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
2
헬무트
2화
헬무트는 기억한다.
얼굴을 감싸오던 따스한 손길, 애처로운 눈으로 눈물 흘리던 그 여인을.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온화한 푸른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여인은 두 번 다시 불러 줄 수 없는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헬무트, 헬무트!’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게 자신의 이름이란 걸 깨달았다.
곧 거친 손길이 그를 어미의 품에서 강탈했다. 애절한 비명이 고막을 후벼 팠다.
포대기에 싸인 채 낯선 곳에 떨어지게 되기 전, 아이는 제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혀를 놀려 제 이름을 똑바로 발음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는 잊지 않고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헬무트야.”
기나긴 세월을 살아와 이지를 가진 표범, 엘라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건방진 놈이. 먹잇감 주제에 이름을 불러달라고?
“헬무트라고.”
해사한 얼굴로 아이는 고집스레 반복했다.
‘내가 왜 저걸 데려다 놓고 안 잡아먹었지?’
뭔가가 어긋나고 있단 걸 직감한 엘라가가 불만스럽게 으르렁거렸다.
눈앞에서 이를 드러내는 집채만 한 표범을 아이는 겁먹은 기색 없이 빤히 쳐다봤다.
여태까지 밥 주고, 따뜻한 잠자리를 주고 돌봐 왔던 표범이다. 으르렁거린대도 새삼 무서워지지 않았다.
엘라가가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앙!
그리고 잠시 후, 못 내키는 척 말했다.
-이 몸의 이름은 엘라가다.
“헬무트.”
“알았다고! 그래, 네 이름. 헬무트라고.”
아이는 왠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
헬무트는 묘한 아이였다.
어둠의 싹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일찍부터 지성을 깨우치고 보통의 인간 아이보다 빠르게 몸을 가누었다.
남다르게 성숙한 헬무트는 시끄럽게 울지도 않았고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새까만 눈, 머리와 대조적으로 흰 얼굴이 여자아이 못지않게 예쁘장했다.
밥 주는 이를 알아봤는지, 헬무트는 처음부터 이 위협적인 거대 표범에게 이상하게 살가웠고 그를 졸졸 따랐다.
쏘다니면서 사방을 관찰하거나 놀다가 졸리면 엘라가가 위협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그의 털가죽에 꼭 붙어서 잤다. 엘라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할 정도로 적응을 잘하잖아?’
아마 타고나길 그런 성격인 것 같았다.
‘뭐, 귀 따갑게 울지 않으니 다행이지.’
엘라가는 맘 편히 생각했다. 눈 시뻘건 마물들만 상대하다 보니 조그맣고 연약한 인간 아이가 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가끔 취향 독특한 마물들 중에 예쁘거나 색이 희귀한 작은 마물을 기르는 녀석도 있다.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귀여우니까.’
조그만 게 꼬물대며 하는 짓을 지켜보자면 흐뭇하게 입가가 풀어지는 것이다. 바닥을 기어 다니던 녀석이 어느덧 뛰어다니게 되자 뿌듯한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엘라가는 헬무트의 입이 트인 순간부터 조금 귀찮았던 녀석이 실은 아주 귀찮은 녀석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먹을 걸 던져 주면 던져 주는 대로 먹고 졸리면 자는 점은 편하다.
하지만 무럭무럭 자라난 헬무트는 엘라가에게 희박한 다정함이나 애정을 바라진 않았지만 다른 걸 바랐다.
헬무트는 궁금한 게 많았다. 그는 언젠가부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퍼부었다.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예를 들어…….
‘엘라가는 왜 털이 그렇게 많아?’
밤이 되면 추운지 몸을 움츠리던 헬무트가 어느 날 엘라가의 하얀 털을 쓸어 보며 물었다.
엘라가는 매일 정성껏 고르는 제 털을 뽐내면서 답했다.
‘난 표범이니까.’
‘표범은 왜 털이 많아?’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서지.’
‘그럼 왜 난 털이 별로 없어? 추운데.’
‘넌 인간이니까.’
‘인간은 왜 털이 없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귀따갑게 그만 좀 물어봐!’
대화는 이런 식으로 결국 엘라가가 버럭 성질을 내고 나서야 끝났다. 마물인 엘라가에게 아이를 상대해 주는 인내심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하지만 헬무트는 굴하지 않았다. 그 후로부터 유일한 대화 상대인 엘라가를 틈만 나면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댔다.
‘엘라가! 이건 뭐라고 하는 거야?’
‘엘라가, 이거 먹는 거야?’
‘엘라가, 엘라가는 왜 이름이 엘라가야?’
-크아아아앙!
성질을 부려도 협박을 해도 안 먹히는 상대. 스트레스로 자랑하던 털마저 숭숭 빠지자 엘라가는 나무 위로 올라가 표효했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속 터져 뒈지겠다!’
그날, 엘라가는 결심했다.
‘빨리 앞가림하게 만들어서 내다 버려야지.’
하지만 헬무트가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진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인간 아이의 성장은 더뎠다. 기다가 걷기 시작하여 몸을 좀 가눌 수 있을 때까지 세월은 굼벵이처럼 흘렀다.
내버려 두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녀석, 꼬박꼬박 먹이를 먹여야 한다. 그리고 질문을 쏟아내며 그를 귀찮게 한다.
그 배움 또한 성장의 일환이라는 것을 엘라가도 알았다. 인간은 그렇게 앎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다.
하지만 엘라가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는 기나긴 육아의 순환고리 속에서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을 맛보았다.
엘라가는 마물이었다. 그리고 마물은 아이를 잡아먹지 돌보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헬무트를 돌봤다. 왜냐고? 왠지는 모른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을 뿐.
