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0
29
헬무트
29화
마물 출몰 지대를 한 번의 습격도 없이 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한 놈들은 눈치만 봤지만, 덩치도 크고 강한 놈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랜만에 먹잇감들이 잔뜩 굴러들어 왔는데 순순히 보내 준다면 놈들이 마물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으리라.
마물에게 인육처럼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고기가 또 없었다.
노련한 용병들도 종일 긴장감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대낮에, 막 점심을 들고 나면 살짝 느슨해지기 마련이었다.
행렬의 중간쯤에서 타리크 용병단의 3급 용병이 물병을 거꾸로 뒤집다시피 탈탈 털어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물이 안 나와?”
투덜거리며 목을 위로 높게 꺾은 순간, 새카만 그림자가 시야를 덮었다.
‘뭐야?’
검을 빼 들 여유도 없었다. 저 위, 나무 그늘에서 떨어진 뭔가가 섬광처럼 그자를 덮쳐들었다.
쿵!
순식간에 무방비 상태의 목을 물어뜯은 마물이 우적우적 소리를 내며 씹었다.
끔찍한 액체가 후드득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물이다!”
“오, 맙소사! 빌리가!”
목이 반쯤 사라진 빌리는 이미 숨이 끊겼다. 마물의 잇새에서 피와 살점이 섞여 흘러내렸다.
거대한 원숭이 같은 모습의 기괴한 마물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얼굴은 보랏빛이었다.
놈에게서 마기가 흘러나와 부옇게 퍼져 나갔다. 마기의 방출을 이뤄 낼 수 있을 만큼 강한, 바깥세상에서 보기 드문 마물.
흡족한 듯 입꼬리가 올라간 놈의 얼굴이 꼭 그들을 비웃는 것 같았다.
“으아아악!”
동료의 죽음을 보고 흥분한 한 용병이 다짜고짜 검을 뽑아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만둬!”
“그렇게 막 달려들면!”
-키에엑!
날카로운 괴성이 울려 퍼졌다. 마기가 담긴 소리가 몸을 마비시켰다.
저를 향한 검을, 놈은 마기가 깃든 손톱으로 가볍게 퉁겼다. 그리고 반탄력에 휘청거리는 용병의 품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콰직!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손이 근육으로 단련된 용병의 몸을 종잇장처럼 꿰뚫고 빠져나왔다. 심장과 함께.
새빨갛게 펄떡거리는 심장을 끄집어낸 놈이 장난감을 다루듯 그걸 손아귀에서 통통 튀기며 키득키득 웃었다.
놈은 살인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얕보고 있었다. 이 많은 수의 용병들을!
앞에 선 용병들이 긴장감으로 꼿꼿하게 굳었다. 사지가 떨렸다. 눈앞의 끔찍하고 잔인한 풍경이 공포심을 돋웠다.
이 강력한 마물 앞에선 훈련된 용병들은 한낱 초식 동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이만한 마물은 경험 많은 용병도 만나 본 적이 드물었다.
마물 출몰 지대로 접어든다는 사실에 걱정을 좀 하긴 했지만, 그래 봐야 이 많은 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덤비진 못할 거라고 봤다.
‘너무 안일했다.’
저만한 마물이 살고 있을 줄 알았다면 이리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정보가 적은 숲이었다. 마물이 많긴 하지만 지날 만하다고 판단했던 게 실수였다.
-키이이이.
마물이 손에 쥔 심장을 사과 씹듯이 씹어 먹었다. 까득까득. 새까맣고 뭉뚝한 발톱과 얼굴에 피가 흥건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놈이 가슴이 뻥 뚫린 시체를 숲 쪽으로 집어 던졌다.
붕 떠서 공중으로 날아간 시체가 바닥과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질린 듯이 중얼거렸다.
“제 부하들에게 나눠 준 거로군.”
주변에서 마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포위하듯 마차 주위로 몰려드는 다수의 마물!
놈이 느긋하게 식사하는 사이 행렬의 대열도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타리크 용병단 2급 용병 둘이 선두에 나서고, 퓌엔이 가세했다. 그들이 머리고, 나머지 3급 용병들은 날개였다.
마차를 등지고 싸운다. 본격적인 전투태세다.
“마차 밑에 들어가 있어! 괜히 나대지 말고!”
무섭게 굳은 얼굴의 타냐가 턱짓했다. 마차는 다섯 대. 습격은 두 번째 마차 근방에서 일어났다.
모든 광경을 지켜본 핀이 오들오들 떨며 다섯 번째 마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헬무트도 잠시 망설이다가 핀을 따라 밑으로 들어갔다. 마차의 높이는 성인 남자의 하체 높이 정도로 낮았다.
