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07
306
헬무트
306화
“시안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고?”
다음날 잠에서 깬 아레아가 숙취로 일그러진 미간을 짚으면서 확인했다.
어젯밤 기억이 완벽하게 날아간 그녀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헬무트는 왜 자신한테 묻지도 않고 결정했느냐는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했다.
이 정도는 자신이 결정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흡사 다리언에게 억압받던 것과 유사한 불만 같은 게 싹텄지만, 헬무트는 티 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여기서 멀지 않다고 해서.”
아레아는 이런 상황에서 쓸만한 주문을 찾아보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법을 쓰면 숙취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마법을 찾아 사용하게끔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애초에 술을 즐기지 않는 터라, 이런 상태에 빠져본 것도 처음이었다. 뱀술은 정말로 독했고, 아레아는 해독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마비되었다.
‘이렇게 흐트러져본 적은 처음인데.’
고개를 저으면서 아레아는 두통 속에서 마법 주문 대신 다른 걸 기억해냈다.
“……여기가, 신성 결계 동쪽. 그럼 멀지 않겠네. 그린카나의…… 로드릴, 그곳이겠지.”
“시안네 집안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아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시안은 정령 마법사야. 정령 마법사의 능력은 혈통에 의해 계승되지. 일반적인 마법사 집안보다도 핏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리고 시안은 모든 속성의 정령을 다룰 수 있어. 그건 굉장한 재능이지. 강력한 혈통의 정령 마법사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재능. 뭐 하나 특출난 건 없다는 게 단점이지만. 그래서 짐작은 하고 있었지. 시안이 정령 마법사 집안 사람일 거라는 걸. 그것도 부모님 모두 정령 마법사인 케이스.”
아레아가 덧붙였다.
“그리고 정령 마법사 둘이 결혼한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흔치 않을 테지만, 정령 마법사가 희귀하다고는 해도 그 결혼사가 그렇게 소문나지는 않았을 텐데.”
인간 세상의 상식에 대해선 그리 박식하지 않은 헬무트지만, 그건 좀 이상했다.
“시안도 파헤의 숲에 함께 진입해야 할 테니까. 그에 대해서 알아둬야 했어. 자세하게 알아보진 않았지만, 짐작은 했지.”
그러니까 시안을 믿지 못해서, 혹시 뒤통수 칠까 봐 뒷조사까지 하고 합류시켰다는 소리다. 그건 퍽 아레아다웠다.
“근데 시안은 왜 너를 초대한 거야?”
시안 혼자서야 헬무트의 일에 끼어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가족을 끌어들이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애초에 아스카나 시안이나 유서 비슷한 것을 써두고 가출하다시피 한 몸이었다.
파헤의 숲으로 뛰어든다는 건, 신전의 공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아스카나 시안이나 그것을 감수하기로 한데는 엄청난 우정이나 결심이 필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둘 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곤 한다는 점에서는 친구답게 똑 닮았다.
“그들을 일행에 합류시키겠다는 말은 아니야. 별 뜻은 없다는데.”
시안은 아주 평범한 말투로, 친구에게 놀러 가자고 권하듯 자신의 집에 방문할 것을 제의했다.
‘나는 너에 대해서 몰랐지. 그리고 너도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건 마찬가지고. 그러니, 이제부터 알아가자고. 재밌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궁금하기도 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범한 인간의 가정.
아니, 평범하지는 않은가. 정령 마법사 집안이 평범의 범주에 들지는 않을 테니까.
아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 녀석이야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테고, 뭐 신전의 눈에만 띄지 않으면 괜찮겠지. 정령 마법사라면 은신술의 대가들이니 설혹 들키더라도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을 거야.”
게다가 아직 들키기엔 이르다지만, 이쪽에는 엄청난 전력이 있지 않은가.
좌 이그렐 우 엘라가라면 신전과 꽝 맞붙어도 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성력이 아무리 마기에 상극이라지만, 신전이 가진 신성력을 끌어모아 봤자 신성 결계 만큼은 안 될 테니까.
