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1
30
헬무트
30화
“우리 4급 용병 애송이들, 헬무트와 핀은 어때?”
이젠 놀릴 수 있을 만큼 여유를 찾았다.
“둘 다 무사해. 마차까지 접근하는 놈들은 없었어. 어이! 이제 나와도 돼.”
헬무트는 막 마차 아래에서 몸을 빼고 일어선 채였다. 하지만 핀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밑에서 기절했나?’
생각하는데 작은 외침이 밑에서 흘러나왔다.
“헬무트!”
안쪽을 들여다보자 쭈그리고 있던 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헬무트, 야, 나 다리에 쥐 났어. 나 좀 끌어내 주라. 빨리.”
“…….”
헬무트는 한심한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마차 아래서 빠져나온 핀이 다리를 두드렸다.
“아오, 다리가 마비되는 줄 알았네.”
헬무트는 만약 자기가 떠나고 마차 아래로 마물이 들이닥쳤다면 핀이 싸우긴커녕 다리나 붙잡고 죽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팔에 붕대를 싸맨 우터가 낄낄거리며 말을 걸었다.
“거 마차 밑에서 편히 숨어 있었으면서 얼굴은 무슨 한 열 시간 사투를 벌인 것 같다?”
“아 쫌, 놀리지 좀 말아요!”
버럭 소리를 지른 핀은 곧 의기소침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용병단에서는 그냥 한량같이 빈둥거리는 것 같았던 3급 용병들이 무시무시한 마물을 상대로 일사불란하게 싸우는 걸 보면서 그는 놀라고 기가 죽은 상태였다.
우터가 헬무트에게로 표적을 돌렸다.
“헬무트, 넌 어떤 거 같냐. 좀 할 만해 보여? 너도 싸워 볼래?”
“저도 싸울 수 있어요.”
헬무트는 평온하게 피력했다. 일단은 4급 용병이니 타냐의 말을 따르는 게 맞았지만 습격이 이걸로 끝은 아닐 것이다.
그 원숭이 마물, 지성이 있는 마물은 인간과 유사한 특성을 가진다. 복수심도 있고, 일방적인 손해를 견디지 못한다.
‘구경은 한 번으로 충분해.’
나설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끝났다.
“아서라, 그러다 다치면 짐만 된다고. 넌 마물을 상대해 본 적도 없잖냐.”
우터보다는 더 많이 상대해 봤을 거라고 무심코 답하려던 헬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놈의 기억 상실증.’
“그래도 짜식이 기는 안 죽었네. 그래, 용병은 배짱이 있어야지! 하다 보면 다 익숙해져.”
한 차례 위기를 잘 넘겨서인지 우터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페이스 용병단의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자 퓌엔이 지시를 내렸다.
“좋아, 다들 잘 싸웠다. 마차를 점검하고 사체를 수습하자고. 꽤 돈이 될 거야.”
헬무트가 핀에게 물었다.
“사체를 수습하자고? 돈이 돼?”
“마물의 사체는 일반 사냥감보다 훨씬 돈이 되니까. 그래도 우리 쪽 사상자는 없어서 다행이야.”
용병들이 손도끼나 단검을 꺼내 들고 앞장서서 쓰러져 있는 마물의 시체를 뒤적였다.
가죽이나 이빨을 거둬서 팔면 돈이 된다. 마법사들의 실험 재료로 쓰이거나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수확물은 뷰탄 상회에서 거둬 가지만, 7할 정도 용병들의 몫을 쳐줬다.
어느덧 마차에서 내린 상회 사람들이 용병들이 가져온 사체의 가치를 재어 보고 있었다.
“잘 보고 배워 둬.”
헬무트와 핀을 손짓해서 부른 마로스가 능숙한 솜씨로 마물의 사체를 가르며 멀쩡한 부위의 가죽을 벗겼다.
이빨을 하나하나 뽑고 날카로운 발톱도 거두고, 어디 돈이 될 구석이 없나 꼼꼼히 파헤쳤다. 마물을 잔인하다고 할 게 아니었다.
“이놈은 눈알 색깔이 특이한데? 돈이 되려나?”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는 있겠지만, 눈알은 보존하기 힘들잖아? 그냥 내버려 둬.”
용병들은 특히 마물의 핵, 인간에게 있을 땐 어둠의 싹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조심스럽게 분해하여 한데 모았다. 헬무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신관 놈들은 싫어하겠지만 이게 가장 돈이 된다고.”
