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13
312
헬무트
312화
짧은 기간, 평화롭고 오붓한 마을 생활이 시작되었다.
평범하지만, 누군가에겐 낯설기만 한 인간의 생활.
헬무트의 특별난 일행에는 이 평범함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직 집으로 돌아온 시안만이 익숙하게 원래의 생활을 누렸다.
그린카나는 작은 마을.
로드릴이 정령 마법사라 부유하다고는 해도, 이런 작은 마을에 많은 손님을 수용할 커다란 저택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자연스러운 예상이었다.
그 생각처럼 시안의 집은 크지 않았다. 고작 3층 크기의 작은 저택.
하지만 시안이나 그의 부모님은 꽤 많은 수의 손님에도 별 부담 없는 듯이 보였는데, 일행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 이제 손님들 쉴 곳을 마련해볼까?”
테라가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옆의 넓은 공터에 두 개의 움막이 생겨났다.
아니, 자라났다. 하루아침에 집이 뚝딱 생겨난 것이다. 신비로우면서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테라가 마당에 씨앗을 심고 정령을 부르자, 그 자리에서 바로 덩굴이 치솟았다.
서로 올올이 엮이며 자라난 튼튼한 나무 덩굴은 천장에서 모였고, 그대로 틈 하나 없는 견고한 움막이 되었다.
꽤 널찍한 크기의, 살아있는 움막이었다.
오래 살기엔 좀 그럴지 몰라도, 한 달 정도 머무는 데는 지장이 없다. 화장실은 시안의 집 옆에 붙어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면 되었다.
아레아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숙박업을 하셔도 되겠군요.”
“마법사가 굶어 죽을 일은 없지. 그게 정령 마법사라면 더더욱!”
유쾌하게 대꾸한 테라가 손님들을 향해서 눈을 찡긋해 보였다.
“필요한 물건은 넣어두었으니 움막은 알아서 배분해서 써 주세요. 모두가 모두 편안한 생활이 되시기를. 아침 9시에 식사예요. 주방에 음식을 놓아둘 테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하는 것으로 해요!”
아마 칼같이 아침 9시에 모여들 것이다. 여기는 체계적인 기숙사 생활에 익숙한 이들 천지니까.
그녀가 사라지고, 시안이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여, 나도 가 본다. 불편한 건 없을 거야. 집 앞에 빛의 정령을 소환해놓을 테니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이제 남은 사람들끼리 방을 배분하면 되었다.
“난 여기.”
아레아가 시안의 집에서 먼 쪽의 움막을 지목했다.
“아, 그럼 나도.”
자연스레 아레아와 같은 움막을 쓰려고 했던 헬무트는 샤를로트가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자 순간 멈칫거렸다. 그녀는 단호하게 물었다.
“당연히 여자인 제가 아레아 선배와 같은 움막을 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별 별로 같이 쓰면 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두 개의 움막을 마련해준 모양이었다. 아스카가 핀잔을 던졌다.
“그러니까! 헬무트, 너 아직도 옛날 생각하냐? 너랑 같이 방 쓸 땐 아레아가 남자 모습이었지.”
“아.”
헬무트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아마 그 이후로 헬무트의 뇌리에 아레아는 자신의 룸메이트라고 굳어져 버린 듯하다.
“자식, 음흉하기는. 그래도 이런 데서 신혼집 차리려고 들면 안 되지. 친구네 집에서 애가 생기면 곤란하잖아? 결혼도 안 했는데.”
놀리듯이 이죽거린 아스카가 곧 소리를 질렀다.
“악! 아파!”
아레아의 손에서 파지직 전류가 일고 있었다. 주문도 없이 마법공격을 시전한 것이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놀랍도록 싸늘했다. 아스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못돼먹은 게 사람한테 공격 마법을 써!”
하지만 아레아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움막으로 들어갔다. 더러워서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샤를로트도 냉담하게 반응했다.
“맞아 쌉니다.”
“…….”
왠지 의기소침해진 아스카였다. 이그렐이 혀를 쯧쯧 차며 등을 돌린 샤를로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도 여자니 이쪽이겠지?”
어쨌든 이그렐은 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마물이었다. 아레아와 한 숙소를 쓴다면 아레아가 그녀를 감시할 것이다.
“나머지는 이쪽이로군.”
헬무트는 담담히 여자 셋이 들어간 다른 쪽 움막에 들어섰다. 그의 어깨에는 붙박은 듯이 엘라가가 올라앉아 있었다.
나름대로 균형을 맞춰준다고, 왼쪽 어깨 오른쪽 어깨 바꿔 타주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자리는 그곳이었다.
바닥에 카펫이 넓게 깔린 움막 안은 깨끗하니 넓었고, 숲 냄새가 풍겼다. 속이 안 좋은 사람도 이곳에 들어서면 바로 안정될 것 같다.
한쪽에는 침대 역할을 할 만한 두툼한 요와 이불 몇 개, 생필품이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위치도 산에서 가깝겠다, 어디 수련장 온 것 같은 기분인데.”
아스카가 따라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방안을 쭉 둘러본 엘라가가 투덜거렸다.
[콧구멍만 한 곳이로군. 답답해서 어디 살겠나.]“엘라가도 지금 작잖아.”
[그래, 난 작지. 너도 못 들어갈 바구니에도 들어갈 만큼!]엘라가는 작아진 이후로 틈만 나면 왠지 모르게 작은 것을 뽐냈다.
평생을 눈에 띄게 거대하게 살아오다 보니까 지금의 아담함이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원래는 멋들어지고 위엄 넘치는 하얀 표범이었다면, 지금은 하얀 털의 예쁜 고양이였으니까.
