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03
302
헬무트
302화
5. 길 앞에서.
아레아가 하이케에게 연락을 취한 건, 동쪽에 거의 다다른 후였다.
하이케의 예상과는 달리, 아레아 일행은 결계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레아가 약속했던 대로 바로 연락하지 않았던 것엔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신전에서 결계에 접촉했다면 하이케와 안티올이 그들을 막지 못했다는 뜻이지.’
그 말은 즉,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사로잡혔을지도 모르고.’
아레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건 걱정 따위가 아니다.
파헤의 숲에서 최상의 상황과 최악의 상황을 연달아 겪었다. 바깥에서 뭔가 계획이 틀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이케는 요령이 좋은 편이지만, 신성 결계에 대해서는 신전에서도 총력을 기울일 테지.’
파헤의 숲에 들어선 순간, 하이케와의 모든 연락이 끊겼다.
만약 하이케가 사로잡힌 상황에서 아레아가 연락을 취하면, 그녀는 더 위험해질 수 있다. 아직 그들은 아레아의 존재를 모르니까.
‘동쪽에 도착할 때쯤 되어서 시도해 보지.’
아레아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하지만 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이그렐은 확실히 속도가 느려졌다.
엄청난 무게의 짐을 싣고 날고 있는 이그렐에게 불평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땅이 간절히도 그리웠던 엘라가는 전혀 상관치 않고 이그렐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 속도로 날아서 파헤의 숲 밖 하늘을 누비긴 뭘 누벼!] [시끄러워! 마지막 순간까지 벌벌 떨고 있던 주제에! 그리고 여기는…….]이그렐의 말에 따르면 파헤의 숲의 대기는 날아다닐 때 저항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이그렐이 마물이라서가 아니라 파헤의 숲 대기 자체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성 결계로 말끔하게 정화된 이 상공을, 오히려 신성력을 미미하게 느끼며 날아가야 하는 이 상황에서 이그렐이 원래의 속도를 내기는 힘든 것이다.
등 위의 짐도 무거운 데다가, 이그렐도 결계를 뚫느라 마기를 많이 썼다. 그들을 떨구지 않는 것도 그 나름의 의리였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 많아!]이그렐이 확 신경질을 부리자, 엘라가도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엘라가가 이그렐보다 강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그렐이 몸을 뒤틀고 난리를 치면 엘라가는 신성 결계 위로 떨어져서 죽을지도 모른다.
마물에게 의리란 없으니, 여기서 섣불리 이그렐을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다.
엘라가와 달리, 현실 파악을 하고 있던 아레아가 입을 열었다.
“이그렐 님의 노고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인간. 너는 누구와는 달리 말을 예쁘게 하는구나.]그 후로 말다툼은 소강되었다. 그들은 조용히 동쪽을 향해 날았다.
조금 더 고도를 내리기 위해 살짝 남쪽으로 틀어서 동쪽을 향해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날고 있었으나, 상공은 얼어붙을 듯이 추웠다.
마물인 엘라가나 이그렐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지만, 다른 인간들은 오들오들 떨어야 했기에 아레아는 엘라가의 무게를 낮춘 직후 전체적으로 바람을 막고 온도를 보존하는 결계를 설치했다.
이그렐을 띄워 올리느라 죽도록 힘을 쓴 시안과 달리 아레아는 좀 더 여력이 있는 편이었다.
신성 결계를 나온 다음부터 마법을 쓰는 게 족쇄를 벗은 것처럼 훨씬 수월해졌다.
‘이 정도로 높은 장소에서는 괜찮겠지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분명 눈에 띌 텐데.’
엘라가와 이그렐의 덩치를 숨기기 위해서 은신 마법도 걸어야 했다.
최소한의 조치가 끝나고 나자 아레아는 뒤늦게 하이케에게 생각이 미쳤다.
‘예정대로 연락하지 못했는데, 걱정하고 있을까?’
하이케는 평소 아레아를 돕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듯이 말했다.
아레아에게 딱히 애정을 보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저 아레아가 결계를 빠져나오는 것을 실패했을 거로 추측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뭐, 안티올과 싸우지 않고 있으면 다행이지.’
아레아는 그것으로 고민을 끊었다.
어쨌든 비행은 안정적이었다. 낮이 지나고 밤이 내려앉자 모두들 고소 공포증이고 뭐고 잊고, 몸을 줄에 묶은 채 잠들었다. 다들 긴장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피곤한 것이었다.
엘라가 역시도 어느새 고르릉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가 소진한 마기는 주변에 마기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느릿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정도 마물쯤 되면, 주변이 아무리 적대적인 환경이라도 힘을 회복할 수 있는 모양이다.
이그렐이야 애초에 잠들 수 없다지만, 잠들지 않은 이들은 몇 없었다.
아레아가 헬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들지 않고, 생각에 잠긴 채 저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무언가가 있는 듯이.
“헬무트, 무슨 생각해?”
“내가 파헤의 숲을 또다시 나오게 될 줄은 몰랐어.”
“앞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봤어?”
이번 질문에 헬무트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의 검은 눈이 아레아의 보랏빛 눈과 맞닿았다.
그는 잠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복수를 바란다면…….”
그래서 피를 뿌리기를 원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건가. 헬무트는 그것을 묻는 듯이 아레아를 쳐다봤다.
