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22
321
헬무트
321화
곧 그들이 들어선 곳은 피델리스 저택이 아닌 근처 여관의 넓은 방이었다.
피델리스 저택으로 들어서는 건, 시안 일행에게 적진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던전은 아니지만, 피델리스 저택은 피델리스 공작의 영역이다.
그리고 피델리스 공작은, 시안보다 우위에 있는 마법사였다. 아스카와 샤를로트가 있대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
“베네타 왕이 원하는 게 뭐죠?”
시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테레사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대꾸했다.
“그린카나에서는 오랜 세월 무상으로 베네타 왕국의 혜택을 입어 왔어. 이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아닐까?”
시안의 눈썹이 바로 위로 들렸다.
“작디작은 그린카나에서 이제껏 뜯어 본 적 없는 거액의 세금을 뜯어내려고 주변 마을과 거래도 죄 끊고 압박할 만큼 베네타 왕국이 궁핍하지는 않을 텐데요?”
“계승권 전쟁은 비록 길지 않았으나, 재정 소모는 적지 않았지.”
“돈을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돌리지 말고 바라는 걸 말하세요.”
시안답지 않은 박력에 아스카가 오, 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테레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왕께서는 7왕자에 불과하셨지. 왕위에 오를 거라고 기대되지 않았던 7왕자. 하지만 왕위에 오르셨고.”
비록 가장 세력이 강한 두 왕자가 다른 왕자들을 모조리 살해한 데다가, 서로끼리 다투느라 상처를 입긴 했어도 그의 능력은 폄하될 만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그리 쉬운가.
“귀족들 사이에서 그를 인정치 않는 이들이 있겠군요. 그래서 그린카나를 이용하기로 했나요? 확고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그래, 내 의견이고, 계획이었어.”
쿵!
시안의 주먹이 테레사와 그사이에 놓인 탁자를 후려쳤다. 그의 표정이 통증으로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눈치챈 아스카가 옆에서 얄밉게 떠들어 댔다.
“개뿔 힘도 없는 손으로 탁자는 왜 친담.”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시안의 눈길이 아스카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그때 샤를로트가 나섰다.
“아스카 선배, 조용히 하세요!”
샤를로트의 일갈에 아스카의 입이 바로 다물렸다. 왕년의 미친개가 전용 입마개를 만난 것처럼.
샤를로트가 차갑게 비난했다.
“테레사 선배는 시안과 친분이 있어요. 그가 그린카나의 로드릴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로드릴을 이용하려고 했다고요?”
테레사는 다리를 꼰 채 도도한 태도로 그녀를 응시했다.
“졸업한 나에게 내 아카데미 시절 친분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이겠니? 나는 마법사고, 귀족이며 국왕 폐하의 신하지. 나는 나의 일을 했을 뿐이야. 나의 왕을 위하여.”
샤를로트의 입이 다물렸다. 그녀는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테레사를 마주 보았다.
한색에 가까운 검은 머리카락의 샤를로트는 오히려 뜨거웠고, 붉은 갈색 머리카락의 테레사는 어디까지나 우아하고 차분했다.
분을 삭인 시안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마녀. 테레사 선배다워.”
어차피 별 기대는 없었다. 뒤통수 칠 의도나 아니었다는 게 다행이다.
테레사의 짐작대로 시안은 애초부터 테레사에게 배신감을 느낄 만한 기대가 없었다.
마법학부 수석에게 그런 인간적인 기대를 품는다면 어리석은 짓일 터. 검술학부 출신들은 좀 사이가 돈독한 모양이지만, 마법학부 출신한테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뭐, 좋아요. 로드릴은 상징적인 존재니까. 현 베네타 왕에게 그런 식으로 효용 가치가 있다는 건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좀 더 온건한 방식으로 접촉할 수 있지 않았냐고 비난하는 듯한 눈길이었다.
테레사는 진한 미소를 띠었다.
“로드릴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야. 전설적인 정령 마법사지. 그래야 저 로드릴마저 고개를 수그린 왕이라는 대외적인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그것이 국왕 폐하의 힘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린카나에서는 이런 식이 아니면 거래하려 들지 않겠지.”
시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고개를 수그렸다고 평가받아야 할 입장에서는 썩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는군요.”
“대신해서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작위든 독립 국가 지위든 재물이든. 공식 문서로 남겨 주지.”
“……그건 부모님과 논의해보지요. 나로서는 결정권이 없으니까.”
“그렇겠지. 네게 전달자 역할을 맡길 셈이었어. 조만간 그린카나를 방문하지. 내가 직접.”
묘하게 기분 나쁜 뉘앙스의 대답이었다. 테레사는 냉큼 덧붙였다.
“인질은 무사해. 이거 하나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
“그래야겠지요. 그런데 방식은 말 안 했네요? 베네타의 왕은 로드릴이 정확히 뭘 어떻게 하길 바라죠? 설마 무릎 꿇고 마법사의 맹세라도 하라는 건 아니겠죠?”
“응할 만한 일일 거야. 대단치 않을 거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일.”
“그린카나를 찾아와 직접 말하실 건가요?”
“그래.”
시안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로서는 테레사 선배를 믿고 부모님께 말씀드려도 좋을지 알 수 없지만. 선배라면 로드릴의 힘을 아실 테니까. 일단은 믿어 보죠.”
“그래, 정령 마법사 로드릴과 충돌해봤자 이쪽도 좋을 게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래 봬도 그레타 아카데미 동문이잖아? 동문을 믿어 보라고.”