흐름이란 때때로 강제성을 띤다. 엘라가도 육아의 족쇄에 나날이 익숙해졌다.
콩만 한 게 제법 자라났다. 한입에서 조금 더 큰 한입 정도로.
어느 날, 열 살이 된 헬무트는 엘라가에게 말했다.
“나도 이제 사냥해 볼래.”
‘사냥할 줄 알게 되면 자기 먹을 건 자기가 챙길 수 있겠지?’
-그래.
엘라가는 흔쾌히 수락했다.
*
표적은 어렵잖게 정할 수 있었다. 엘라가의 광대한 영역에는 크고 작은 마물들이 공생하고 있으니까. 엘라가의 암묵적인 허용 덕분이다.
파헤의 숲은 넓지만, 마물들은 신성 결계가 제한하는 영역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강한 놈들이 서로 떵떵거리고 자리를 독점하고 나면 약한 놈들은 살 곳이 없어지니까 자연스럽게 영역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넓은 영역을 지배할 만한 강력한 마물들은 서로를 경계했지만, 영역은 맹수와 맹수가 다투는 것이지 거길 드나드는 새나 쥐 같은 것들과는 무관한 문제다.
물론 엘라가의 영역이 평화로운 목장으로 보여선 안 됐다. 파헤의 숲에서 얕보임은 곧 도전을 부르니까.
들짐승이 변모한 마물들은 좋은 식량 수급원이었다. 엘라가는 놈들을 사냥해서 헬무트를 먹여 키웠다.
열 살의 헬무트는 파헤의 숲에 대해서 잘 알았다. 특히, 자기 자신이 파헤의 숲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엘라가가 냄새를 묻혀 놓지 않았다면 잡아먹혀 뼈도 남지 않았을 거다.
어둠의 싹을 가졌다고 해 봐야 열 살 소년,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사냥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사냥할만한 놈도 있지.’
헬무트는 계획을 짰다. 사냥해 본다는 건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다.
엘라가는 멀찍이서 지켜봤다. 사냥하는 모습은 많이 보여줬다. 신체적 차이가 엄청나다지만, 헬무트도 요령은 알 것이다.
헬무트는 나무 위에서 기다렸다. 그 아래에 종종 나타나 풀을 뜯는 마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슬그머니 나타난 마물이 풍성한 수풀에 탐욕스럽게 고개를 묻었다.
‘지금!’
헬무트는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 표적을 깔아뭉갰다. 퍽!
-캬, 캬아아아악!
괴성이 고막을 따갑게 찔렀다. 몸집이 거대하고 생긴 것도 토끼라고 하기엔 흉측하다. 나무만 한 몸통에 날카로운 이빨.
‘방심했다가 물리면 뼈까지 뜯기겠지.’
목덜미에 진땀이 죽죽 흘렀다. 헬무트는 엘라가의 앞발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단단한 손으로 표적의 목덜미를 힘껏 내리눌렀다. 이곳이 약점이다.
-키엑, 키이이이이!
발버둥 치는 힘이 엄청났다. 이제 갓 열 살이 된 헬무트가 더 버티는 건 무리였다.
‘빨리 숨통을 끊어야 해.’
헬무트는 재빨리 손을 뻗어 뾰족한 돌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발버둥 치는 토끼의 머리통을 힘차게 내리찍었다.
콰직! 무표정한 얼굴에 피와 뇌수가 섞인 액체가 튀었다.
즉사. 부르르 경련이 일며 토끼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헬무트는 침착하게 죽은 몸체를 뒤집었다. 성공적인 첫 사냥이었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새카만 눈동자가 숨이 끊어진 토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비켜 봐.
저쪽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던 엘라가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헬무트가 비켜서자 엘라가는 발톱을 세우고 토끼의 가슴을 쭉 갈랐다. 왈칵 솟구친 피에 바닥이 흥건해졌다.
헬무트는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엘라가가 날카로운 발톱 끝으로 토끼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를 슬슬 굴려서 꺼냈다.
둥그런 형태의 아주 작은 구슬. 암흑을 잘라 담은 듯 불길하게 검었다. 이제껏 엘라가가 사냥한 즉시 먹어 버렸기에 헬무트가 이걸 본 건 처음이었다.
-봐, 이게 핵이야. 이걸 먹으면 힘도 세지고 세월이 지나면서 몸에서 빠져나가는 정기를 보충해서 수명도 길어진다. 이 녀석은 작고 약한 놈이니까 이만한 크기밖에 안 되지만.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첫 사냥물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어딜?
꼬리를 휘둘러 헬무트를 퍽 쳐낸 엘라가가 구슬을 날름 집어삼켰다.
“무슨 짓이야!”
졸지에 나동그라질 뻔한 헬무트가 불만스레 그의 털을 움켜쥐었다. 엘라가가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왜, 먹여 주고 키워 줬는데 이 정도도 못 주겠냐? 아깝냐?
“달라고 했으면 되잖아!”
-그랬으면 네가 열심히 사냥하지 않았겠지.
태연한 대꾸에 헬무트가 얼굴을 실룩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엘라가는 비죽거리며 웃었다.
‘약이 올랐구만.’
평소에 긁는 건 헬무트였고 성질내는 건 엘라가였다. 반전된 지금 상황이 기분 좋았다.
-넌 인간이잖아. 이런 거 먹고 마물이 되면, 숲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어쨌든 가장 큰 이유는 그거였다. 일부러 헬무트를 골려 주려고 한 짓은 아니다.
엘라가는 왠지 쓸쓸해지는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그를 멀뚱히 바라본 헬무트가 숨이 끊긴 토끼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고기는 그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