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96
295
헬무트
295화
신전을 뒤흔든 그 사건이 전달되기 얼마 전이었다. 신전에서 공적으로 선포한 두 남녀가 한자리에 서 있었다.
‘두 남녀’라고 묶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한 명은 은발 머리카락의 화사한 미인이고, 한 명은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으니까.
대마법사 안티올, 그리고 하이케.
신전에서 공적으로 선포한 대마법사 두 명이 한 자리에 있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여인, 하이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이 순조롭게 된 모양이로군요. 결계에서 이만한 변화가 생겨날 정도면 신전에서 모를 수가 없겠지요.”
“적어도 결계 세 군데 이상에서 아다만티움을 가동하는 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그를 빨리 찾아낸 모양이야.”
하이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겠지요. 누구 손녀인데.”
안티올이 끌끌 혀를 찼다.
“운이 좋았던 거겠지. 파헤의 숲이 그리 만만한 곳인 줄 아나? 진입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확실히 빠르긴 해요. 좋은 조력자를 만났나 보군요.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이죠. 신전이 결계를 복구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놔 줘야지.”
하이케가 안티올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서자, 안티올이 그만큼 물러났다.
노골적으로 피하는 태도였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어디서 슬쩍 우리라고 묶는 것이냐.”
안티올은 ‘나 경계하고 있소’식의 눈빛을 드러냈다. 늘 여유롭고 허허거리는 그답지 않게 적개심마저 엿보였다.
하이케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나도 취향이 있어. 호호 할아버지한텐 관심 없으니, 그럴 필요 없답니다. 안티올. 그 모습으로 그러는 게 같잖고 불쾌하군요.”
하이케의 독설에 안티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외관에 신경 쓰지 않는 안티올은 하이케와 나란히 있으면 좋게 봐줘서 부녀 사이 같았다.
안티올이 그녀보다 열 몇 살 많기는 했지만, 나이가 많을수록 나이 차는 의미가 적어지는 법.
둘의 지위는 기본적으로 동등했다. 그들은 둘 다 다른 분야에서 강력한 입지를 세운 대마법사.
그러나 안티올이 하이케한테 이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너란 여자가 가리는 게 있기는 하더냐? 하필이면 신전을 상대로 못된 버릇을 보여서 제 자식조차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안티올이 호통을 치다시피 외쳤다. 그의 표정이 적나라한 비난을 드러냈다.
안티올은 괴짜라 불리는 마법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지식하고 엄격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하이케가 대마법사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다. 그 명예야말로 신전에 거스르며 자신의 길과 마법을 추구하는 안티올의 긍지였다.
똑같이 신전의 공적이 된 대마법사이지만, 하이케와 안티올의 사유는 전혀 달랐다.
하이케의 눈빛이 일순 매서워졌다. 안티올은 이번 건으로 마주치는 내내 저런 태도를 보였다.
그간 하이케가 안티올과의 갈등을 피했던 건, 그가 아레아를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지 어렵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다.
이젠 더 이상 그의 태도를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 점은 나도 후회하고 있어. 그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했던 건 나이니,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 당신이 함부로 지껄일 소리는 아니지요.”
“네가 후회라는 걸 하고 있다니 다행이로구나. 적어도 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안티올의 말투가 가라앉았다.
하이케의 눈매가 괴로운 듯이 일그러졌다. 이제는 무뎌졌다고 생각한 과거의 잔상이 뇌리를 스쳤다.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거야…….”
하이케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진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스물 몇 해 전의 일이다. 마법사로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신전의 성물이 탐이 났던 하이케는 그것을 빼돌리기 위하여 위험한 시도를 벌였다.
그때의 그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가 된 이래로 한 번도 실패다운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어서 기고만장한 데다가, 신전과 척을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터였다.
실패하면 슬그머니 발을 빼면 될 거 아닌가? 어차피 대마법사인 그녀를 신전에서 추적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대마법사인 그녀는 어지간한 신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정체를 감춰낼 수 있었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성기사단장 후보로 불리던 성기사 하나를 유혹했고, 그가 쉽사리 성물에 대한 정보를 내주지 않자 바로 다른 성기사를 유혹했다. 그녀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이케가 처음 유혹했던 성기사는, 그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분노에 빠졌다.
두 명의 성기사단장 후보는 그녀를 두고 결투를 벌였고, 그 결과로 참담한 사태가 벌어졌다.
실력이 비등했던 두 성기사가 결투 끝에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당황한 하이케는 갑작스럽게 흔적을 지우고 모습을 감추었다.
두 명의 성기사는 모두 당대의 성기사단장이 아끼는 이들이었다. 성기사단장은 곧장 그들의 죽음에 연관된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의 정체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알아냈다. 대마법사 하이케, 이 악랄한 마녀가 성기사 두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그것이 사실이 아니든, 상관없었다. 하이케가 모습을 감춘 이상 알 방법도 없었으니까.
하이케가 탐을 냈던 건 성물일 뿐, 성기사 둘이 싸우다 죽는 것을 바라진 않았다는 건 하이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성기사단장은 신전의 정보망을 총동원하여 그녀의 아들이 사는 곳을 알아냈다.