테레사가 시안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시안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학연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그레타 아카데미 출신자들이다. 따로 떨어져 있는 헬무트와 아레아까지도.
대화가 일단락되자 테레사의 시선이 샤를로트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샤를로트. 넌 이제 6학년이잖아? 아스카야 그렇다 치고,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흥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누군들 알겠는가. 그들이 누군가를 구하러 파헤의 숲을 들어갔다 나오는 모험을 했을 거라고.
이런 질문을 받을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샤를로트는 잠시 망설인 후, 대답했다.
“……한 번쯤 졸업 전에 세상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조기 졸업 요건이 됩니다.”
“리노사의 대공녀가 학기 중에 아카데미를 빠져나와 이곳에 있는 걸, 리노사에서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샤를로트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셨군요.”
“소문날 만큼 유명한 사실이지. 그리고 난 소문에 어둡지 않고. 뭐, 상관없어. 나는 로드릴이 거래에만 응한다면 네 소재에 대해서 리노사에 전달하지 않을 테니까.”
테레사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의미심장했다.
마치,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그 사실을 볼모로 삼을 것처럼.
그러고도 남을 여자였다. 시안은 아스카와는 달리 샤를로트에게는 별 친근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헬무트를 배신한 리노사의 핏줄이었다. 샤를로트가 아스카와 무슨 관계가 되든 시안에게는 그 사실이 우선할 것이다.
‘별로 샤를로트가 밀고 당해도 상관없지만……, 아니 상관있나? 리노사에서 그린카나에 관심을 가지면 곤란하니까.’
헬무트가 있다는 게 발각되면 곤란하다.
그린카나의 사람들은 외부인 손님들에 대해서 입단속이 되어 있는 편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시안은 단번에 잘랐다.
“협박 그만하고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죠.”
그들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고개를 갸웃한 테레사가 물었다.
“그런데 너희, 셋뿐이야? 그린카나에 들어선 사람은 셋이 아니었는데?”
누가 먼저 대답하기 전에 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온 건 셋뿐이에요.”
“너희와 함께 왔다는 검은 머리의 남자……. 그는 누구지?”
뜨끔한 질문이었지만, 시안은 아스카와 샤를로트가 반응하기 전에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남의 마을 손님에 대해서 아실 필요 없어요.”
‘헬무트가 여기 있다는 건 그녀가 몰라야 하니까.’
테레사는 헬무트가 샤를로트의 오빠이며 리노사의 핏줄이라는 걸 모를 것이다. 그것은 리노사에서도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헬무트는 리노사를 떠나서 실종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리노사는 그런 면에서 흠잡을 데 없이 헬무트의 존재를 지워 냈다. 예전에도 갓 태어난 그를 그리했듯이.
그렇다고 해도, 헬무트의 존재 자체가 누구에게든 알려지는 건 꺼려졌다.
언젠가 이루어질 일일지라도, 아직은 아니었다.
테레사가 그린카나를 방문해도 숨길 수 있는 사실이다. 헬무트가 모습을 감추면 되니까.
‘아직은 좀 이르지만 안티올에게 돌려보내도 되겠지.’
헬무트를 테라에게 보여준 것으로 시안은 로드릴의 정령 마법사로서 의무를 다했다.
또한 헬무트도 그녀에게 자신을 증명했다. 처음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터였다.
테레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들을 보내 주었다.
“그래? 그럼, 조만간 다시 보지. 그린카나에서 말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대화는 끝났다.
시안 일행은 곧바로 헬무트 쪽과 합류하기 위해 도시로 움직였다.
시안이 뒤를 돌아보면서 투덜거렸다.
“테레사 선배, 아카데미에 있을 때보다 더 세련되게 기분 나빠졌어. 사회물을 먹고 여러 모로 성장한 느낌인데. 만만치 않아.”
아스카가 생각 없이 말을 받았다.
“그건 예뻐졌다는 뜻이냐?”
테레사는 마녀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피델리스를 대표할 만한 미인이기도 했다.
시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네 눈에 그렇게 보이나 봐.”
“응? 뭐, 테레사 선배는 아카데미에서 소문난 미인 아니었던가.”
거기까지 생각 없이 말할 수 있었던 아스카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샤를로트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카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저 선배 못지않게 너도 예쁘지. 뭐랄까, 타입이 다르잖아. 뭐, 그녀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그렇군요.”
왜 그런 소리를 자신한테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다.
샤를로트는 고개를 살짝 갸웃한 뒤, 아스카의 뺨에 손을 대었다.
“어…… 어?”
“머리카락이 묻어서요. 실례했습니다.”
태연하게 아스카의 머리카락을 털어 날린 샤를로트는 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 얼이 빠져 있던 아스카는 뒤늦게 그녀를 뒤따랐다. 그 둘을 보니 한숨이 푹푹 나왔다.
‘멍청한 자식. 그럴 땐 네가 더 예쁘다고 해야 하는 거다.’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고 싶어졌다. 학창 시절에 둘 다 썩었는데 왜 저런 녀석에게만…….
세상이 원망스러워지는 시안이었다.
‘헬무트도, 아스카도 다 있는데 왜 나만 없는 거지!’
이상한 일이다. 셋 중 성격은 이쪽이 월등하게 나은데.
물론 외모는 자신이 가장 떨어졌지만, 그건 취향 차이 아닌가.
얼굴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검술학부인 저 둘과 시안의 몸은 차이가 많이 났다. 하지만 시안은 대충 뭉뚱그려 취향 차이로 묶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었다.
시안은 내심 투덜거리면서 샤를로트와 아스카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