.
[덤벼.]크아앙!
사나운 포효가 공기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