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27
326
헬무트
326화
‘결전의 날이로군.’
왕실 마법사의 복장으로 차려입은 테레사가 눈을 빛냈다.
왕의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그녀가 하려는 일에 반대하진 않았다. 곧 끝날 것이다.
테레사가 방문하기 전, 그린카나에 먼저 날아든 것은 서신 한 장이었다.
베네타 왕국의 병사 한 명이 말을 타고 그린카나를 찾았다.
그가 로드릴을 방문할 때 마을 사람들은 온통 경계심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오후에 방문하겠다는 서신 한 장. 그것은 다시 말해서, 왕의 사신을 영접할 준비를 하라는 귀족스러운 방식의 통보이기도 했다.
그린카나는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대단할 거 없는 준비였다.
아레아와 헬무트는 비로소 방문한다는 피델리스의 마법사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아레아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테레사. 그 선배가 피델리스였어? 어쩐지 나를 따돌리려고 하더라니.”
시안을 노려보는 눈빛은 얼음이 박힌 듯 싸늘했다. 그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것처럼. 시안이 손사래를 쳤다.
“흥분해서 때려죽이거나 하면 곤란해. 옛날 일이잖아?”
단지 그레타 아카데미를 다닌지 오래된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마법 학부였던가?”
그 태도에 묘하게 아레아의 마음이 풀렸다.
“뭐, 그래. 옛날 일이지. 그녀가 나를 알아볼 수도 없을 테니까.”
이쪽이 변신 마법을 걸고 있으면, 테레사 피델리스가 알아볼 수 있을 리 없다. 아레아와 그녀의 마법 실력은 현저하게 차이 나니까.
그때 문득 턱을 괴고 있던 이그렐이 입을 열었다.
“이거 이거 이제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는 거다 이거지?”
시안을 며칠 괴롭히다가 다시 심드렁해진 그녀였다. 시안이 테라에게 딱 달라붙어 있으니, 건드리기도 쉽지 않았다.
테라는 이그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시안은 거절했고,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세요.’
테라나 아제르도 마물 며느리는 받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그렐도 어차피 심심해서 장난친 것이니 쉽게 그만둘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새로운 사태에 대해서 잠시 궁리해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근데 너희 쪽, 너무 무르게 나가는 거 아니야? 그 테레사 피델리스인가 뭔가가 베네타 왕의 신하라면서. 그쪽에서도 너희 마을 사람을 인질로 잡았으니, 이쪽에서도 그쪽을 인질로 잡으면 되잖아. 간단하군!”
이그렐이 이런 천재가 있냐는 듯이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일리가 있긴 한 말이었다.
시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그냥 싸우자는 거잖아요.”
“인질로서의 가치는 그쪽이 더 있을 텐데? 이쪽은 고작 마을 사람 하나지만, 저쪽은 왕의 신하라며. 그것도 좀 높은 공작인가 뭔가의 딸. 거래에 응하지 않을 수 없을걸?”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그렐이었다. 엘라가도 호응했다.
[듣다 보니 맞는 소리로군. 저쪽에서 오면 그냥 이쪽에서도 인질로 삼아버려!]“그럼 사태가 더 커져요. 그렇게 교환한다고 쳐도, 베네타 왕국에선 우리 쪽에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설 거라고요. 저쪽은 왕국이라 온갖 치사한 방법으로 이 작은 마을을 괴롭힐 수 있어요. 그쪽에서 비겁했다고 우리 쪽도 비겁해질 순 없지요. 좀 더 나은 해결책이 있을 거예요.”
이그렐이 팔짱을 꼈다.
“힘이 있는 쪽이 참아야 한다니 이해할 수 없군.”
[맞아.]한쪽에서 엘라가가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약한 녀석이 기어오르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짓밟아줘야 한다.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하지만 나라의 힘은 개인의 힘과 다르고, 이쪽에선 단 한 명도 잃어선 안 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제발 조용히 계셔주세요. 잘하면 왕성에도 가볼 수 있을 테니까.”
시안은 한숨을 푹푹 쉬며 일행을 진정시켰다.
이그렐만 돌발행동하지 않으면 일단 사고 칠 사람은 없는 거였다. 결국 이그렐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헬무트와 아레아는 모습을 바꾼 채로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일단은 집주인인 시안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옳았다.
*
오후가 되어 도착한 테레사는 위풍당당했다. 그녀는 왕실 마법사로브를 입고 장식용 갑옷을 입은 말 위에 올라탄 채 기사들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왕의 수하들을 다스리는 그 자리가 그녀에게는 제 몸처럼 익숙해 보였다.
‘나 그레타 아카데미를 나와서 이렇게 성공했다!’를 보여주는 것처럼.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다.
물론, 애초에 피델리스 공작의 딸로서 테레사 피델리스의 앞에는 탄탄대로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단기간에 이런 위치에까지 오른 것은 엄연히 그녀가 거둔 성취였다.
테레사는 마을 초입까지 나온 로드릴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에서 내렸다.
“베네타 왕의 명을 받들어, 이곳을 찾았습니다.”
왕의 명을 받든 사신을 앞에 두고도, 모두 예를 취하긴커녕 차가운 눈빛으로 서서 그녀를 맞이했다.
로드릴의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린카나 사람들은 몇몇만 제외하고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간 채였다.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테레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쪽에서 보이는 성의이자 신뢰의 표시입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한 명의 남자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잡혀간 인질, 약초꾼 우베르였다.
