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2
31
헬무트
31화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었다. 헬무트의 고개가 비딱하게 기울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내뱉었다.
“난 네 바지를 벗기고 싶진 않으니 무릎 꿇고 빌면 이대로 보내 줄게.”
평이한 어조였지만 조롱하는 듯이 들렸다.
알몸으로 야영지 근처에 거꾸로 매달아 톡톡히 망신을 줘도 시원치 않겠지만, 약자에겐 자비로워야 한다. 다리언의 가르침이었다.
헬무트는 팔짱을 낀 채 켈롭을 응시했다. 어디 한 번 빌어보라는 식으로.
“이, 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고작 열네 살의 소년이었다. 4급 용병 따위가 자신에게 이럴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놈은 무표정한 얼굴로 켈롭을 비웃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았다. 때로 자존심은 현실감을 무너뜨린다.
“누가, 너 따위에게 빌 것 같으냐!”
몸을 벌떡 일으킨 켈롭이 헬무트에게 머리를 들이받았다. 헬무트는 가볍게 옆으로 몸을 틀어 피해 냈다.
“으아아아아아!”
켈롭이 소리를 내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근력 하나는 타리크 용병단에서 손꼽히는 그였다.
켈롭이 휘두른 검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넌 방금 마지막 기회를 걷어찼어.”
헬무트는 차분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제대로 된 기술도 없는 자. 근래에는 훈련도 하지 않아서 가뜩이나 무뎌진 몸이다. 한쪽 팔이 부러져 균형도 흐트러져 있다.
막무가내로 내지르는 검을 피하는 건 간단하다. 품으로 파고든 헬무트가 그의 발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명검다운 예리함이었다. 마찰 없이 헬무트의 검이 켈롭의 다리 살을 가르고 지나갔다. 혈관을 건드린 탓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으헉!”
켈롭이 비틀거리는 찰나, 그를 스쳐 간 헬무트는 뒤에서 다시 검을 찔렀다.
검 끝이 파고든 다른 쪽 다리에서도 피가 줄줄 흘렀다. 두발짐승인 인간은 다리에 상처를 입으면 움직일 수단을 잃는다.
털썩! 켈롭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헬무트의 움직임은 바람처럼 빨랐다. 대처하긴커녕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켈롭의 눈에 공포심이 떠올랐다. 쓰러진 그에게로 뚜벅이며 다가오는 헬무트가 사신처럼 보였다.
헬무트는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피를 보자, 몸속에서 흉포한 충동이 끓어올랐다.
그동안의 인내가 살의로 화한 듯이,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간다.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난자하여 찢어 죽이고 싶다.
죽여! 어차피 놈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야!
제 안에서 울려 퍼지는 사악하고 사나운 외침.
‘이건.’
그러나 헬무트는 우뚝 멈추었다. 정신이 돌아왔다. 이성을 지배하는 어둠의 의지. 부자연스러울 만큼 강력하게 자신을 빨아들이는 이 감정.
헬무트는 이것의 정체를 알았다. 어둠의 싹. 결계를 통과하며 사그라진 것처럼 보였던 그것이, 심장 안쪽에 똬리를 튼 그 작은 존재가 헬무트의 살의에 부응하여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자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다리언의 유언이 머리를 때렸다. 켈롭은 헬무트를 죽이려고 했다. 헬무트가 그를 죽이는 것은 살육이 아니다. 정당한 일.
하지만 그것이 살의에 사로잡혀 이루어져선 안 된다.
헬무트는 문득 자신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숨을 고르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너는 나를 지배할 수 없어.’
어둠의 싹을 향해 선언한 헬무트는 비스를 일으켜 그것을 심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미세하게 커진 부피가 거슬렸다. 부정의 감정을 먹고 산다던가.
이 숲에 자리한 마기가 어둠의 싹을 끌어내는 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다리언이 마기를 멀리하라고 했었지.’
이 의뢰가 끝나면 그 말을 지켜야 할 터였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난 후에야 헬무트는 켈롭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멈춘 사이, 켈롭이 기다시피 뛰어 야영지를 향해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뭐 저런 게 다 있어! 저건 인간이 아니야!’
