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14
313
헬무트
313화
고양이 생활을 즐기는 엘라가처럼 이그렐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핑크색 머리카락과 진홍색 눈동자. 가시성 있는 그녀의 미모는 먼 거리에서도 눈에 띄었다.
게다가 그녀는 엄청난 미인이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아니 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와!”
이그렐이 길을 지날 때마다 주변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골목길에서 나오다가 그녀를 마주치고 손에 쥔 바구니를 떨어트린 사람도 있었다.
자연스레 엄청난 수군거림이 따라왔다.
“저 여자분은 누구지? 로드릴의 손님인가?”
“어제 네가 봤어야 해! 이번에 온 손님들은 장난 아니라고!”
“죄다 미남에 미녀에 눈이 호사였다니까?”
“그래, 시안 녀석만 빼놓고 다들 그랬지.”
마지막은 당사자에게 유독 슬프게 들릴 만한 소리였다.
쏟아지는 탄성이 거슬린 결국 이그렐은 한 명을 붙들고 물었다. 정말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악력이 세!’
이그렐이 넌지시 물었다. 반쯤 협박하는 투였다.
“왜 사람을 보고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지르지?”
“아, 아니…… 너무 미인이시라서요.”
청년은 어리바리한 말투로 대답했다. 호들갑스럽게 환호성을 지를 때는 언제고, 막상 이그렐한테 붙들려 있자, 귀까지 빨개졌다.
“미인? 그럼 나한테 관심이 있나?”
“제, 제가 어떻게 감히…….”
이그렐의 입가가 위로 들렸다.
“맥없는 수컷이로군. 이렇게 아름다운 암컷이 있다면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청년은 상대가 아무리 미인이라도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감하다 못해서 훅 들어오는 태도, 무섭기까지 하다.
“설마 내가 네 취향이 아니야?”
“아아, 저, 저……! 취향의 벽을 뛰어넘는 미인이시기는 한데…… 전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와 아이가……!”
아내도 연인도 아니고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을 뿐인 청년은 임기응변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내와 아이를 가져다가 붙였다.
“흐음, 그래? 임자 있는 수컷을 건드는 건 아니지.”
이그렐은 청년을 그대로 놔주었다. 아니, 내던졌다.
쿵! 엉덩방아를 찧은 청년은 겁에 질려 부리나케 자리를 박차고 도망쳤다. 마치 엄청나게 거대한 존재의 손에 들렸다가 풀려난 것처럼 섬뜩했다.
“시시하기는.”
이그렐이 혀를 쯧 하고 찼다.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가. 패기가 없고 비리비리한 수컷이다.
자고로 강인함이란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법. 인간들이 우글거린다는 도시에 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여기서 머물러야 했다.
‘재미없군. 어디 다른 녀석을 찾아볼까.’
어쩐지 ‘인간을 꼬셔 본다’는 목적보다는 ‘인간을 격파한다’라는 명목에 가까워진 이그렐이었다.
*
종일 마을에서 놀다온 엘라가가 뭔가를 시안네 집 문 앞에 탁 내려놓았다.
그때 마침 문을 열고 나오던 시안의 여동생 시에나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녀의 비명을 들은 온 집안 식구들이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집 밖으로 나온 시안이 안면을 찡그리며 엘라가가 갖다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엘라가, 이게 뭐예요?”
엘라가가 거기에 갖다 놓은 것은 쥐 시체였다.
산에 살 것 같은 아주 큼지막하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쥐.
앞발로 후려치자마자 절명했는지 외관상으로 보기엔 상처 하나 없었다.
[고양이는 사냥감을 잡아다 주며 성의 표시를 한다고 들었다. 여기에 머무르는 김에 잡아 온 거야. 손님이 주는 거니 감사히 받도록.]엘라가 거만한 말투로 대꾸했다.
시에나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치건 말건 보란 듯이 느긋하게 그 자리에 앉아있던 엘라가였다.
시안이 쥐 시체를 덜렁덜렁 흔들며 말했다.
“아니…… 진짜 고양이신 줄 아나. 이런 거 안 주셔도 되거든요. 시에나가 놀랐잖아요.”
[인간에게는 먹기 적당한 크기 아닌가? 내가 사냥감 물어다 주면 다들 좋아했는데.]엘라가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헬무트를 키울 때도 그랬지만, 세라 모녀에게도 매일 사냥해서 식량을 공급했던 엘라가다.
파헤의 숲에선 먹을 것을 구하기가 그리 쉽지 않아서, 그나마 살이 야들야들해 보이는 놈으로 잡아다 주면 좋아했다.
자기가 잡아 온 사냥감을 인간들이 요린지 뭔지 해서 먹는 걸 보는 건 엘라가의 낙이었다.
시안이 이마를 짚었다.
“보통 인간은 굶어 죽기 직전 아니면 쥐는 안 먹거든요?”
[그래? 그럼 놓아줘.]마침 그때, 시안의 손에 잡혀 있던 쥐가 갑자기 몸부림치며 이를 보였다. 찍!
“우왁!”
시안이 기겁하고 손을 놓았다. 바닥에 안착한 쥐는 쏜살같이 달려서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엘라가가 불만스럽게 냐옹거렸다.
[기껏 기절시켜서 산채로 싱싱하게 데려왔더니 쯧쯧. 인간 주제에 뭘 가려. 주는 대로 먹을 것이지.]“뭐라는 거예요, 인간 무시 발언 좀 그만하세요.”
놀란 가슴이 달래지지 않는다. 쥐를 물어다가 집 앞에 놓는 것은 거의 저주 수준 아닌가.
