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95
294
헬무트
294화
누군가가 손을 들어 물었다.
“어쩐 일입니까. 이렇게 급히 대신관들을 소집하다니.”
“원 참,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소집령이 떨어지자마자 귀환한 여섯 명의 대신관이 원탁을 가운데 놓고 앉아 있었다.
대신관. 그 거창한 명칭이 붙기에는 젊은 얼굴들이었다. 강력한 신성력으로 유지되는 젊음이다.
신전에서 펼쳐지는 원탁회의. 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회의였다.
신전의 세가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여기서 한 나라의 운명조차도 정해진다. 가장 고귀한 이의 목숨도, 신의 이름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이 원탁에서 수많은 결정이 내려졌으나, 단언컨대 이렇게 여섯 명의 대신관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1년에 한 번 이루어질까 말까 한 원탁회의.
이 원탁회의가 열리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였다. 이 세계의 존속과 유지를 위하여.
그것이 마왕 전쟁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루멘의 뜻이었다.
이들은 루멘의 힘을 이어받아 그 뜻을 따르는 자들. 비록 타락하고 부패하여 루멘의 빛나는 뜻을 제대로 승계하지 못한 자들이라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대신관 아가토는 엄숙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파헤의 숲에 이변이 발생했습니다.”
“이변이라면 어떤?”
“원인을 알 수 없는 모종의 흔들림이 발생한 직후, 신성 결계가 약화 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순간 원탁에 모인 이들이 술렁거렸다. 아가토 대신관이 확신하듯 덧붙였다.
“확실합니다. 신성 결계의 농도를 측정하고 있는 신전의 성물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영구적인 변화입니까?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입니까. 아니면 그 어떤 조짐입니까.”
“조짐이라면, 무슨 조짐이란 말입니까! 마왕이 부활하기라도 한다는 거요?”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지요. 천 년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기에 충분한 세월이 흘렀지요.”
“불경한 말씀이십니다. 루멘의 결계가 어떤 것인데!”
“하지만 실제로 결계가 약화 되었다지 않소?”
대신관 레비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대신관에 오르기 위한 조건은 신성력이다. 하지만 이중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아가토와 그녀 자신뿐인 것 같았다.
그들이 물론, 이중에서는 경력이 높은 축에 속하는 대신관이었다.
대신관 바오로 역시도 그랬지만, 그는 놀랍도록 탐욕스럽고 재물을 밝히는 성격이었다.
온몸에 금은보화를 휘어 감고 가장 값비싼 옷감으로 치장한 그자는 욕망을 제하고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니 ‘적당한 경험을 가지고 제대로 사고할 수 있는’ 대신관이란 둘일 수밖에.
그것은 둘이서 이 신전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대신관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높낮이가 없다지만, 더 핵심에 가까운 임무를 맡는 이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 때문에 아가토와 레비나는 그 어떤 대신관 보다도 빨리 신성 결계에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다.
‘우연인지, 몇 년 전 대신관이 둘이나 죽어 나간 데다가 이제 와선 신성 결계까지 흔들리다니. 예사롭지 않아. 무엇 하나 명확한 데 없이 불투명하구나.’
레비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대신관 두 명의 공백은 금세 메워졌다. 대신관 하나가 죽으면 다른 이가 대신관이 되어 그 자리를 채우게 되므로, 그 수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건 일종의 자연법칙과도 같았다. 루멘이 정한 섭리.
대신관이 살해당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는 일은 흔하진 않지만,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다. 대신관도 결국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4년 전처럼 간격을 좁게 두고 대신관 두 명이 연달아 죽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신관 돌로스야 독단적인 움직임 끝에 바소르에서 검성의 후손과 맞부딪혀 죽음을 맞이했다지만, 대신관 가스칼같은 경우에는 노상에서 그를 호위하는 병력들과 함께 실종되었다.
거기에 실마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그들이 있었던 숲은 대신관조차 읽어낼 수 없을 만큼 흔적이 깨끗이 지워진 상태.
짐작이 가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신전의 공적이 된 두 대마법사.’
대마법사 안티올과 대마법사 하이케. 그 둘 정도는 되어야 대신관을 살해하고 그토록 흔적을 깨끗이 지울 수 있었으리라.
추적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왜냐햐면 그 둘은 이미 신전의 공적이었고, 이제껏 추적할 수 없었던 이들을 새삼 추적할 방법은 없었으므로.
혐의는 혐의에 그쳤을 뿐이다.
왜 그들이 굳이 대신관 가스칼을 살해했느냐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대마법사인 그들에게도 대신관 가스칼을 제거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까.
신전의 공적이라곤 하나, 대마법사쯤 되면 신전의 추적을 피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을 잃은 건 신전의 큰 손실이야. 돌로스나 가스칼이나 문제 있었지만, 노련한 자들이었지.’
그들이라면 적어도 대신관으로서는 신전을 대표해 임무를 수행하거나 결단을 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둘, 특히 소아성애자 가스칼을 역겹게 생각하면서도 대신관 레비나는 대의를 생각할 줄 알았다.
애초에 대신관들은 신의 높은 뜻을 받드는 자들. 차가운 피가 흐른다고 할 만치 비정하고 냉철한 이성이 그들에게 요구된다.