“검을 빼 들고 있다가 기어들어 오려는 놈을 찔러.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타냐가 충고하며 다른 용병들에게 눈짓했다. 진형을 맞춰 보는 거다. 여차하면 4급 용병들을 신경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정중앙의 마차엔 마일즈와 상회 사람들이 타고 있다. 그의 마차는 다른 마차보다 유독 튼튼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의뢰인의 안전이 우선이다.
여차하면 다 버리고 3번째 마차만 이끌고 달려가 버리는 수도 있었다.
“헬무트, 핀!”
“네.”
대답한 건 헬무트였다. 핀은 이미 공황 상태였다.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헬무트는 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정신 차려.”
사실 좀 사심이 들어갔다. 그동안 몇 번이나 때려주고 싶었던 녀석이니까.
“무슨 짓이야!”
세게 한 대 얻어맞자 핀이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다. 그는 부리나케 검을 뽑아 들었다.
“아오, 무슨 이런 지랄 맞은 상황이 있냐. 아이씨, 첫 의뢰부터 저세상 가는 거 아니야?”
중얼대는 걸 보니 정신이 돌아왔다. 헬무트는 마차 밑에서 살짝 고개를 빼고 침착하게 바깥 상황을 파악했다.
‘저 정도 녀석이면 지능도 있을 텐데 밑에 마물을 부릴 줄도 알겠지.’
정직하게 달려들기보다는 치고 빠지며 힘을 빼놓으려고 할 것이다.
이 정도로 많은 수라면 이 일행을 모조리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만의 포식을 기대한 마물들이 붉은 눈을 빛냈다. 밝게 내리쬐는 햇볕도 무색하게 하는 짙은 안광이다.
마물과 질릴 만큼 싸워 본 그로서는 핀이 벌벌 떠는 게 좀 한심하기도 했다.
우두머리인 저 원숭이도 덩치가 그리 큰 편이 아니고 움직임이 눈에 보일 정도다.
헬무트는 나호라는 마물 중의 마물을 만나 봤다. 놈의 흉악한 생김새에 비하자면 저 정도는 앙증맞은 수준이다.
‘한 번 나서 볼까?’
헬무트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검은 눈동자에 예리한 빛이 서렸다.
사실 그로선 마물보다는 인간 쪽을 상대해 보고 싶었지만, 계산 속이 있었다.
모닥불 가에서 자기 전에 용병들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던 것이다.
‘위기 때 활약하면 급료를 더 쳐준다던데.’
급료가 깎였다고 핀이 아쉬워했었다. 그때는 헬무트도 별생각 없었지만 이왕이면 돈을 더 받는 쪽이 낫지 않은가. 인간 세상에서는 돈 쓸 일이 많다고 하니까.
여행 경비가 필요한 헬무트로서는 일을 맡았을 때 많이 벌어두는 게 좋다.
3급 용병을 한 방에 죽인 마물을 상대로 싸우는 건 4급 용병이 할 일이 아니었다. 급료 이상의 일을 하면 보너스가 주어지는 건 당연하다.
마일즈도 그런 면에서는 박하지 않았다. 뭣보다 아직 급료도 받지 못했는데 돈 줄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몸 상태는 좋아.’
파헤의 숲에서 나오는 길 내내 마물을 베다가 이렇게 수련만 하고 있으니 몸이 근질근질한 참이다.
하지만 헬무트는 좀 더 상황을 두고 보기로 했다.
‘켈롭이 내 실력을 알면 시비를 걸지 않을 테니, 조금 참아 보지. 이들이 싸우는 모습도 궁금하니까. 여차하면 세 번째 마차 쪽으로 움직인다.’
-키에에에엑!
원숭이 마물이 가슴을 내리치며 괴성을 내지르는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쾅! 콰직! 쿠과쾅!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핀은 핏발이 설 만큼 눈을 부릅뜨고 마차 밑에서 웅크렸다.
2급 용병 세 명이 선두로 나서서 우두머리를 상대하자 용병들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중심이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 전투 의지를 다잡아 준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고 나자 익숙해진 대로 몸이 움직였다.
용병들은 호흡을 맞추어 두세 명씩 한 마물을 집중 공격하여 잡아 냈다.
확실히 타리크 용병단보다는 페이스 용병단 쪽 용병들이 같은 3급이라도 호흡이나 움직임이 더 좋았다.
‘이대로면 내가 나설 필요 없이 끝나겠는데.’
