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298
297
헬무트
297화
“그런 꿍꿍이였군. 어쩐지.”
시안이 탄식하듯 내뱉었다.
이그렐이 그렇게 성격이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순순히 협조하고 있는 게 이상하긴 했다.
단순히 엘라가에게 위축돼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런 꿍꿍이를 품고 있을 줄이야.
아레아가 설명한 결계를 뚫는 법에 대해선 이그렐도 들었던 터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 따르면, 이그렐이 함께 신성 결계를 뚫고 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이그렐도 그걸 파악한 것이다.
아스카가 목청을 높였다.
“무슨 미친 소리야. 권역의 지배자씩이나 되는 마물과 어떻게 함께 나가! 위험하게.”
놀랍게도 아스카는 가장 이타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이그렐은 능히 나라를 멸할 수 있는 마물이었다. 신성 결계라는 일정한 범위의 통제를 벗어나기엔 너무도 위험한 존재.
아무리 신성력이 마기에 강하다곤 해도, 이그렐은 새다.
인간이 닿지 못하는 상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이그렐이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신전에서 처치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그건 헬무트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파헤의 숲을 벗어나면 이그렐은 손대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이그렐이 고개를 내저었다.
[난 인간을 잡아먹지 않아. 자유를 꿈꿀 뿐이지. 나처럼 크고 빠른 새에겐 이 세계의 상공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닐 권리가 있어!왜 내가 파헤의 숲에서 태어났고, 마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여기 갇혀 살아야 하는 거지? 말해 보렴.]
자유를 제한당한 울분이 담겼다기보다는, 순수한 의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인간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말을 삼켰다. 위험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 해당하는 논리다.
그사이 생각을 마친 아레아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결계를 빠져나간다는 건, 남쪽 권역의 지배자인 당신에게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나는 헬무트, 저 아이가 파헤의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지. 결과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저 애가 부러웠어. 저 애에겐 적어도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었던 거잖아?그러니 헬무트는 시도할 수 있었던 거야. 그리고 성공했지.] [부러우면 너도 결계에 뛰어들면 됐잖아.]
엘라가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이그렐이 코웃음 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엘라가. 나는 신성 결계 주변을 오래도록 맴돌았지만, 알고 있었어. 남쪽 권역의 지배자라지만 내가 결계를 통과하려고 했다면, 내 몸은 그대로 재가 되어 버렸을 거야.] [하긴 나도 못 넘는 데 네가 넘겠냐. 주제 파악은 잘 하네.]엘라가의 도발에도 이그렐은 끄떡하지 않았다.
[저, 헬무트는 목숨을 걸고 파헤의 숲을 나갔고, 나는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에 대해 생각했지. 아주 오래.나는 평생을 파헤의 숲을 벗어나는 것을 꿈꿔 왔어. 이건 내 마생에서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라. 그러니 나는 이 기회를 잡아야겠어. 목숨을 걸어야 한 대도.] [또라이일 줄은 알았지만, 계획적인 또라이였잖아. 내 영역에 오자마자 내쫓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자,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엘라가는 이그렐의 비장함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받아넘기며 물었다.
이그렐과는 달리 엘라가는 표범답게 숲에서의 생활에 만족한 터였다.
날짐승과 길짐승의 생각은 다른 법이다.
게다가 엘라가는 한가한 이그렐과는 달리, 근래 들어 헬무트를 기르랴 수잔과 세라를 돌보느라 나름 바쁘게 살아왔다.
‘뭐, 저 녀석들이 사라지면 좀 무료하긴 하겠지만.’
이그렐이 끼어든다는 것에 별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엘라가를 향해, 헬무트가 입을 열었다.
“엘라가, 함께 나가자.”
[……응? 나는 왜.]살짝 당황한 엘라가는 눈을 끔뻑였다. 별소릴 다 듣는다는 것처럼. 시안도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헬무트, 아무리 너를 길러 주었다지만 그래도 엘라가 님은.”
다른 사람들도 난감한 듯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동안 엘라가와 함께 생활해 온 수잔과 세라의 표정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정이 많이 들었던 터다. 그녀들에겐 인간이 엘라가보다 더 위험한 존재였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엘라가는 통제 불능이라고 말할 수준의 마물이었다.
게다가 자그마치 파헤의 숲에서 가장 강한 마물이다. 미쳐 날뛰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나라 정도가 아니라 세계에 끼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을 멸망시킬 수준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그렐은 어쨌든 지상에서 상대할 수만 있다면 쪽수로라도 때려눕힐 수 있다지만, 엘라가는 헬무트조차도 쉽게 제압해 버리는 마물 중의 마물.
누군가가 그를 막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위험 때문에 파헤의 숲으로 쫓겨난 것이 헬무트였다.
그는 갓난아기였고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단지 그는 어둠의 싹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언젠가 이지를 잃고 미쳐 날뛰며 인간을 학살할 괴물로 취급받았다.
실상은 그가 미쳐 날뛰는 괴물에 맞서 리노사 대공과 대공녀를 구했음에도!
누구에게도 헬무트건 엘라가건 파헤의 숲에 가둬 둘 자격은 없었다.
엘라가가 강하기 때문에 파헤의 숲을 나갈 수 없는 게 당연하다면, 헬무트가 파헤의 숲으로 쫓겨난 것도 당연한 게 된다.
리노사의 사람들이 한 짓이 당연한 게 된다. 그가 배신당한 것이 당연한 게 된다.
헬무트는 그 논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모두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들었지? 너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니야? 난 마물이야. 자그마치 중앙 권역의 지배자! 인간들에게 난 엄청나게 위험한 존재라고.]엘라가가 뽐내듯이 말했다.
