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93
292
헬무트
292화
‘무슨 마물이 이래.’
헬무트와 아레아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권역의 지배자씩이나 되어서 다른 놈들과 시비가 붙지 않기 위해서 숨었다는 소린가?
마성이 발달한 마물은 본능을 이기고 제 나름의 자아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놈처럼 소심한 쪽으로 자아가 구축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놈은 자그마치 북쪽 권역의 지배자 아닌가!
엘라가처럼 대책 없이 느긋하고 자신감을 마구 뿜어내도 이상하지 않건만.
“거북이니까.”
헬무트는 평온하게 대꾸했다. 거북이란 겁을 먹으면 껍질 속으로 모습을 숨기는 녀석 아닌가.
하지만 현재 칸트라는 헬무트의 검에 목을 꿰어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아레아는 잠시 뒤 작은 소리로 의견을 꺼냈다.
“다른 놈보다 이 녀석이 권역의 지배자로 남아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나가고 난 뒤 파헤의 숲 생태계가 어떻게 되건 알 바 아니지만, 강한 놈이 조용하다면 좋은 게 아닌가.
“글쎄, 교활한 놈이라 연기하는 걸 수도 있잖아.”
헬무트는 고개를 으쓱했다.
어차피 놈의 핵은 신성 결계 쪽으로 던져서 정화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일단 칸트라를 죽이면, 놈이 보유하고 있던 체내의 마기가 발산될 거다. 그게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리라.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애초에 북쪽에 혼자 처박혀 산 마물이 연기라는 걸 배울 일이 있을까.
칸트라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그대로 고여 있었다.
그때 아레아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 아레아 쪽도 뭔가를 더할 여력이 없었다. 마력석도 이미 많이 썼고, 아직 해야 할 일도 있다.
그들은 빨리 중앙 권역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여정은 순조롭지 않으리라.
북쪽 권역에 들어서면서 계속 습격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은 같은 상황을 겪게 될 터였다.
엘라가가 향한 서쪽이나 이그렐이 향한 남쪽은 이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터.
권역의 지배자가 길을 가는 데 감히 가로막을 마물은 없다.
실제로 칸트라가 도사리고 있는 이 일대 해역에 다른 마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헬무트 역시도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 녀석이 쓸만할 수도 있겠군.’
“칸트라.”
헬무트가 입을 열었다.
[왜…… 부르냐…… 인간. 나…… 아프다.]확연히 시무룩해진 목소리였다.
“우리는 목적을 이미 달성했고,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칸트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역시…… 날…… 해치는 게…… 목적……이었어!]“헛소리하지 마. 네가 싸움을 걸어 놓고는.”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구는 칸트라에게 아레아가 핀잔을 던졌다. 헬무트가 말을 이었다.
“네가 우리를 빨리 떠나게 해 주면, 검을 뽑아 주지. 널 살려 준다는 소리다.”
[빨리…… 떠나게…… 해 주면……?]“북쪽 권역은 네 말대로 네 땅이지. 그러니 주인답게 네 권역의 끝까지 우리를 데려다 줘. 우리는 중앙 권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럼…… 그대로…… 떠나겠다는…… 소리냐?]“그래, 인간인 우리가 너를 해쳐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네가 우리를 데려다 주기만 한다면 순순히 떠나겠다. 너는 다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 거다.”
[나를…… 끌어내서…… 엘라가에게…… 바칠 셈…… 아니냐!]짜증 날 정도로 의심하며 따지고 드는 게, 이런 면에선 권역의 지배자답기는 했다. 어쨌든 할 말은 다 하는 거니까.
‘애초에 누군가한테 뒤통수를 맞아본 적도 없을 텐데.’
뒤통수를 맞아 본 헬무트도 이 정도는 아니니, 칸트라는 그냥 천성이 겁쟁이에다가 의심도 많은 듯했다.
제 몸의 안위를 무진장 챙기는 녀석이었다.
“응하지 않으면 넌 여기서 죽어. 너한테 지금,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헬무트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비스가 실린 그의 검날이 조금 움직였다. 또다시 칸트라는 비명을 질렀다.
[싫어…… 아파……. 아파……! 그만해……!]“시끄러워.”
“근데 북쪽 권역이라고 해서 다 바다가 아니잖아. 이 녀석, 땅에서는 느린 거 아니야?”
거북이에게 품을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네발로 기는 거북이가 엘라가처럼 속도를 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니야…… 나…… 땅에서도…… 빠르다!]“그럼 우리를 데려다 줘. 순순히 떠나 줄 테니까.”
[정말…… 이냐. 정말…… 그대로…… 떠날 거냐.]“그래.”
헬무트가 단호하게 대꾸하자, 칸트라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검…… 뽑아 줘……. 아파서…… 못…… 움직인다.]엄살이 심한 녀석이라서 그건 사실인 것 같았다. 어차피 놈의 상처에 다시 검을 꽂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녀석은 강하게 나가면 위축돼서 더 말을 잘 듣는 타입이었다.
그걸 파악한 헬무트는 싸늘한 말투로 내뱉었다.
“헛수작 부리면 그대로 네 머리를 등껍질과 분리해 주지.”
엄포를 놓은 헬무트는 그대로 검을 뽑았다. 칸트라의 비명이 또다시 허공을 울렸다.
아레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헬무트는 피에 물든 검을 허공에 털어 냈다.
피에 섞인 마기는 신성력에 의해서 빠른 속도로 정화되었다.
헬무트는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서두르지. 칸트라, 너도 우리를 빨리 보내고 싶을 텐데.”
[알았…… 다.]잠시 후, 칸트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의 주변에 물보라가 일어났다.
놈은 헬무트와 아레아가 올라선 등딱지를 물 위로 내어 놓은 상태였다.