작은 원숭이나 박쥐 형태의 마물들은 중구난방으로 날뛰었다. 무리 지어 달려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제멋대로였다.
그에 반해 확실히 인간들의 전투 장면은 인상적이다.
육체의 강인함과 회복력을 믿고 덤벼드는 마물과는 달리 몸도 약하고 상처 입으면 잘 낫지 않는 인간들은 신중했다.
최소한의 손실로 틈을 노려서 적을 베어 내려고 한다. 그런 훈련된 움직임은 허점을 보일 가능성이 적다.
또한 서로의 사각을 보충하는 움직임. 두셋씩 대열을 이루어 싸우니 마물들은 단단한 방패에 맨몸으로 부딪쳤다가 깨지는 형국이었다.
‘확실히 인간의 강함은 재어 보기가 힘들어.’
타냐에게 지긴 했지만, 용병들의 몸에 깃든 비스가 적다 보니 그들을 낮잡아 봤던 헬무트였다.
저 많은 마물들을 상대로 고전하리라고 생각했건만, 전투의 흐름은 생각과는 달랐다.
헬무트의 곁에 있었던 유일한 인간은 다리언이었다. 몸속에 어마어마한 비스를 품고 있었던 인간. 어떤 인간을 보든 자연스레 그와 비교해서 보게 되는 것이다.
‘역시, 다리언의 말대로 인간들을 얕봐선 안 되겠어.’
헬무트가 계속 고개를 빼고 바깥을 구경하자 핀이 옆구리를 찔렀다.
“야, 야! 우리 여기 있는 거 들키면 안 된다고. 뭐하는 짓이야!”
“거의 끝났어.”
꽤 많은 마물이 처치되거나 상처를 입고 도망쳤다. 용병들도 지치긴 했지만 이 정도면 공세를 거의 막아 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다만 아직 건재한 놈도 있었다. 우두머리 마물.
거대 원숭이는 나무 뭉치를 뽑아 휘두르며 성을 내고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살이 으스러지고 뼈가 부러질 위력이었다.
하지만 2급 용병들은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놈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포위를 유지하며 조금씩 상처를 냈다. 그 때문에 놈은 약이 오른 것 같았다.
막상 2급 용병들도 상황이 좋은 건 아니었다. 체력이라면 저쪽이 우월하다.
기회를 봐서 일격을 가해야 하는데, 놈은 사람 머리를 한 손으로 터뜨릴 만큼 굉장한 완력을 가졌고, 움직임도 빨랐다.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죽는다. 살 떨리는 상황이었다.
놈도 자기 부하들이 죽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나머지 3급 용병들이 싸움에 가세하면 불리해진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 마물은 결국 신경질적으로 나무 뭉치를 집어 던졌다.
-키아아악!
뜻대로 풀리지 않자 잔뜩 화가 난 눈치였다. 적이 몇이나 되는지 세어보듯 인간들을 쭉 훑어보던 놈의 시선이 문득 멈추었다.
마차 아래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두 개의 검은 눈. 어쩐지 본능을 자극하는 눈빛에 마물은 눈을 가늘게 떴다.
-키에에?
하지만 2급 용병들은 놈이 여유 부리게 놔두지 않았다. 퓌엔의 검이 마물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놈을 쳐내면 옆구리 쪽에서 다른 두 명이 치고 들어올 것이다.
마물은 그 자리에서 바로 위로 뛰어올랐다.
쿵! 바닥을 딛고 뛰어오른 몸은 새가 날아가듯 엄청난 추진력으로 치솟았다.
두 팔이 하늘까지 치솟은 나뭇가지를 콱 움켜쥐었다.
마물은 나무를 타고 건너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추적할 엄두를 낼 수 없는 속도였다.
“끝났나.”
퓌엔이 혀를 차며 놈이 사라진 곳을 노려봤다. 남은 마물들도 우두머리가 내뺀 걸 눈치챘는지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팽팽히 곤두선 신경 줄이 놓였다. 퓌엔도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전투를 해 본 건 오랜만이었다.
두 명의 용병이 죽었다. 페이스 용병단의 소속이 아니라고 해도 같은 용병이다. 시체도 온전하지 않은 그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함께 싸운 타리크 용병단의 2급 용병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그는 바로 페이스 용병단이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사상자는 없나? 다들 상태는 어때.”
타냐가 보고 했다.
“괜찮아, 우터가 팔이 살짝 긁히긴 했는데 독은 없는 것 같아. 다들 지쳤지만 멀쩡해.”
씩 웃으며 그녀가 가장 위험한 임무를 도맡은 퓌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 많았어.”
퓌엔의 얼굴에도 얼핏 미소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