아무리 어둡다지만 3급 용병인 그가 움직임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다니!
그건 2급 용병인 형의 움직임보다도 빨랐다. 열네 살 소년에게 가능한 움직임이 아니다.
다리에서 줄줄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공포심에 모든 감각이 마비된 켈롭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생존 본능만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살아남겠단 의지가 그의 다리를 움직였다.
야영지가 가까워질수록 켈롭에게 희망이 돌아왔다. 어느 새부턴가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켈롭은 정신없이 달렸다.
‘거의 다 왔어. 저기서 소리를 지르면!’
헬무트는 뒤늦게 켈롭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먹잇감을 쫓아 그 목덜미에 화살을 박아 넣는 것이 사냥꾼의 본능.
그러나 사냥꾼이 그 뒷모습을 발견한 순간, 허공에서 거대한 뭔가가 먹잇감을 덮쳐들었다.
흡사 밤이 밤을 덮은 것 같았다. 켈롭은 장님이 된 것처럼 새카맣게 어두워진 시야를 느꼈다.
‘뭐지?’
콰직! 영원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켈롭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헬무트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의 눈은 정확히 어둠 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 녀석이군.’
이 짙은 마기. 예상했던 그대로, 놈은 다시 나타났다. 익숙한 형상이 모닥불의 불빛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원숭이.
붉은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놈은 제가 깔고 앉은 인간의 등에 손톱을 밀어 넣었다.
뿌득! 근육과 등뼈를 부수고 지나간 손톱이 목표점에 이르렀다.
방금 숨이 멎은 인간에게서 싱싱한 심장을 꺼낸 놈이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그건 내 거야.”
헬무트는 멈춰선 채로 말했다. 놀랍도록 평온한 목소리였다.
보랏빛 얼굴의 원숭이가 심장을 손안에서 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키에에에?
“넌 지금 내걸 가로챈 거라고.”
헬무트는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했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헬무트는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 제대로 화풀이도 하지 못했다. 켈롭이 맞이하기엔 너무도 편안한 죽음 아닌가.
쿵! 쿵! 켈롭의 심장을 쥔 원숭이가 헬무트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열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선 놈이 보란 듯이 쩝쩝 소리를 내며 뻘건 고깃덩이를 씹어 삼켰다. 꼭 약을 올리려는 것 같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군.”
헬무트는 확신했다. 이 원숭이 형태의 마물은 지능이 높다.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못 되겠지만, 지능이 높은 녀석이 마성까지 발달한다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인간 대부분은 마물과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헬무트는 달랐다. 그는 마물이 말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파헤의 숲에서 자랐으니까.
-키에에에.
원숭이 마물이 헬무트를 관찰하듯이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 비하면 작디작은 어린 인간이었다.
살도 연약하고, 뼈도 가느니 입에 넣으면 부드럽게 씹힐 것이다.
인간 주제에 자신을 보며 다른 인간들처럼 벌벌 떨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좀 이상하다. 인간이지만, 희미하게 마물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한테 덤비면 넌 죽어.”
헬무트는 짤막하게 내뱉었다. 마물은 상대의 강함을 견주어 볼 줄 안다.
헬무트는 놈과 시선을 마주하고 희미한 마기가 섞인 자신의 비스를 드러냈다.
마물이 마기를 분출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회색의 비스가 헬무트의 몸을 뿌옇게 감쌌다.
만만찮은 비스를 느낀 놈이 바싹 털을 곤두세웠다. 위협하듯 마기를 담아 괴성을 내질렀다.
-키에에에에엑!
헬무트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인간들이 깨어나겠지?”
실제로 야영지에 웅성웅성, 소음이 일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이어 철컹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잠에서 깨어나 검을 집어 드는 것 같았다.
고요하던 대기가 긴장감으로 바싹 일어섰다. 헬무트는 켈롭의 시체 쪽으로 손가락질했다.
“너한테 줄 테니, 저 시체나 가지고 가.”
등이 꿰뚫린 거야 상관없지만 다리에 난 검상이 문제다. 죽여서 파묻거나 치워 버릴 셈이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아닌가?
‘내 손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게 아깝군.’