“핵이 멀쩡한 놈이 없네. 좀 비껴서 찌르라니까!”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거 일일이 따질 수 있나.”
핀은 질린 기색으로 수다를 떨며 작업하는 3급 용병들을 쳐다봤다. 작업을 하던 타냐가 핀과 헬무트에게 턱짓했다.
“저기 한 놈 있다. 둘이 같이 작업해 봐.”
핀은 불안한 얼굴로 그가 지목한 사체 쪽으로 움직였다. 헬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까이 가자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핀.”
“왜? 겁나? 괜찮다니까.”
핀이 센 척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사체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마기가 확 일어섰다.
죽은 척 가장하는 습성이 있는 놈이었다. 건드리려고 하니까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캬악!
이빨을 드러내며 목을 노리고 뛰어드는 움직임이 재빨랐다. 그들 쪽을 주시하고 있던 타냐가 다급히 외쳤다.
“핀!”
“으아악!”
핀이 옆으로 구르며 가까스로 목을 물리는 걸 피했다. 핀이 서 있던 자리에 안착한 놈은 바로 앞에 선 헬무트를 발견했다.
조금 큰 원숭이처럼 생겼지만, 그래 봬도 마물. 놈은 이빨을 드러내며 헬무트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헬무트의 눈은 지독히도 차분했다. 손아귀에서 빛살처럼 검이 뽑혔다.
헬무트의 검이 망설임 없이 사선을 그으며 놈을 베어 넘겼다.
-촤악!
‘이, 무슨……. 내가 뭘 본 거지?’
타냐의 눈이 커졌다. 궤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검이었다.
깔끔하게 두 쪽으로 갈린 마물을 발로 걷어차 치워 내며 헬무트가 감흥 없는 말투로 말했다.
“죽은 것 같군요.”
“그, 그래.”
“아, 핵까지 베어 버렸나 봐요. 돈이 안 될 텐데.”
괜히 두 쪽으로 갈라 버렸나. 헬무트는 아쉬운 듯이 되뇌었다. 넘어진 핀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한 거야?”
‘이 녀석…….’
타냐는 곤혹스러운 눈초리로 헬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낯설고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헬무트는 손에 쥔 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본능적으로 변명했다.
“이 검이 좋은가 봐요. 잘 드네요.”
다리언이 장식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초라한 검집에 든 검을 제대로 살펴본 이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날에 서린 빛이 예사롭지 않다.
타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네, 기절해 있던 놈이라 몸이 좀 굼떴나 봐.”
핀도 아무 생각 없는 듯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헬무트의 어깨를 툭 쳤다.
“야, 헬무트, 고마워. 네 덕에 살았다! 내가 이따 너만 수프 가득 떠 줄게!”
핀은 취사 담당이었다. 그리고 요리도 꽤 잘했다.
“뭐야, 살아 있는 놈이 있었어?”
“해치운 거지?”
곧 무슨 일이 있었냐며 용병들이 기웃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 그 일은 그대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
그날 밤, 혈투를 벌였던 장소에서 벗어나 밤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행은 멈춰 섰다.
그 원숭이 마물이 언제 다시 습격할지 모르니 되도록 빨리 이 숲을 벗어나야 한다. 그런 합의가 있었기에 모두가 무리하면서도 서둘렀다.
길이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숲이었다. 나무를 베어 내고 야영할 만한 자리를 만든 그들은 모닥불을 피워 올리고 식사했다.
사방은 풀벌레 우는 소리와 새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질 뿐 고요했다.
마기를 풍기는 마물이 가까이 있다면 풀벌레들도 숨을 죽이니 지금은 안심해도 좋았다.
“보초는 둘씩 나누어 3교대로 설 거야. 헬무트와 타냐, 핀과 마로스, 션과 베른. 우터는 부상 중이니 빠진다.”
2급 용병이자 용병단의 대표인 퓌엔은 보초를 서지 않는다.
여전히 습격의 위험이 있으니 느슨하게 보초 설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퓌엔은 당부했다. 션이 투덜거렸다.
“어이쿠, 나도 팔 좀 긁혀 볼 걸 그랬네. 잠이나 편히 자게.”
“부럽냐? 내가 자연스럽게 칼로 좀 긁어 줄까?”
“그만들 해. 피곤하지도 않아?”