“그런데 이 고양이는…… 뭐지?”
문득 아레아의 시선이 어느새 헬무트 무릎 위로 올라탄 하얀 고양이에게로 옮겨졌다. 털이 뽀송하고 인형처럼 예쁜 고양이였다.
기억이 날아간 아레아는 그게 엘라가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귀엽잖아.’
그녀는 헬무트 무릎에 앉아서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는 고양이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냥!”
이제 완전히 고양이 모습에 적응한 듯 엘라가의 입에서 귀여운 울음이 튀어나왔다.
그때마다 헬무트는 어색함을 느꼈지만, 노골적으로 이상한 표정을 짓는 시안이나 아스카와는 달리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엘라가는 정말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며 헬무트의 무릎에서 몸을 늘어트렸다. 연기라기보다는 날 때부터 고양이처럼 보였다.
아니, 표범도 결국 고양이과이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크기만 줄었을 뿐, 완벽하게 적응한 태세였다.
“저번에 왔을 때는 못 본 것 같은데, 안티올 님이 고양이도 키웠나?”
그때 고양이가 고개를 쳐들며 답했다.
[키우긴 누가 키워. 감히 인간 따위가 이 몸을 어떻게 키운다고.]아레아가 그렇게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잠시 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엘라가 님?”
그제야 마비된 감각이 돌아왔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법의 기운. 그리고 그 가운데 묵중하게 뭉쳐있는 거대한 마기.
하얀 고양이가 한 차례 하품을 한 뒤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그래, 님은 떼고 엘라가라고 불러라. 헬무트는 쥐잡듯이하면서 나한테는 그렇게 거리감 있게 굴 것 없잖아?]“제가 언제 쥐 잡듯이 했다고…….”
“난 쥐가 아니야.”
헬무트가 진지하게 답하자, 곧 엘라가로부터 타박이 날아왔다.
[헬무트 넌 어째 마물인 나보다 농담을 이해 못 하냐?]“…….”
[아무튼 그 시안이라는 녀석 집에 놀러 간다는 거지? 나도 인간 마을이 궁금하니까 함께 간다.]“엘라가도 인간 마을에 가겠다고?”
[난 인간을 안 잡아먹는다니까. 그리고 허약해 빠진 네 녀석이 또 어디 갔다가 혼자 무슨 꼴이라도 당할까 봐 그렇지.]시안의 부모님은 파헤의 숲 권역의 지배자가 함께 간다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함께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
“야, 너 시안네 집에 간다면서. 나도 같이 가.”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당연한 듯이 아스카가 끼었고, 샤를로트도 손을 들었다.
파헤의 숲에서 돌아온 지금, 리노사와 접촉할지도 모르는 샤를로트는 요주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함께여야 했다.
“안 그래도 너희들도 같이 갈 거라고 연락은 보내뒀어.”
그때 불쑥 이그렐이 끼어들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고급스러운 여행자복을 입은, 그녀는 신분을 숨긴 귀족 여성처럼 보였다.
티끌 하나 없는 하얀 피부에 화려한 색의 머리카락과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인간 마을이라 재미있겠네.”
어제부터 인간 흉내라는 새로운 놀이에 흠뻑 취해있던 이그렐은 그새 공부까지 했다.
하이케가 건네준 귀족 여인의 영상을 담은 수정구를 보고 온 터.
움직임이 이제는 완전히 자연스러워졌다. 태도도 자세도, 우아한 귀족 여인의 그것에 가까웠다.
“가서 인간 남자를 유혹해 볼까? 인간 마을이라니, 흥미로운걸.”
“남의 마을에 가서 그러시면 곤란하거든요.”
시안이 투덜거렸다. 엘라가가 뚱하니 말했다.