마법사인 하이케의 아들은 성년을 맞이한 이후로 방종한 하이케에게 질린 나머지 그녀와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내온 터였다.
아카데미 동기이자 마법사인 아내와 결혼하여 아레아라는 딸 한 명을 낳고 오순도순 살아왔다.
그런 그가 신전의 표적이 된 것은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성기사단장은 신전의 병력을 이끌고 그가 사는 곳으로 득달같이 덮쳐들었다.
겹겹이 싸인 포위망에 도망칠 겨를도 없었다.
하이케 정도는 아니지만 뛰어난 마법사였던 그녀의 아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신전의 병력이 들이닥친 그의 처소는 마을에서 동떨어진 숲에 있었다.
곳곳에 마법진과 함정이 도사린 그곳에서 마법사인 하이케의 아들은 아내와 함께 치열하게 싸웠다.
하이케의 아들과 아내는 성기사단장을 비롯하여 신전의 병력을 몰살시키며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성기사 두 명이 결투하다가 죽음을 맞았던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하이케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나 있었다.
눈에 들어온 것은 망가진 숲과 시신뿐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파내진 나무 그루터기 안쪽에 숨겨진 아레아.
“당신이…… 하이케로군요.”
하이케는 어린애에게서 그토록 차가운 눈을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소녀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그 자리에서 싸우던 모든 이들이 죽었고, 그녀는 신전을 향해 무엇을 할 의지를 잃었다. 이미 그녀는 아들 부부를 잃었고, 그 사실만이 뼈저리게 남았다.
비록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여 돌보는 어머니는 아니었을지라도, 아들은 하이케에게 유일하다시피 한 소중한 존재였다.
하이케는 자신이 지은 죄를, 아레아를 돌보는 것으로 갚고자 했다.
아레아는 알지 못하지만, 만약 하이케는 아레아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하이케의 삶은 아레아를 위해 살기로 정해졌다.
하이케는 최초로 그 이야기를 안티올에게 꺼냈다. 그녀의 낯빛에 슬픔이 서렸다.
“……그러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난 불장난을 했던 게 아니야. 나 역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 그저 나는 안일했고, 그 때문에 잃었던 것이지.”
하이케가 성기사 둘을 유혹하여, 가지고 놀다가 사고를 쳤다고만 알고 있던 안티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해, 말을 골랐다.
“……다행히 네 손녀는 멀쩡히 자라났더구나.”
“정말로 다행히, 그 아이는 나보다도 훌륭한 재능을 지닌 마법사지요. 그보다 이제 움직이는 게 어때요?”
그녀가 성기사 둘을 죽게 했고, 성기사단장은 그녀의 아들과 함께 죽었다.
비록 신전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지만, 새삼 그들과 부딪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피해왔던 충돌이 필요할 때다.
안티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세라와 함께 중앙 권역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수잔이 반색을 보였다.
가장 먼저 돌아온 건 역시 샤를로트였다. 아무리 엘라가가 빠르대도 하늘을 나는 이그렐보다 빠를 수는 없다.
“제가 처음이로군요.”
“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지.”
걱정스러운 낯빛의 수잔을 향해 이그렐이 입을 열었다.
[결계에 흔들림이 네 번 느껴졌어. 다른 녀석들도 무사히 성공한 거지. 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겠지만 말이야.]샤를로트가 이그렐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감사할 것까지야.]이그렐은 괜히 으흠거리며 대꾸했다. 마물 간에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인간들의 이런 의사표시는 왠지 모르게 간질거렸다.
샤를로트가 물었다.
“동쪽에 시안 선배가 있습니다. 그를 데리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그렐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근래 너무 돌아다녔더니 날개가 뻐근한데? 난 좀 쉬어야겠다. 너희들은 내 깃털이나 손질하도록 하려무나.]이 인간들이 떠나면 이제 깃털을 손질받는 일은 요원하다. 마물을 길들여서 써먹기도 힘든 노릇이고.
이그렐은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을 즐기기로 했다.
샤를로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예.”
그다음으로 돌아온 것은, 엘라가의 등짝에 매달린 아스카.
“우욱!”
부담스러운 소음으로 인사하며 그는 굴러떨어지듯 엘라가의 등에서 벗어났다.
내뱉은 엘라가는 그 직후 바로 동쪽의 시안을 향해 달렸다.
아스카가 신음을 냈다.
“아이고, 진짜 죽을 뻔했네.”
샤를로트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고하셨어요, 아스카 선배. 장시간 엘라가 님의 등에 매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지요.”
아스카가 그녀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홱 고개를 돌렸다.
“그, 그래. 당연히 쉽진 않았지. 너처럼 편히 날아간 게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이 몸은 끄떡없다고.”
샤를로트는 특유의 평온한 말투로 물었다.
“그럼 손은 필요 없으십니까? 좀 더 앉아 계실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왠지 모르게 샤를로트의 손을 확 잡은 그가 몸을 일으켰다. 샤를로트를 스쳐 지나가며 아스카는 툭 내뱉었다.
“너도 수고했다.”
‘어머, 이 둘…….’
수잔이 의심쩍은 듯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입을 열어 자신의 의심을 내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