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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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로군. 그간 잘 지냈나?”
검을 거둔 헬무트는 은밀히 제게 접근한 남자를 응시했다.
따지자면 그리 친밀하다거나 익숙한 사이는 아니었다.
처음의 만남이 독특하기는 했어도, 그 후로 정보에 듣느라 접촉한 것 외에는 마주한 적도 없다.
하지만 탈론의 인상은 강렬했다. 헬무트의 기억에 그를 새길 만큼.
“헬무트.”
탈론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헬무트는 그제야 대꾸했다.
“우리가 그런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의 모습은 마법인가? 바소르에 가 있을 때처럼? 테레사 피델리스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도 눈치채기 힘들었을 테지. 4년이면 한 사람이 썩어 사라지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니.”
“내가 썩어 사라지지 않아서 유감인가.”
“아니, 마법 때문에 성장한 원래의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쉽군.”
왠지 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대답이었다. 에단 쿠드로나 할 법한 말이었으니까. 탈론이 말을 이었다.
“아직 한 번의 정보가 남았지.”
“알고 있어.”
“난 네가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면 이미 세 번을 다 쓴 거로 착각하고 있다거나. 두 번째 정보를 요구한 지도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잖은가.”
“4년 동안 더 이상 알고 싶은 정보가 없었나 보지.”
그건 사실이었다. 어차피 배신당해 파헤의 숲에 떨어진 몸, 무엇을 더 알고 싶겠는가. 탈론이 파헤의 숲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닌데.
“나는 다르게 생각해.”
탈론의 눈빛에 묘한 빛이 서렸다.
“그 4년 동안 내게 무언가를 물을 수 없는 상황에 있었다거나.”
헬무트는 부인하는 대신 대답했다.
“묻고 싶은 것이 없었어. 하지만 지금은 물을 것이 있지.”
“대답해 주지. 아직 한 번이 남았으니까. 그 전에…….”
탈론은 고개를 돌려 어느 방향을 지목했다.
“귀하신 분이 기다리니 날 따라와 주었으면 좋겠군.”
“좋아.”
헬무트는 순순히 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뭘 준비했건 다 때려 부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바로 근처에 로드릴과 아레아, 엘라가까지 있다. 무슨 수작을 부리든 먹히지는 않을 거다.
“냐아옹?”
수련장을 벗어나 탈론을 따라나서는 길에, 갑자기 웬 하얀 고양이가 나타났다. 엘라가였다.
그는 탈론과 헬무트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헬무트한테 슬쩍 전음을 보냈다.
[뭐냐 이 녀석은. 너 또 어딜 순진하게 따라가. 약해빠진 게.““…….”
약해빠졌다는 소리는 항상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
사실이 아닌데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탈론이 보는데 엘라가에게 대답할 수는 없다.
엘라가는 바로 멈추지 않고 걸음을 내딛는 헬무트를 졸졸 쫓아가며 야옹거렸다.
[야, 나도 간다.]그리고 헬무트가 태워주지도 않는데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어깨에 안착했다.
그 모습을 본 탈론은 가볍게 한마디 던졌을 뿐이다.
“애교 많은 고양이로군.”
태어나서 처음으로 애교 많다는 소리를 들어본 엘라가가 조금 후 캭캭댔지만, 고양이의 반응 따윈 그의 관심 밖이었다.
어쨌든 고양이를 짊어진 그들은 몇 번의 검문을 통과하여 곧 목적지에 다다랐다.
널찍한 방이었다. 회의실이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공간인 듯 방안의 탁자에는 서류 하나 놓여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비공식적인 만남이다. 방안에 들어서자, 뒷짐을 지고 창밖을 내다보던 남자가 뒤를 돌아섰다.
“어서 오게.”
인사조차 하지 않은 헬무트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아까는 무시하시더니?”
헬무트는 이제 그가 왕이라는 걸 안다. 반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깍듯한 공대는 아니었다.
“그것은 로드릴과 대화하기 위한 자리였으니까.”
“그럼 난 왜 찾아왔던 겁니까.”
“궁금해서.”
베네타의 왕 데비스는 헬무트를 관찰하듯 쳐다봤다.
하나는 확실했다. 저쪽은 이쪽에 호의를 품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적의라고 하기엔 옅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헬무트를 제거하고자 마음먹었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자신을 불러내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내 실력에 대해선 탈론이 말해 줬겠지요.”
“그랬지. 내 호위 기사들로는 나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
‘그런데도 나를 불렀다는 건 로드릴 때문이라도 내가 그를 먼저 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는 거겠지.’
“용건이 뭡니까.”
“자네라는 사람이 궁금하더군.”
“전 누구를 위해 일할 생각 없습니다.”
헬무트는 선수를 쳤다. 내 사람이 되라는 식의 제의는 사절이다.