[쓸데없이 가서 사고 치지 말고 넌 여기 남지.]“엘라가 님도요. 마을 한가운데서 마법이 풀리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이 위험한 두 마물이 함께하는 것이 탐탁지 않은 시안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자신의 고향 아닌가. 만약 이들의 정체가 들통난다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난감하다.
“흥분해서 마기를 발산하는 일 없으면 마법이 풀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렴. 내 마법은 그렇게 허접하지 않단다.”
하이케가 자신만만하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이그렐에게로 옮겨졌다.
“변신을 했다고 해도, 육신의 특질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마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싸울 수 있지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맨손으로도 툭 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인간 세상에서 인간의 생명을 앗는 것은 엄격하게 규제된답니다. 상대가 적이더라도, 일단은 참으셔야 해요.”
이그렐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 난 나한테 덤비는 것들, 단숨에 죽이는 것보단 살려두고 고통을 주는 쪽을 선호하니까.”
[성격하고는.]엘라가가 혀를 찼다.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남쪽 권역을 지배하게 되기까지 무수한 마물과 전투를 벌였던 이그렐이다.
생각 없이 호기심 많은 마물처럼 보일지라도, 이그렐의 본질은 잔인하고 압도적인 포식자였다.
“뭐, 우리 마을에서 딱히 시비가 붙을 일도 없을 테니까.”
시안은 불안한 듯 이그렐과 엘라가를 흘낏거렸다. 하지만 이미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된 일이었다.
“으앙, 나도 가고 싶은데.”
정령마법사라는 소리에 세라는 함께 가지 못해 아쉬워했으나, 시안과 친분이 없는 그녀가 낄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시안의 집에서도 난데없이 그렇게 많은 손님을 수용하기도 힘들었다.
수잔이 세라를 다독였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갈 길을 가야지.”
수잔과 세라는 어차피 자신들이 헬무트에게 짐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파헤의 숲을 나와서는 자신들의 삶을 찾기로 한 터였다.
그들은 안티올을 통해 숨겨둔 가문의 재산을 확보한 뒤, 바덴으로 이동하여 거처를 구해보기로 했다. 세라도 바덴의 아카데미에 입학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헬무트는 잠시 고민 끝에 편지 한 장을 썼다. 에단 쿠드로 앞으로 쓰여진 편지였다.
“헬무트가 소개해줘서 왔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는 건강하다고도요.”
헬무트의 필체까지 기억하진 못할 테니 대마법사 안티올의 보증과 세라가 검술을 펼쳐 보이는 걸로 증거가 될 것이다.
다리언의 검술을 가르친 건 아니나, 세라의 검술은 헬무트와 닮은 데가 있다. 헬무트는 그녀에게 기본기 하나는 철저하게 가르쳤으니까.
‘에단 쿠드로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믿을만하지.’
그 때문에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수잔이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그럼 이별인가요?”
파헤의 숲을 나오고 난 뒤 활력을 찾은 그녀였다. 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수잔의 안색은 밝기만 했다.
“머지않아 바덴에 들리겠습니다. 잘 지내시기를.”
“건강해요, 헬무트. 그동안 고마웠어요.”
“저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 말은 진심. 수잔과 세라가 있었기에 좀 더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으리라.
수잔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세라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헬무트, 우리 언제 또 볼 수 있어요?”
“네가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수석을 차지하면.”
“그럼 곧 보겠네.”
무슨 자신감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세라의 실력을 본 헬무트로서도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엘라가 님은 언제든 와 주세요.”
“제가 털 빗겨 드릴게요! 지금 완전 귀여운데.”
[그래, 이 녀석이 자기 앞가림할 수 있게 되면.]어쩐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엘라가도 나름 선택을 했다. 후원을 입고 바덴에 무리 없이 안착할 수잔과 세라보다는 신전이라는 적을 둔 헬무트가 더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만약 헬무트가 폭주한다면 막아설 수 있는 건 엘라가 뿐이기도 했다.
“안녕히.”
“모두, 건강히 잘 지내요!”
그렇게 하나의 이별이 먼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