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09
308
헬무트
308화
“이게 인간의 마을이란 건가?”
입구에 들어서면서 이그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은 이른 시간, 그린카나는 고요한 산 공기 속에 잠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제 막 눈을 떠서 하나둘씩 세수를 할 시간이다.
이그렐은 몰랐지만, 그린카나는 척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았다.
도시도 아닌 이런 산골에 있는 마을 같지 않게 독특한 점이 있었다.
허름한 구석 없이 반듯반듯하고 아기자기한 모양새. 지붕도 녹색이나 푸른색 등 알록달록하게 칠해져 있다. 도시의 화려함은 없지만, 잘 가꾸어진 마을이었다.
그 모습을 본 헬무트는 바로 깨달았다.
‘집을 가꿀 여유가 있다는 건 생계에 문제없는 이들이 산다는 거지.’
마법사는 부유한 족속들이니까. 이런 산골에 이렇게 잘 가꾸어진 마을이 있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이그렐이 눈살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지의 정령이라…… 확실히 묘한 기운이 느껴져. 이 아래에서 흐르는 강력한 기운이…….”
“마치, 어떤 마법사의 던전에 들어선 느낌이로군요. 확실히 ‘어떤 영역’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레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흥미로운 듯이 중얼거렸다. 한때 시안의 정령에 관해서 연구한 적 있는 그녀였다.
정령 마법사의 마을, 그린카나에 발을 들이자 잠들어 있었던 탐구심이 솟구쳤다.
[그래 봐야 이 엘라가 님한텐 안 되거든!]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걸 보니, 본능적으로 자신이 더 강하다고 느끼고 있는 듯했다. 파헤의 숲 밖으로 나와서도 그의 본능이 유효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이그렐이 핀잔을 주었다.
“엘라가, 넌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입 다물고 있지그래. 인간 세상에는 말하는 고양이 같은 건 없거든?”
캭! 엘라가가 이그렐에게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도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 터였다.
그들을 슥 지켜본 시안은 슬며시 이는 불안감을 가라앉혔다.
‘뭐, 괜찮겠지.’
이곳은 대지의 정령의 영역. 아무리 강한 마물이라고 해도, 대지의 정령보다 강할 수는 없는 장소다.
그들이 막 마을 입구에 들어서던 차였다. 입구 양옆에 서 있던 난쟁이 모양의 돌비석이 갑자기 입을 움직였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비석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시안? 시안이니?]시안은 동요 없이 말을 받았다.
“네, 엄마. 저 왔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손님이 좀 있어요.”
[그런 것 같구나. 거기서 있으렴. 엄마가 가고 있단다. 아 그런데 나보다 먼저…….]“시안, 이 자식!”
저 멀리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나이 들어 보이지만, 중년이란 단어가 어색한 사내 한 명이 주먹을 들고 득달같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네 아버지가……….]어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얼른 덧붙였다.
[나도 가고 있단다. 그때까지 알아서 하렴.]알아서 하긴 뭘? 시안은 의문을 품었고, 곧 그 의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 도착한 아버지가 다짜고짜 그를 향해 몸을 날렸기 때문에.
시안은 황당한 듯이 옆으로 샥 피해버렸다. 허공을 가른 시안의 아버지가 바닥에 착 안착하더니 그를 돌아봤다.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이 자식? 피해?”
“아버지, 손님들 있는데 창피하게 무슨 짓이에요.”
모범생 아들은 한숨을 쉬며 점잖게 아버지를 타일렀다.
사실 피할 줄 알고 이단 옆차기를 날렸던 시안의 아버지, 아제르가 헛기침했다. 그는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거의 완벽한 모범생으로 보였던 아들을 혼낼 기회가 왔다.
“크흠! 아버지가 엇나간 아들을 좀 교육한다는데 왜! 시안, 네 녀석은 제정신이냐?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두고 사라지다니, 대체 그런 짓을 누구한테 배운 거냐!”
그런 짓을 시안에게 가르친 놈을 색출하겠다는 듯이 아제르는 옆에 서 있는 시안의 친구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아레아와 이그렐에게서 멈추었다.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눈에 띄는 미녀 두 명이 거기에 있었다. 그보단 얌전한 외형이지만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샤를로트까지.
그제야 뒤늦게 분노에 잠겨서 인지하지 못했던 시안의 일행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과 함께 온다고 했지만, 아제르의 머릿속에서 시안의 친구란 좀 더 친근하고 평범한 외형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생긴 것부터가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한 일행은 아니다.
아제르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뭐, 뭐냐. 시안, 어떻게 이런…….”
‘미인들을 데려온 거냐?’라고 물으려다가, 아제르는 입을 딱 다물었다. 상대가 시안의 친구라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들의 일행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는 그랬다.
“와서 설명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사정이 있었어요.”
시안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뒤로는 어쨌든 아스카마저 갱생시켰다고 소문난 모범생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다.
나는 조금도 잘못한 게 없고, 잘못할 리도 없다는 무결한 기운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요령 좋은 시안은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고 계신다니, 만나서 이야기하지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서 그들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린카나의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일행과 함께였다. 구경거리는 사양이다.
“네 어머니가 오는 건 오는 거고, 저들은 누구냐.”
“이쪽은 헬무트, 이쪽은 아레아, 이쪽은 아스카…….”