그리고 생각 외로 후자 쪽이 엘라가의 취향인 듯했다.
헬무트는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난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엘라가가 작아져서 예뻐졌건 어쨌건, 헬무트로서는 클 때가 더 나았다.
지금은 자신을 탈것으로 부려먹으며 귀찮게 하니까.
엘라가가 무시하는 듯이 말했다.
[둥그런 바구니에 몸이 콱 맞는 그 안온함을 모르다니, 안된 녀석이로군. 어쨌든 너는 이 풀냄새 나는 움막을 쓰든지 해라. 나는 나가서 잘 테니.]말을 마친 엘라가는 바로 그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엘라가는 마물이다. 영역을 넓게 쓰는 마물. 이런 움막에서 머무는 건 답답할 터였다.
헬무트는 총총 걸어가는 하얀 고양이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당부했다.
“싸우면 안 돼.”
엘라가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사라졌다. 여기선 아무리 약해빠진 헬무트 녀석이라도 위험해질 일 없을 터, 그도 고양이로서의 삶을 마음껏 즐겨볼 참이었다.
*
시중인이 없음에도 시안의 집에서의 생활은 귀족가의 생활만큼이나 부족함 없이 편안했다.
유령처럼 물건이 혼자 움직이는 것을 보면 정령이었다.
자연의 기운이 강한 이런 곳에선 정령은 자신의 모습을 내보이지 않고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
대신 그걸 보는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겠지만 말이다.
새벽에 일어난 헬무트는 산 쪽의 널찍한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고, 아침 식사를 했다.
아레아는 정령 마법에 학구심이 불탔는지, 테라나 아제르와 정령 마법에 대해서 아침부터 긴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 며칠은 저 상태가 계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헬무트에게로 슬쩍 다가왔다.
“산맥에 정령이 가득하대. 가보고 싶은데, 같이 가지 않겠어?”
“그래.”
그렇게 둘만의 데이트가 이루어졌다. 하도 슬쩍이라 방해꾼은 없었다.
아예 시안네 집을 벗어난 엘라가는 그린카나에서 하루 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존재가 되었다.
야생동물이나 가축이 많은 그린카나에서 보기 힘든 인형처럼 예쁜 고양이였으니까.
“와 고양이 예쁘다!”
“어디서 온 거지? 손님들이 데려왔나?”
“어, 맞아! 그 까만 형 어깨 위에 타고 있었어.”
“냐아옹?”
그린카나의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엘라가한테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홀린 듯이 이 도도한 고양이 엘라가에게 계란이며 닭가슴살을 갖다 바치면서 관심을 끌었다.
엘라가는 그것들을 받아먹으며 귀여운 척 울음을 냈다. 그때마다 귀엽다고 난리를 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마음에 안 들면 훌쩍 뛰어서 나무 위에 올라가면 그만이다. 이거야말로 인간 세상에서나 누릴 수 있는 경험이었다.
시안은 아카데미에서 보낸 짐이 제 방에 그대로 쌓여 있어 그걸 정리하느라 바빴다.
여동생 시에나도 사춘기에 들어서서 그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정령 마법에 꽤 성취를 보였다고 시안을 상대로 시험하고 싶은 듯했다.
시안은 그녀를 어떻게 혼쭐을 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의 정신은 아스카와 샤를로트,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헬무트처럼 아침부터 검을 수련한 아스카와 샤를로트는 자연히 둘이 있게 되었는데, 파헤의 숲에서 함께 행동하면서 부쩍 사이가 가까워진 터였다.
예전에는 대련할 때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면, 지금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교감이 생겼다.
아침을 먹고 소화시킬 겸 한 차례 검을 휘두르고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은 아스카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오니, 옛날 생각이 나네.”
“옛날 생각이요?”
아스카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뭔가를 되짚듯이.
“그래, 옛날에 어머니랑 둘이 살 때……. 그때도 이런 작은 마을에서 살았거든. 우리 어머니는 정령 마법사가 아니었으니 다 손수 하셔야 해서 힘드셨을 테지만. 난 뭐 어렸으니 힘든 거 없었어. 그때가 좋았지. 굳이 말하자면 가난한 쪽이었을 테지만, 편안하고 자유로웠거든.”
묘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아스카가 평민이라고 알고 있던 샤를로트로서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내용의. 지금은 편안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는 말 아닌가.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건가요?’
새삼 아스카에게 궁금증이 솟았으나 샤를로트는 그 질문을 삼켰다.
옛날에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는 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소리다.
아스카는 사고는 많이 쳤지만, 무책임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어머니를 내두고 돌아다닌다는 건, 어머니가 그가 돌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있다는 뜻이다.
“어머니는 지금의 삶에 더 만족하시는 것 같아. 나도 어머니처럼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영 성격에 안 맞아서.”
그리고 아스카는 뭔가 화난 듯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아버지란 작자도 마음에 안 들고.”
샤를로트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순하고 명쾌해 보이던 아스카에게도 그 나름대로 사연이 있음은 알겠다.
저 성격이나 검술이나, 평범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온 터. 그녀는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저 역시, 아시다시피 가족이라고 해서 마음이 맞는 것은 아닙니다.”
아스카의 기색이 누그러졌다.
“그렇겠지? 하긴 네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 너야말로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샤를로트가 갑자기 풋,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어?”
“아니, 아스카 선배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이상해서 말입니다. 선배는 그런 말을 못 하실 줄 알았거든요.”
아스카가 눈썹을 찡그렸다.
“뭐라는 거야. 날 대체 뭘로 보고.”
“글쎄요, 성질 급하고 제멋대로지만 실력 좋은 선배?”
“그건 부정 못 하겠네.”
어느새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잠깐의 대화를 나누며 좀 더 편안해진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