그는 그대로 헤엄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수히 육체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마기로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 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연히 속도는 빠를 수밖에 없다.
이 세상 그 어떤 배보다도 칸트라는 바다에선 더없이 훌륭한 탈것이었다.
엘라가처럼 충격으로 내장을 울리지도 않고, 마치 거대한 배처럼 매끄럽고 안정적으로 움직였다.
“대단한데. 내가 태어나서 거북이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어.”
아레아도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헤엄쳐서 갈 거면 빙판은 어떻게 지날 거지? 돌아갈 건가?”
잠수해서 이쪽 둘을 모두 떨군다는 선택지도 있다. 아레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칸트라의 대답은 무식할 정도로 간단했다.
[부순…… 다!]그 말 그대로였다. 칸트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는 두꺼운 빙판을 종잇장처럼 부서뜨렸다.
얼음 파편이 마치 눈보라처럼 폭풍을 일으키며 튀었다. 그러면서도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칸트라는 얼음을 부수고 나아가는 배였다. 그의 앞에선 바다의 어떤 자연물도 위험이나 방해가 되지 못하리라.
아마 최단거리를 택하기로 한 듯하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일직선으로 남쪽.
‘이제, 중앙 권역에서 합류한다.’
아레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모두가 합류하면 그때는 최종 단계, 중앙 권역 상공의 신성 결계를 돌파하는 일만 남았다.
*
비슷한 시각, 이그렐이 중앙 권역을 향한 날갯짓을 시작하고 엘라가가 아스카를 등에 얹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 때였다.
북, 남, 서, 세 구역은 모두 권역의 지배자들이 움직이는 탓에 평온했지만, 동쪽은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동쪽에 있는 건 고작 인간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숲이 이렇게 생겼어. 무서워 죽겠네.’
임무를 완수한 시안은 홀로 파헤의 숲을 지나는 중이었다.
동쪽의 끝까지 가는 건 쉬웠지만, 반대로 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혼자라면.
편히 간 대가를 치르듯, 그는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구간에 홀로 들어섰다.
여태까지 잊고 있던 파헤의 숲의 악명이 뇌리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행인 점 하나는, 그가 보통의 마법사보다 훨씬 더 은신 마법에 능하다는 거다.
정령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숲과의 친화력이 발달한 존재.
게다가 그에겐 어둠의 정령이 있었다. 어둠의 정령의 능력 중 하나는 은신이다. 그 힘은 인간 한 명을 파헤의 숲의 위협적인 마물들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듯이 숨겨 주는 게 가능했다.
냄새나 흔적 모두를 흐리게 해 주는 것이다.
그의 어깨에 올라앉은 어둠의 정령이 검은 안개 같은 걸 입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시안이 보기에 그렇다는 거고 외부에서 보면 그냥 그림자처럼 보이리라.
흉악하게 생긴 마물들이 그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그때마다 시안은 숨을 틀어막아야 했다.
‘환상 마법으로 대마물전 훈련을 좀 더 해뒀어야 하는 건데.’
바깥세상에서 마물을 상대로 싸울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걸 위한 훈련 과정도 있기는 했다. 파헤의 숲에 오기 전에 나름 대비는 하고 온 터였다.
‘근데 혼자 파헤의 숲을 지나게 될 줄은 몰랐지.’
이건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은 아레아 때문이었다. 적어도 검사 한 명과는 함께 있어야 주문을 준비할 시간이라도 벌 수 있을 거 아닌가.
아레아야 워낙 마법 발현 속도가 빠르지만, 다른 마법사도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아레아가 전투 마법사에 가깝다면 시안은 정령 마법사. 보조적인 역할에 능했다.
게다가 시안 자신도 몰랐던 것인데 그는 간이 작았다.
몇 번 마물과 맞닥뜨린 그는 싸움 없이 조용히, 쥐죽은 듯이 중앙 권역으로 향하는 것을 택했다.
엘라가야 워낙 몸이 집채만 하긴 해도 하얗고 털빛이 아름다운 표범이다.
이그렐도 깃털 색이 좀 요란할 뿐이지 도저히 마물처럼 보이지 않는 새였다.
하지만 그 둘만 그랬던 것뿐이고, 여기서 만나는 마물은 정말이지 소름이 다 끼쳤다.
눈이 열두 개 달리고 거대한 송곳니가 드러난 거대한 멧돼지가 옆을 슥 스쳐 지나가는데, 절로 침이 삼켜졌다.
어둠의 정령을 꺼내 놓는 데 특별히 집중력이 필요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마법을 걸고 있었다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저절로 풀렸을지도 모른다.
시안에게는 일종의 공포체험이었다.
게다가 계속 마물들이 한 마리씩 와서 주변을 맴도는 게, 놈들은 희미하게나마 시안의 냄새를 맡을 수는 있는 듯했다.
파헤의 숲에서는 이질적이고 먹음직한 인간 냄새.
하지만 어둠의 정령이 장막을 펼쳐서 가리고 있으니 시안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주변만 맴돌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혹시 잘못 움직여서 마물과 부딪히기라도 하면 은신이고 뭐고 소용없어진다.
시안은 그때마다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어찌어찌 싸워서 몇 놈 정도는 해치울 수 있겠지만, 그러면 주변 놈들이 몰려드는 걸 피할 수는 없다. 그러니 속도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중앙 권역까지는 까마득히 먼 길이 남았다. 아레아가 주고 간 마력석은 처음에는 충분한 듯 보였으나, 이 정도의 속도면 턱도 없는 양이다.
‘이 허연 표범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시안은 괜스레 엘라가를 원망했다.
엘라가에 비하자면 약하기 짝이 없는 이곳의 마물은 두려워하면서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