안색이 창백하긴 했으나, 그는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그의 아내, 아만다가 달려 나와 그를 끌어안았다.
“여보!”
“아만다!”
둘은 도로 잡힐세라 재빨리 집 쪽으로 사라져갔다.
감격적인 상봉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고도, 테라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제멋대로 사람을 잡아가 놓고, 이젠 풀어주면서 성의와 신뢰라고 말하는군.”
테레사는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왕의 숲을 불법적으로 침입한 데 대가를 치른 것이랍니다. 그린카나 인근이 베네타 왕국령에 속한다는 사실을, 설마 잊고 계셨던 건 아니겠지요?”
“이 산맥은 베네타 왕국령에 속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대지의 정령도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 위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얼마 되지 않은 인간의 역사가 무슨 소용이던가.”
“그러나 로드릴을 제외한 그린카나의 인간들은 인간에 불과하지요. 여하간 우리 쪽에선 인질을 풀어드렸습니다. 인질에 대한 어떤 폭력적인 대우도 존재하지 않았고요. 비록 그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사고가 있기는 했으나, 약초꾼에게는 과분하게도 왕실 마법사의 치료가 주어졌지요.”
“후배의 거만함은 마음에 차지 않으나, 후배가 최소한의 조처를 했다는 것만은 인정하지.”
베네타 왕의 신하이지 피델리스 공작의 딸이지만, 동시에 테레사는 그레타 아카데미 출신의 후배이기도 했다.
테레사도 시안과 친분이 있다는 그 학연을 담보 삼아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니 테라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제 성의를 과소평가하시는군요. 하지만 사소한 시비는 이제 가리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는 게 그쪽에 유리할 테니. 그래서 바라는 것이 뭐지요?”
테라는 반듯한 공대로 돌아섰다. 어차피 당장 테레사와 충돌할 생각은 없었다.
테라가 무언가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베네타 왕 앞에서였다.
주변의 기사들을 물린 테레사가 테라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테라 님과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군요.”
테레사에게 다가서며 테라가 손을 뻗었다. 바닥으로부터 얇은 흙먼지가 밀려 올라왔다.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벽이, 어느덧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그들을 격리한 것이다.
“국왕 폐하께서는 대지의 정령사 로드릴이 왕성을 찾기를 바라십니다. 당신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베네타 왕국에 해가 될 존재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하시지요. 아시다시피 계승권 전쟁을 거쳐서 왕위에 오르신 분이라 신중하고, 경계심 많은 분이십니다. 자신의 영토 안에, 어떤 위험요인도 남겨 두고 싶어 하지 않으시지요.”
“거기가 함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지? 우리를 직접 보고 위험요인이라고 판단하게 될 수도 있잖나?”
“사람의 심성을 보실 줄 아는 분입니다. 테라 님을 보게 된다면 분명 이해하실 겁니다.”
딱 동네 유순한 아주머니처럼 보이는 테라였다. 물론, 제 나잇대의 아주머니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알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절대로 누군가를 나서서 해치거나 위협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제가 직접, 융숭한 대우로 여러분을 맞이할 겁니다. 그저 국왕 폐하와 담소를 나누고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사소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대지의 정령사 로드릴이 현 베네타 국왕에게 우호적이다.
혹은 그를 인정했다는 가시적인 증표가 될 테니. 그 후로 포장은 테레사가 할 일이었다.
테라가 혀를 찼다.
“왕에게 고개를 수그린 채로, 그의 명령 같은 부탁을 들으라는 거로군.”
“테라 님 입장에선 어렵지 않은 부탁이 될 겁니다. 어떤 걸 고려하고 계신지는 알고 있으나, 확정된 건 아니니 지금은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대신 원하시는 것들을 얻게 되실 겁니다. 작위는 원하시지 않을 것 같고, 왕의 보증이면 어떻겠습니까.”
“보증?”
“베네타 왕국에서는 그린카나의 자치권을 인정한다. 세금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베네타 왕국령의 마을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게 허락할 것이고, 이는 베네타 왕국이 유지되는 한 유효하리라. 뭐, 이 정도면 어떨까요. 왕의 인장이 박힌 문서로서 공증하지요. 또한 원하신다면 얼마간의 재물도요. 이건 국왕 폐하가 아닌, 그레타 아카데미의 후배로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학연도 모자라 돈으로까지 비빈다. 목적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수단을 다 이용한다는 점에서 테레사는 제대로 된 마법사였다.
테라도 살짝 기가 질리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테레사는 보통 마법사도 아니고 마법 학부 수석이다.
그러니까 성격이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는 점에서, 아카데미를 다녀봤던 테라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미 그런 이들을 접해봤으므로.
‘오랜 추억이 떠오르는구나.’
어쨌든 여기서는 승낙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한 터였다. 테라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은 알아듣겠다. 하지만 우리도 너희쪽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어.”
“일행을 데려오셔도 좋습니다. 그린카나의 전력이, 제가 생각한 것 이상이더군요.”
테레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누가 여기를 방문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테라도 한 가지 사실은 알았다. 그녀가 누구를 전력으로 셈했든, 거기에 엘라가와 이그렐은 포함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승낙하지.”
“그렇다면 준비할 시간을 드리지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마법을 통해 바로 왕성으로 이동하시게 될 겁니다. 저는 국왕 폐하께 보고 드려야겠군요.”
테레사는 미소로서 매듭지었다.
“평안한 하루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