엘라가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파헤의 숲에서 잘 살 것 같은 표범이었다.
딱히 파헤의 숲에서 나가고 싶어하지도 않는 듯했다.
이그렐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헬무트의 욕심이다.
‘어쩔 수 없지.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엘라가니까.’
아레아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헬무트에게 엘라가는 아레아보다도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엘라가는 아무 조건 없이, 갓난아기였던 헬무트를 만난 이후로 그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줬다.
비록 말이나 행동은 거칠었지만, 그것은 진정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듯한 헌신이었다.
그러니 엘라가와 함께하는 것은, 헬무트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강력한 아군. 함께 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엘라가에도 파헤의 숲을 벗어날 유일하다시피 한 기회가 될 게 아닌가.
엘라가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닥치는 대로 인간을 잡아먹고 다니면 어쩌려고.]“그러지 않을 거잖아.”
헬무트의 반박에 엘라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가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여기 있는 녀석들은 딱 보기에도 맛없어 보이잖아.]“엘라가가 그랬지. 원한다기에 기껏 내보내 줬는데, 내가 망가져서 돌아왔다고. 그걸 보고도 또 내보내고 싶겠냐고. 나는 그렇다 치고 수잔과 세라는, 걱정되지 않겠어?”
그 말엔 엘라가의 눈이 흔들렸다.
‘하긴 칸트라만큼 강해졌대도 헬무트 이 녀석은 어리바리한 구석이 있지. 또 당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보다 약한 저 둘은 말할 것도 없지.
으흠, 안 되겠군. 역시 인간들이란 모자란 존재란 말이지. 계속 돌봐 줘야 해.’
엘라가는 헬무트의 논리에 설득당했다. 그 전엔 왠지 모르게, 헬무트의 권유를 들으면서도 나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뻐긴 터였다.
이그렐이 나가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서도 엘라가는 이상하게도 그랬다.
아마도 그의 본능에 걸리는 무언가. 그의 마성이 파헤의 숲에 머물 것을 말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헬무트의 말이 옳았다. 걱정이란 단어는 마물에게는 우스운 것이지만, 다른 단어로도 치환될 수 있었다.
무력감.
만약 이대로 파헤의 숲에 머문다면 엘라가는 헬무트나 수잔, 세라가 바깥에서 죽어 가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
그것은 엘라가도 원치 않았다.
[좋아, 나가지. 나가서 네 말대로 난 인간을 잡아먹지 않을 거다. 하지만, 신전인지 리노사인지 그것들은 이야기가 달라. 나한테 덤비기라도 한다면 그때는.]엘라가가 입매를 올리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먹어 주지.]“그럼 결정되었군요. 여기 있는 모두가 나가는 거로.”
아레아가 차분하게 결론지었다. 그녀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헬무트와 이야기를 해 본 터였다.
이그렐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끼어들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엘라가와 함께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라가라면 좋은 전력이 될 터. 게다가 이그렐이 함께 나가더라도, 엘라가가 함께 한다면 그를 통제할 수 있다.
마물은 그보다 강한 마물을 본능적으로 따르는 법이니까.
이그렐이 나간다면 엘라가는 무조건 함께 나가야 했다. 이그렐이 골렘을 부순 이상, 이그렐을 타고 날아가는 것이 그들에겐 최선이기도 했다.
그렇게 예상외의 인원이 둘이나 늘어났다.
다른 이들은 어쨌든 별다른 말 없이 그 결론을 받아들였다.
이그렐이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엘라가까지 함께 가다니! 나더러 저 덩치 큰 표범을 등에 싣고 날라는 뜻이야? 결계를 뚫기도 전에 힘이 다해서 추락하고 말걸! 아니, 그 전에 날아오를 수나 있나 모르겠네. 내 날개가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버릴 거라고!]엘라가와 이그렐의 몸집은 비등비등했다. 하지만 몸무게는 심히 차이 났다.
새는 기본적으로 가벼운 데다가 자기보다 훨씬 작은 짐승을 낚아채어 나는 법이다.
아레아는 미리 생각해 둔 듯이 입을 열었다.
“엘라가 님에게 경량화 마법을 걸 거예요. 마법에 저항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당신에게 마법을 거는 데는 마력이 많이 드니까요.”
[내가 얼마나 가벼워지는데?]엘라가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아레아가 대꾸했다.
“사람 한 명의 무게까지는 무리겠지만, 사람 다섯 명의 무게 정도까지는 줄일 수 있을 거예요. 그보다 균형을 잡는 게 더 중요하겠지요.”
덩치가 크니 이그렐 등에서도 면적을 넓게 차지한다.
게다가 홀로 인간 수십 명의 몸무게를 차지하고 있는 엘라가였다.
애초에 아레아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그 정도로 강하게 경량화 마법을 적용할 수 없다.
자신이 탈것을 자처했음에도 이그렐은 투덜거렸다.
[이미 일곱이 있는데, 다섯이 더해진다고? 아이고, 내가 하다 하다 저 표범을 등에 싣고 날아야 한다니! 엘라가, 너 내 등에 발톱 박지 마!] [뭐라는 거야. 누가 그렇게 작고 허약하랬나.] [누가 허약하다는 거야! 이 뚱뚱한 표범이!] [뚱뚱…… 하다고? 네 눈엔 이 날렵한 몸이 안 보이냐!]둘이 유치한 말타툼을 벌이는 와중에, 시안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여기 정령 마법사가 있습니다. 바람의 정령도 도움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