다리언도 바소르 출신이었기에 바소르에서 기사단장을 한 거지, 누구 밑에 들어갈 성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헬무트가 더했다. 그는 심지어, 신분마저도 리노사 대공의 아들 아닌가.
“나도 자네가 나를 위해 일하기를 바라지 않아. 통제할 수 없는 부하는 두는 게 아니지.”
“그럼 왜?”
“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헬무트는 왜 자신이 이 대화에 응해줘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탈론과 원활히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왕과의 대화를 끝마쳐야 한다.
왕은 탈론의 상관이나 다름없으니까.
엘라가는 이미 옆에서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1년 전 계승권 전쟁에서 이기고 왕위에 오른, 원래는 왕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왕자. 수완이 좋고 똑똑하다는 평판이더군요.”
“그래, 나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생각보다 좋은 모양이야?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말이지.”
“이기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려면 희생이 따르지요.”
순식간에 왕의 표정이 변화했다.
“아니, 나는 왕위를 바란 적이 없어. 하지만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그랬던 거야.”
아무리 밀려난 왕자라도 계승권 전쟁이 격해지면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특히 데비스처럼 우수한 자질을 가진 왕자라면 누구의 눈에든 띄게 되어있다.
왕위라는 그것은 그에게 원하고, 원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왕의 핏줄로 태어났기 때문에 짐 지워진 운명.
그러나 그에겐 세력이 부족했다. 남몰래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때 테레사 피델리스가 나타났다. 베네타의 왕, 데비스는 그녀라는 밧줄을 붙잡았고 왕위에 올랐다.
테레사는 자신이 데비스를 택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게 만든 건 데비스였다.
“테레사 피델리스, 그녀가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자네는 모를 거야.”
가장 어려울 때 도와준 여자라면, 사랑하게 될 수 있다.
헬무트는 아레아가 자신을 구하러 오기 전에도, 아카데미에 있을 때부터 그랬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뒤이은 말에,
“그러니 내가 자네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하게.”
헬무튼 잠시 말문을 잃었다. 데비스의 눈은 차가웠다.
그제야 느릿하게, 아레아와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와 왕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가 겹쳐졌다.
그 둘 모두 원인은 테레사였다. 하지만 그 둘 모두 헬무트의 의사나 의지와는 무관한 문제 아닌가.
“냐아옹.”
어깨 위에서 엘라가가 눈을 빛냈다. 이거 흥미로운 이야기 아닌가. 갑자기 치정 싸움에 끼게 된 헬무트는 당혹스러웠다.
요 근래 이만큼 동요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왠지 모를 변명이 튀어나왔다.
“……저는 그녀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아카데미 선후배 사이지요.”
“탈론은 다른 소리를 하더군. 아카데미 시절에 자네와 그녀 사이에 염문이 있었다고.”
“소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사이 아니었고, 제겐 사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테레사가 자신한테 들이대긴 했으나 그 사실을 이야기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눈치 정도는 헬무트에게도 존재했다.
“하지만 테레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더군.”
아스카였으면 이미 난동을 부렸으리라. 헬무트는 말이 막혔다.
“내가 수련장을 찾았을 때, 그녀도 나타났지. 나는 그녀가 내 존재를 감지하고 우연히 그곳에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아.”
데비스의 눈빛은 강렬했다. 마치 헬무트를 태워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헬무트는 그저 존재했을 뿐이다. 그의 죄는 그것밖에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잘생긴 것도 죄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지?”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면 더 무슨 일이 있었던 사이 같지 않은가. 어쨌든 지금 죽일 수도 없는 베네타의 왕과 척을 지는 것은 헬무트로서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제게 어떤 감정도 없고, 단지 제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해하더군요. 베네타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저를 조사하겠다고도 했지요. 그것이 끝입니다.”
헬무트는 서둘러 덧붙였다.
“저는 곧 떠납니다만.”
로드릴과 함께 자신이 떠나면 그뿐 아닌가. 어차피 이쪽도 자신을 죽이거나 할 생각은 없는 듯하니.
그러나 베네타의 왕이 그를 불러낸 이유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왕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궁금하군. 쫓겨난 리노사의 핏줄이 내 나라에 나타난 이유가 뭔지.”
왕의 말이 이해된 순간 헬무트의 표정이 변화했다. 그의 손이 저절로 검을 짚었다.
왕은 확신을 담아 말했고, 그가 확신하고 있는지 아닌지 헬무트는 알지 못했다.
중요한 건, 헬무트가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고작 열다섯의 나이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검사. 리노사에서 실종되고, 4년간 행방불명. 다시 나타난 곳은 우리 베네타 왕국.”
왕의 눈이 서늘하게 빛을 발했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내 영토에 들어온 건지 왕으로서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니겠나? 그게 리노사의 숨겨진 핏줄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