죽은 쥐가 아니라 시체를 채울 일이 없다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너, 헬무트 친구라고 점점 더 기어오른다? 무사할 만하니까 무시하는 거지! 난 간다.]냥! 엘라가는 콧방귀 끼며 표표하게 걸어가 버렸다. 아마 마을 쪽에서 적당히 마음에 드는 바구니에 들어가서 자려는 듯했다.
완전히 고양이 생활에 적응해버린 데다가, 모두가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 버릇이 더 나빠진 엘라가였다.
시에나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헬무트가 일련의 광경을 보고 떨떠름한 기색을 떠올렸다.
어쨌든 엘라가를 관리하기로 한 건 그였다. 사고를 치긴 했지만, 어째 대단찮은 사고이긴 했다.
시안이 그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여어, 헬무트 데이트는 잘 갔다 왔냐?”
헬무트는 단박에 부인했다.
“데이트 아니야.”
“그래? 그거 알아? 이 근처 숲에는 정령이 우글거린다는 거. 정령 마법사라면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강은 알 수 있지. 물론, 내가 의도해서 알아보려던 건 아니지만 말이야. 난 그저, 너와 아레아가 숲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굉장히 분위기가 좋았다지? 그게 데이트가 아니면 뭐겠어?”
“데이트 아니야. 정령이 네게 거짓말한 거겠지.”
“와, 헬무트. 정령은 거짓말하지 않아. 너야말로 이젠 태연하게 거짓말도 잘하네.”
“난 이만 가본다.”
불리한 대화는 피하면 된다. 헬무트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등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헬무트, 잠시만.”
나와 있던 테라가 그를 붙잡아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잘됐네요.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어요.”
그녀가 시안에게 슥 눈길을 주자, 시안은 눈치 빠르게 집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달칵. 그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나와 계약한 로드릴의 대지의 정령을 만나러 가죠.”
그녀는 미소를 띤 얼굴로 덧붙였다.
“나의 정령이, 당신을 보길 원하네요.”
헬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홀로 어딘가로 불려가는 것에 트라우마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믿었던 상대에게 입은 상처란 그렇게도 오래가는 것이다. 하물며 친구인 시안의 어머니라도, 경각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의 헬무트와 지금의 헬무트는 달랐다. 그때 헬무트는, 자신을 지키지 못할 만큼 나약해졌던 상태.
만약 그때 몸이 온전했다면, 헬무트는 그 함정을 돌파하여 도주했으리라.
“여기서 멀지 않답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검을 가져가도 좋아요.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 파동을 당신의 보호자가 모르지 않을 텐데. 무엇이 걱정인가요?”
테라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녀도 헬무트가 겪은 경험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가지요.”
헬무트는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검은 항상 허리에 차고 있었으니까.
테라는 마을을 통해서가 아닌, 시안의 집 뒤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서 앞서 걸어갔다.
십여 분 가까이 걸어 올랐을까. 헬무트는 불현듯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눈앞이 환해지며 공기가 갑자기 맑아졌다.
갑자기 문을 넘어 다른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감각이 비틀리고 사위가 뭉그러지는 듯한 현기증.
그리고 다음 순간 헬무트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언가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것을.
저절로 허리춤에 손이 갔다. 헬무트는 가까스로 검을 뽑아 휘두르려는 충동을 억제했다.
테라가 그에게 찬찬히 시선을 맞추며 속삭였다.
“정령의 공간이지요. 불쾌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줘요.”
그녀의 나직한 음성이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헬무트는 눈을 깜빡였다.
그를 점령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사라지고,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숲속의 공터.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은은하고 몽환적인 빛. 그 빛은 하늘에서 내리꽂히듯이 그 가운데, 공터의 커다란 돌비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 돌 한가운데에 새겨진 문양. 은은하게 빛나는 그것이 대지의 정령을 의미하는 문자임을 헬무트는 바로 알아챘다.
“정령이 당신을 보길 원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봐요. 여기로 당신을 부르기를 원한 걸 보면, 내게도 알리지 않고 오직 당신에게만 하고 싶은 이야기겠지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헬무트는 은은한 빛이 휘도는 비석을 내려다보았다. 정령은 물질계의 존재가 아니니, 엘라가와 같은 마물과는 다르리라. 그러나 이 막대한 기운은……. 헬무트가 본 중에 가장 강력한 생명체는 엘라가였다.
그러나 그를 능가하는 힘을 가진 존재와 마주한 적이 없지는 않다.
‘루멘이 그랬지.’
신성 결계가 루멘 그 자체라고 하던가. 루멘에게서 느꼈던 그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 대지의 정령은, 어쩌면 루멘과 유사한 신적인 존재.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령이라지 않던가.
“비석 위에 손을 얹으세요.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말할 겁니다.”
테라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정령 마법사가 아닌 누군가를 데려와 본 적은 그녀에게도 없었다.
대지의 정령이 나서서 이렇게 누군가를 부르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상황.
정령은 정령 마법사에게만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는, 정령 마법사를 통해서 상대에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본신이 깃든 공간으로 누군가를 불러내어 굳이 직접 이야기하겠단 것은 중간에 끼어야 할 정령 마법사를 배제하겠다는 뜻.
그 의중은 테라로서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왜…….’
하지만 정령은 악한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테라는 대지의 정령이 헬무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믿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지 않는 한, 그녀와 계약한 대지의 정령도 헬무트를 해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움직인 헬무트의 손이 비석 위에서 멈추었다. 잠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