유쾌하게 떠든 용병들은 평소보다 짧게 대화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내일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빨리 잠들어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일일이 인원을 세어 보지 않으니 보초를 서지 않을 때는 몰래 빠져나갈 수 있다.
헬무트는 차분히 기다렸다. 매일 밤, 비스를 수련한답시고 몰래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도 익숙해진 터였다. 기껏해야 한두 시간이다. 남들 앞에선 기초적인 동작만 연습했다.
“시간 됐다, 잘 자라.”
그 말과 함께 졸린 눈을 힘겹게 뜨고 있던 타냐가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럼 이제 기회를 만들어 줘 볼까.”
헬무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목표한 것을 잊지 않았다.
헬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움직였다. 타리크 용병단 쪽에 가까운 동선이었다.
슬쩍 보니 켈롭은 아직 깨어 있었다. 그는 의외로 잠을 적게 잤고 근면했다. 특히 핀과 헬무트를 괴롭히는 일에 그랬다.
마물 소탕으로 모두가 지쳐 있는 밤. 설마 자기네 용병단 내에서 사상자가 나왔는데 4급 용병이나 괴롭히겠느냐며 켈롭에 대한 경계가 흐트러진 시점이기도 했다.
지치는 건 헬무트와 켈롭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켈롭은 4급 용병들을 지킨다는 핑계로 마차 아래에서 지켜만 봤고 헬무트도 그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헬무트는 근처의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켈롭이 뒤쫓아 오는 게 느껴졌다.
혹시나 마물 때문에 간이 작아져서 따라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나름대로 기척을 숨기긴 했지만, 그 큰 덩치에 발소리를 완전히 죽일 순 없었다.
헬무트는 일행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졌다 싶을 때 발을 멈추었다. 공터에 선 그는 모르는 척 검에 손을 가져갔다. 꼭 수련을 시작하려는 듯이.
-부스럭, 부스럭.
켈롭이 노골적으로 발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히죽거리는 웃음이 만면에 가득했다.
“어이, 꼬마! 위험하게 이런 곳에 혼자 들어오냐? 위험하잖아.”
“…….”
“우리 전에 못다 한 이야기, 마저 해야지.”
켈롭은 저 무표정한 얼굴이 코피를 흘리며 엉엉 울도록 두들겨 패고 혼쭐을 내 줄 생각이었다. 아직 타냐에게 쫓겨난 굴욕감이 가시지 않았다.
‘얼어붙었나?’
헬무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켈롭은 그에게 바싹 다가서서 험악한 얼굴을 들이댔다.
“알아서 잘 사렸어야지! 이런 데선 널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계집년 치마폭에 숨는 것도 안된단 말이지.”
그제야 헬무트의 입이 열렸다.
“네가 따라올 줄 알았지.”
“뭐?”
켈롭은 눈을 부릅떴다. 헬무트의 눈은 밤처럼 고요했다. 새카만 동공에서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켈롭은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녀석한테 내가……!’
“너무 뻔해서, 한숨이 나오는데.”
여긴 켈롭을 처리하기 좋은 장소다. 이런 곳에서 일을 저지르면 아무도 4급 용병 헬무트를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일행에서 좀 멀어졌다가 마물한테 습격을 당했다. 그 정도로 다들 생각할 터.
켈롭은 정신을 차렸다. 괜한 수작이다. 이 조막만한 녀석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만약 그랬다면 그동안 당하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뭐라고? 이 새끼가 진짜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켈롭은 손을 휙 위로 치켜들었다. 뺨을 때리려는 게 아니라 솥뚜껑만한 손으로 머리를 후려칠 셈이었다.
그러나 내려치려던 손은 허공에서 정지했다. 새하얀 손마디가 그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가볍게 잡은 것 같은데, 가운뎃다리를 붙든 듯이 꼼짝도 할 수 없다. 켈롭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났다.
“겁이 없는 건 너겠지. 아니면 멍청하거나.”
“이, 이…….”
“둘 다일까?”
상대를 몰라보는 눈알 따윈 뽑아 버리는 쪽이 좋을 것이다. 하기사 헬무트를 알아본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마는.
헬무트는 그의 손을 친절하게 아래로 내려 줬다. 그리고 켈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거기에 힘이 들어간 순간,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이 가해졌다.
“크으윽!”
신음과 함께 맥없이 꺾인 켈롭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쿵! 켈롭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믿기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