마음이 흔들린다. 손이 다시 검으로 갔다.
이 원숭이 마물, 죽여 버리고 실력을 입증해 보일까? 뷰탄 상회에서 급료를 얼마나 올려 줄까?
살짝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아까 타냐의 반응도 그렇고,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의 강함을 드러내도 되는 상황인지, 확실하게 분별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난 인간들이 무장한 채 괴성이 들린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마물은 부하들도 없이 혼자서 인간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다. 빨리 결정해야 한다. 해치우고 도주할지, 아니면 그대로 도주할지.
놈은 머뭇거렸다. 헬무트에게서 느낀 심상치 않은 비스가 놈을 혼란하게 했다.
희미한 마기가 느껴지는 비스는 얕볼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인간인데? 인간은 먹이다. 그게 마물에게 새겨진 본능.
보통의 마물이라면 눈앞의 인간이 강하다는 걸 꿰뚫어 보지 못하고 본능에 따랐을 테지만, 높은 지능이 놈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대로 공격하면 안 된다는 판단. 하지만 앞에 있는 건 덜 자란 인간이다.
그대로 도망치기엔 놈에게도 자존심이 있었다. 자존심과 지능, 그리고 본능이 어지럽게 충돌했다.
그 사이 횃불을 손에 든 용병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들 쪽과 헬무트 쪽을 번갈아 곁눈질하던 놈이 결국 움직였다.
-키에에에.
두고 보자는 말처럼 소리를 낸 놈이 몸을 날렸다.
잊지 않고 켈롭의 시체를 챙겨 든 놈이 위로 뛰어올라 나무를 타고 사라져갔다.
헬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라는 마음 반, 아쉽다는 마음 반이었다.
그는 홀로 남았다.
헬무트는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야영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에서 그를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거기 누구야!”
“누구지? 사람인가?”
“저예요.”
헬무트가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페이스 용병단 사람들이 빠르게 다가섰다.
“헬무트?”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헬무트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꼭 무슨 일을 당할 뻔했던 것처럼.
“너, 네가 왜 여기에.”
“일단 야영지로 가서 이야기하자.”
퓌엔이 헬무트의 어깨를 잡고 이끌었다. 헬무트는 페이스 용병단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야영지로 돌아왔다.
마일즈가 심각한 얼굴로 야영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헬무트는 마일즈의 앞으로 이끌려 갔다.
다른 이들은 주변 수색을 진행할 것이다.
살벌하게 굳은 얼굴의 용병들 사이에 서게 된 헬무트는 마일즈를 마주 봤다. 이마의 주름이 그의 근심을 나타내는 듯했다.
타리크 용병단의 2급 용병 두 명, 퓌엔과 타냐가 함께한 자리였다. 심문하듯이 질문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해 봐라.”
“너는 왜 그런 곳에 있었던 거냐.”
“야영지를 함부로 이탈해선 안 된다는 거 알잖아.”
헬무트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대변을 보러 가고 있었어요. 냄새가 날 것 같아서 좀 멀리 가려고 했지요.”
그제야 이해가 가는 듯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타냐만 비난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아까 습격이 있었는데 경솔했어!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갔어야지.”
“타냐, 지금 잘잘못 따질 때가 아니잖아.”
퓌엔이 끼어들자 마일즈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계속해 보거라.”
“야영지를 벗어나서 걷는데 누가 절 따라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켈롭이었어요.”
“켈롭이?”
타리크 용병단의 두 2급 용병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켈롭이 보이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타냐가 벌컥 화를 냈다. 청자들의 호응이 좋았다. 자신이 이야기를 꿰어 맞추는데 재주가 있는 게 아닐까?
헬무트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절 붙잡으려고 하길래 도망쳤죠. 그러다가 야영지에서 좀 더 멀어졌는데, 갑자기 아까 본 괴물이 나타났어요. 아까 그 커다란 놈이요. 여기까지 쫓아왔더군요.”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3급 용병 둘을 죽인 놈이다. 경계심이 바짝 곤두섰다.
“저보다 켈롭이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했는지 켈롭을 덮쳤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깨어나자 켈롭을 물고 도망쳤어요. 그게 끝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