몸 전체에 도는 신의 기운은 그들의 심장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극단적이고 비뚤어진 자극을 추구하는 자들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레비나의 기억이 문득 몇 년 전을 짚었다.
‘헬무트…… 라고 했던가.’
최초로 파헤의 숲을 탈출한 리노사 대공가의 소년. 그뿐만이 아니었다.
람피오네의 던전이 열렸고, 어둠의 싹 보유자가 미쳐 날뛰었다. 이 범상치 않은 일들이 모두 연결된 건지, 이 모든 것이 어떤 알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인 건지.
레비나는 새삼 의구심을 품었다.
‘뭔가가 벌어지고 있어.’
하지만 문제는, 그 뭔가의 정체에 대해서 그녀가 뚜렷이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알 수 있는 것도 하나 있었다.
‘신성 결계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대마법사 안티올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그는 결계를 연구하는 마법사니까.
하지만 그 헬무트란 소년도 어쩌면……. 만약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레비나의 추측은 옳은 방향을 타고 있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아가토 대신관이 입을 열었다.
“신성 결계의 약화가 영구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처할 수는 있지요.
신성 결계를 살피기 위한 조사단을 파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결계를 가급적 원래의 상태로 돌려놔야겠지요.”
문제가 생겼다면 보수하면 되지 않겠는가. 당연하고도 깔끔한 귀결이었다.
“파헤의 숲으로 가야 한다는 소리입니까?”
묻는 기색이 가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진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파헤의 숲 외곽에서 신성 결계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제가 가겠습니다.”
레비나가 냉큼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녀가 가기로 예정된 일이었다.
신성 결계가 약화된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도 좋겠지만, 대신관이 직접 신성력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결계는 강화된다.
아직 파헤의 숲으로부터 마기가 새어 나온 조짐은 없으니, 마왕의 부활을 논할 건 못 되었다. 방심할 수는 없으니 가서 문제를 제대로 살피고 올 참이었다.
대신관 아가토는 잠시 레비나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려운 임무입니다. 그러니 대신관 로물로도 함께 가 주었으면 합니다. 대신관 자리에 오르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아가토는 시선을 지그시 로믈로에게 박아 넣었다.
너보다 내가 더 경력이 높으니 따르라는 함의가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압박이었다.
로믈로는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당장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급한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레비나는 원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전에서 1순위로 중요시하는 것은 역시 파헤의 숲과 신성 결계다.
결론은 간단했지만, 대신관 모두에게 이 일에 대해서 주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원탁회의는 소집되어야만 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가 감히 원탁 회의를 방해한단 말인가? 대사제들의 표정에 불쾌감이 서렸다.
미간을 찌푸린 아가토가 허락의 말을 던졌다.
“들어오도록.”
여섯 명의 대신관의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사제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문안에 들어섰다.
그의 입에서 바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큰일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
[자……. 여기…… 내 영역…… 끝이다. 인간들……. 빨리…… 사라져.]중앙 권역에 가까워진 어디쯤인가, 칸트라는 멈춰 서서 헬무트와 아레아에게 말했다.
그는 장담한 대로 육지에서도 빨랐다. 칸트라는 사지를 퍼득거리면서 움직여 땅을 후벼 파는 듯이 미끄러지면서 숲을 뭉개고 길을 냈다.
어서 빨리 이 인간들을 쫓아내겠다는 일념으로 돌진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 덕에 헬무트와 아레아는 수월하게 북쪽 권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무리 소심쟁이에 겁쟁이라도 칸트라는 북쪽 권역의 지배자.
바다를 건널 때도 고요했지만, 육지에서도 다른 마물들은 씻은 듯이 찾아볼 수 없었다.
“좋아, 약속대로 살려 보내 주지.”
헬무트는 선심 쓰듯이 말하며 칸트라의 등껍질에서 뛰어내렸다. 아레아도 한 마디 던졌다.
“수고했어.”
그러자 칸트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수…… 고. 나 칸트라…… 인사…… 처음…… 들어본다.]칸트라는 눈을 빛내며 아레아를 쳐다보았다.
[너…… 내 땅과…… 닮았다.]아레아의 머리색과 은빛 빙판을 연결지은 모양이었다. 아레아가 어이없다는 기색을 떠올렸다.
“이 거북이가 뭐라는 거야.”
[그래도…… 또 오지는…… 마라. 검은 털…… 인간…… 특히.]칸트라의 시선이 헬무트를 돌아갔다. 원망스러운 눈초리였다.
[나…… 많이…… 아팠다. 목도…… 뚫리고……. 뛰느라…… 힘들었다…….]상처 때문에 피를 줄줄 흘린 데다가 거북이가 육지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려니 용을 썼을 터였다.
할 말이 없어진 헬무트는 잠시 후 인사를 꺼냈다.
“그래, 다신 오지 않을 테니 잘 살아라.”
어차피 파헤의 숲을 떠나면 다시 볼 일 없을 놈이었다.
칸트라가 몸을 돌렸다.
쿠과가가가!
요란한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잠시라도 바다를 떠나 있는 게 싫은 듯 칸트라는 왔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꽁지 빠지게 사라져 갔다. 왠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헬무트와 아레아는 잠시 칸트라가 사라져간 자리를 응시했다. 헬무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만 가자.”
그렇게 그들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중앙 권역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