시안은 빠르게 한 명 한 명 건성으로 지목하며 아제르에게 제 일행을 말 그대로 이름만 소개했다.
물론, 고양이인 엘라가는 빼놓은 채였다.
엘라가는 헬무트의 어깨 위에 앉아서 불만스럽게 냥냥거렸다. 누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완벽한 고양이였다.
머리며 눈이 온통 어두운 편인 헬무트와 함께 있으니 엘라가의 털은 유독 뽀얗게 보였다.
아제르에게도 다행인 점은, 하도 눈에 띄는 인물들과 있다 보니 그가 그 고양이에게 신경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는 거다.
“이쪽은 이그렐.”
다른 이들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한 데 반해, 자신의 차례까지 돌아오자 이그렐은 성큼 앞으로 걸어 나섰다.
그녀는 오만한 눈길로 아제르를 굽어보며 물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지?”
아제르는 아들의 일행이면서 자신을 당당하게 하대하는 이그렐을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이런 버릇 없는 처자가 있나!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데 말투가 왜 그 모양이지?”
시안이 급히 덧붙였다.
“이 사람은 친구 아니에요.”
“새파랗게 어려?”
이그렐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내가 네게 할 말이란다, 아가야.”
“아, 아가?”
“그래, 너희 마법사들도 보는 것만으로는 나이를 판단하기 어렵지 않니?”
눈앞의 화려한 미녀를 유심히 바라본 아제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제법 실력 있는 정령 마법사였다.
그렇다고 한들 하이케의 마법을 꿰뚫어 볼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제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아제르의 눈빛에 경계심이 서렸다.
“……하지만 당신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야. 이상하군, 이 기운은……. 당신은 누구지?”
“이 몸의 이름은 이그렐이야. 인간 세상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나?”
이그렐의 붉은 눈동자가 기묘한 빛을 발했다. 어쩐지 위험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아제르가 정령을 소환하려는 그때에, 뒤쪽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나, 아제르.”
“테라.”
시안과 똑 닮은 온화한 인상의 여인이 거기 서 있었다.
여인은 같은 정령 마법사인 아제르나 시안과는 달랐다.
그녀에게서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거대하고도 묵직한 기운. 마치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그녀의 등을 지키는 것처럼.
거기 있는 몇몇은 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대지의 정령과 계약한 로드릴이구나.’
아제르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곁에 섰다. 대지의 정령과 계약한 로드릴은 테라다.
테라는 시안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시안, 네가 편지만 하나 남겨두고 사라진 것에 대해선 탓하진 않겠다. 하지만 네가 그린카나에 이런 위험을 초래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적어도 내게는 미리 말했어야 했어!”
시안이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슥 긁었다.
“어머니, 제 말을 좀 들어보세요.”
시안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그는 상식 밖의 존재들과 함께하고 있다.
직접 눈으로 봐야지, 말로 그녀를 납득시킬 가능성은 낮았다.
로드릴은 대지의 정령의 보호를 받은 이 그린카나에 어떤 위험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드는 성향이 있으니까.
일단 저지르고 본다. 길에서 고양이를 주워오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생각해버린 시안이었다.
생각은 단순했지만, 그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이들 일행을 어머니와 마주 시켜야 하는 이유가.
이그렐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인간 여자. 쓸데없이 흥분할 거 없다고. 나는 인간을 잡아먹지 않으니까.”
“이 그린카나에 마물이라니. 그것도 지성을 가진 마물! 내 평생 인간의 형태로, 인간의 말을 하는 마물을 본 적이 없구나.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마물이며, 어째서 너와 함께인 거지?”
테라는 엄격한 얼굴로 다그쳤다. 그녀는 이제 시안마저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옆에서 아제르가 경직된 표정으로 반문했다.
“마물이라고? 흑마법사가 아니라?”
“왜곡된 본질이 느껴져. 저 모습은 진짜가 아니야. 엄청나게 응축된 마기. 저런 마물은 들어본 적도 없어!”
“그래도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이의 마법인데, 제법이야. 잘도 꿰뚫어 보는구나? 인간 여자야.”
테라에게서 위협하듯 기운이 일어섰다. 그녀의 의구심이 짙어졌다.
“대마법사가 마물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아티팩트라면 하이케인가? 대마법사가 마물과 함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이그렐 님…….”
‘사고 안 친다면서요?’ 시안은 입 좀 다물라는 눈빛으로 이그렐을 쳐다보았다. 차차 밝히려고 했는데, 이렇게 처음부터 긴장감을 조성하다니.
‘역시 이 새대가리는 믿을 게 못 돼.’
파헤의 숲에서도 순순히 그들에게 협조하는 척해놓고 골렘을 날려 먹지 않았던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상대를 믿고 놔둬서는 안 된다.
이그렐이 흥미로운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런데 인간 여자, 네 눈엔 마물은 나만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그러게.]엘라가가 입을 쩍 벌리고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을 했다. 말하는 고양이를 목격한 테라의 표정이 이전보다 더 굳어졌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군.”
그리고 이내 그녀의 시선이 헬무트에게로 옮겨졌다.
“셋? 아니야. 너는…….”
“어머니, 위험한 이들이 아니에요. 위험한 이들이라면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일단, 자리를 옮기지요.”
시안이 몰려드는 마을 사람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테라는 읽어내듯 뚫어지게 시안의 눈을 쳐다보았다.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