아레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둘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네가 나를 구했으니까.”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건만, 그가 완전히 잃지 않은 것들은 다시 헬무트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새로운 시작.
하지만 그가 복수를 택한다면, 그 시작의 길은 또다시 뭔가를 잃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헬무트는 지금 손에 쥔 것들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지독한 절망을 겪었고, 그 절망은 치유되었을지라도 잔흔을 남겼다.
그런 경험은 단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헬무트는, 아레아를 잃는 길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함축한 말은 짧았으나, 아레아는 알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넌 뭐랄까, 나를 너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네가 나한테 도덕을 가르쳐 줬잖아.”
“뭐? 하하! 그랬지. 예전에 내가 너한테 과외를 해 줬었지. 그때는 정말 답답했는데.”
“난 잘 배웠어.”
“그래, 왕년의 검술학부 수석! 아무튼 들어 둬.”
아레아는 손가락을 척 치켜들며 말했다.
“네가 무고한 이들을 살상한다면, 나는 그것을 막아설 거야. 하지만 리노사는 달라. 네겐 복수할 자격이 있어.”
단순히 어머니가 아들을 버렸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헬무트가 리노사 대공과 대공녀를 구했건만, 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그 때문에 힘을 잃은 그를 신전에 밀고하고 파헤의 숲으로 추방해 버렸다.
“네가 복수한다면, 나는 네 등을 지킬 거야.”
그들을 베는 건 어디까지나 헬무트의 몫이니.
헬무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리노사는 신전과 친밀해.”
“하이케도 신전의 공적인데, 나라고 공적이 못 될 건 뭐가 있겠어? 나는 신성 결계를 지나서, 어둠의 싹 보유자를 구해 왔어. 이 사실을 신전이 알게 된다면,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이내 아레아는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너는 복수를 바라고 있는 거야?”
보통 배신을 당한 이들이 그렇듯, 그도 파헤의 숲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리노사를 넘어 신전까지도 모조리 불사르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헬무트는 잠시 후 대답했다.
“……내가 뭘 바라는지 모르겠어.”
헬무트는 원래 감정에 기복이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 배신에 대해서, 그가 뭔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파괴적인 살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헬무트가 당장에라도 검을 들고 리노사에게로 달려가고 싶어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엘라가라면 자기가 도와줄 테니 어서 복수하러 가자고 신나서 떠들겠지만.’
아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있지, 헬무트. 들어 봐.”
보랏빛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띠었다.
“너는 복수해도 돼. 쉬운 일은 아닐 테고, 위험해질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하는 거야.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레아는 단호하게 잘랐다.
“억지로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일 건 없어. 너는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면 돼. 나는 너를 도울 테니까. 그리고 당장 무언가를 결정할 필요는 없어.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생각해 봐.”
“그러지.”
결정을 내리게 되면 아레아에게 가장 먼저 말할 터였다.
헬무트는 문득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갔다.
복수를 원치 않기에 숲을 나가지 않는다던 다리언이었다.
그는 파헤의 숲을 나가면 그가 응당 복수를 해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죄가 있는 자는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이 다리언의 정의였다.
어찌 보면 다리언은 자신의 정의가, 자신의 마음보다 중요한 자였다.
베고 싶지 않더라도, 만약 루투스 키케로를 마주하게 된다면 다리언은 그를 벨 것이다.
검사로서의 신념과 정의에 대한 의지. 그 때문에 다리언은 고독했고, 그만큼 굳건했다.
그래서 그는 파헤의 숲을 나가지 않는 것을 택했다.
헬무트에게처럼 누군가가 그를 구하러 오더라도, 바소르가 망하고 있다는 정도의 명분이 아니라면, 다리언은 파헤의 숲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헬무트는 달랐다. 다리언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에 반하는 것을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하나는 확실했다.
‘내 마음이라…….’
생각하다 보면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게 될까?
그것은 헬무트로서도 아직은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
동쪽 끝에 도착할 무렵, 아레아는 하이케에게 연락을 취했다. 바로 눈앞에 원형의 불투명한 영상이 그려졌다.
[아레아! 무사한 거니? 너 어디야?]하이케에게서 그렇게 다급한 목소리를 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흠칫 놀란 아레아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신성 결계를 통과했어요. 신전에서 결계를 복구하는 것 같길래, 혹시 신전에 사로잡혔을까 봐 연락을 늦게 했어요. 우리는 지금 예정대로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인원이 늘었지만요. 동쪽에 계신가요?”
[그래, 안티올이 일단은 거기로 이동하자고 해서. 우리 쪽에서 인질을 잡았는데, 신전에서 무시하고 파헤의 숲으로 향해서. 전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막아서다가 실패했어.]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투였다. 아레아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어떻게 된 거니?]“지금 설명하긴 복잡한데…….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
아레아는 하늘에 뜬 영상을 돌려서 자신의 주변을 보여 주었다. 하늘 위, 왠지 거대한 짐승에 올라 있는 것 같은 모습에 하이케의 영민한 두뇌는 재빨리 굴러갔다.
[내가 곧 범상치 않은 상황을 맞이할 것 같구나.]“대처를 준비해 주세요.”
[그러마.]대화는 그것으로 짤막하게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