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4
33
헬무트
33화
밤이 되어서야 습격은 잦아들었고, 용병들은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무를 베어 내어 주변에 둘러쌓고 간단하게 야영지를 조성한 용병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앉았다.
오늘 하루만 어림잡아 열 번의 습격이 있었다.
사체를 수습할 여력도 없어서 부수입도 기대하기 힘들다. 마물의 털가죽을 베어 낸 감촉만 손에 가득 남았다.
끊임없는 습격에 점심은 육포를 뜯고 빵을 씹으며 때웠다. 허기질 대로 허기졌다.
페이스 용병단 용병들은 유쾌하게 떠드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말수가 적었다. 다들 말할 체력도 아끼고 있다.
자연스레 가라앉은 분위기에 핀도 눈치를 봤다.
물을 뜨러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기에, 저장해 둔 물로 만든 걸쭉한 고기 수프에 빵을 찍어서 구운 달걀을 곁들여 먹는 게 식사의 전부였다. 그나마 핀이 만들어서 맛은 그럴듯했다.
다들 체력을 보충한다는 느낌으로 묵묵히 식사했다.
눈 밑이 거무죽죽해진 퓌엔이 수프를 떠먹고 있는데 타냐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퓌엔, 얼마나 더 가야 해?”
2급 용병으로서 용병단을 다스려야 하는 퓌엔에게 타냐는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누이이면서 그를 뒷받침해 주는 든든한 동료였다.
서로 간의 의견이 잘 맞았기에 웬만한 의뢰에는 함께 참여했다.
“이 숲이라면, 아직도 나흘은 더 가야 외곽이 나올 텐데.”
“당장 내일이 문젠데. 이대로 가면 다들 체력적으로 지칠 거야.”
“그렇겠지, 당장 오늘 밤부터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마로스도 다리를 다쳤으니.”
“싸우지 못할 만큼 큰 상처는 아니지만, 전력에는 지장이 있겠지. 팔 다친 우터 녀석과 붙여 놔야 해.”
마물은 밤에 더 왕성하게 활동한다.
해 질 녘이 되어 물러가는 듯이 보였지만, 지금까지의 패턴을 보건대 평안한 밤은 없을 것이다.
타냐가 미간을 찡그렸다.
“우리의 4급 용병들도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타리크 용병단 쪽에선 아까 보니까 4급 용병들에게도 검을 들게 할 모양이더라고.”
“핀 녀석이 싸울 수 있겠어?”
많은 수의 용병들이 참여한 상행이라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데려온 게 실수였다.
마물은 인질을 잡거나 하지 않으니, 인간을 상대해야 하는 의뢰보단 위험한 일이 적을 거라고 봤다.
아직까지는 핀에게 위험한 일은 닥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며칠이 문제였다.
마차 쪽을 의식하면서 싸울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 더 바라지도 않아.”
“헬무트는 괜찮을 것 같아. 담력이 있는 녀석이야. 검도 제법 다룰 줄 알고 부상도 거의 나은 것 같다.”
“헬무트는…….”
문득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말하려던 타냐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본 것일 거다. 그녀는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둘이 붙어 다니니, 헬무트가 핀 쪽을 좀 봐 줄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녀석들은 마차에 바짝 붙여서 안쪽에 세울 생각이니까.”
“헬무트가 침착하니 핀 녀석을 가라앉히는 데 좋은 영향을 줄 거야.”
“그럼 두 녀석한테 말해 둬야겠군.”
“내가 하지.”
“이 녀석들아, 내일부터 실전이다.”
냄새가 나지 않게 쓰레기를 땅속에 묻고 있는데 나타난 퓌엔이 헬무트와 핀의 머리를 툭 쳤다.
발달한 청각으로 먼 곳에서의 소리도 잡아낼 수 있었던 헬무트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핀은 난데없이 얼음물에 뛰어들란 소리를 들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네? 실전이요?”
“그래, 전황이 이렇게 돼서 마일즈가 용병단에 전체적으로 추가 의뢰비를 지급하기로 했다. 니들도 돈값을 해야지. 3급들이 저렇게 종일 구르고 있는데.”
“그 큰놈이 나타나면…….”
핀이 겁먹은 듯 눈치를 봤다.
“멍청한 녀석아! 누가 너 같은 애송이를 그런 마물하고 붙여. 그놈이랑 네가 맞상대할 정도면 우리 용병단이 전멸할 지경이라고 봐야지.”
퓌엔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여태 아무도 죽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전멸할 지경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그러니 노는 인력을 쓸 수 있게라도 만들어 놔야 했다. 그들을 봐 줄 여유가 없으니까.
“핀, 너는 타냐한테 가 봐. 자세를 봐 줄 거다.”
퓌엔이 저쪽을 향해 턱짓했다. 핀은 제 허리춤의 검을 불안하게 매만지며 타냐에게로 달려갔다.
쓰레기를 파묻은 헬무트를 향해 퓌엔이 팔짱 낀 채 말했다.
“헬무트는 잠깐 나 좀 보자.”
“네.”
“네가 핀 녀석 쪽을 좀 봐 줘야겠다. 너까지 위험해지면 안 되겠지만, 함께 움직여. 너희는 안쪽에 세워둘 테니까 거길 벗어나지 말고 마차를 등지고 싸워라.”
“네, 그럴게요.”
저번에 마물의 사체를 수습할 때 핀은 마물의 습격을 피해 냈었다. 그때 느낀 것이지만 핀은 재잘대는 입만큼이나 몸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나름대로 생존 본능이 발달한 녀석이니 마물을 베어 내는 건 무리라도 피하긴 잘 피할 거다.
“내 생각엔 이 숲을 나갈 때까지 놈들이 습격을 이어갈 것 같아. 앞으론 잠도 편히 자긴 힘들 거다. 밤에 검을 수련하고 있는 걸 알지만, 당분간은 삼가거라.”
‘눈치챘나?’
아마 밤마다 헬무트의 잠자리가 비는 걸 본 모양이다. 눈치를 보니 비스를 수련하는 것까진 보진 못한 기색이었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용병단에 온 지 얼마 안 된 네게 위험한 의뢰를 맡겨서 마음이 좋지 않구나. 하지만 네가 검을 좀 배운 녀석이라는 걸 안다. 준비도 되어 있고 냉정하지. 실력에 대한 자신도 있어 보이고.”
퓌엔이 빙긋 웃었다.
“넌 잘해낼 거다.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네게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 무리하지 말고 침착하게, 알았지?”
그가 다독이듯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으로 마물과 싸우게 될 4급 용병을 격려하기 위해서 부른 모양이었다.
헬무트는 이 용병단에서 가장 많은 마물을 베어 본 자보다 더 많은 마물을 베어 봤을 것이다.
쓸데없는 일이란 생각도 들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 남매는 마음 씀씀이가 좋았다. 아무 대가 없이 그를 구해 주고, 치료해 주고 용병단에 입단시켜 줬다. 받은 것이 많다.
헬무트가 아직 어린 열네 살의 소년이라도, 그들의 호의는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다리언이 말한 인간의 온기라는 것일까. 심장 한구석의 맺힌 어둠의 싹이, 스르르 녹아 크기를 줄여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 느슨해져선 안 된다. 헬무트는 절대로 그들과 같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가 어둠의 싹을 가진 한은.
자신이 파헤의 숲에 버려져 살아 나온 인간이라는 것. 헬무트는 그걸 절대로 잊지 말아야 했다.
이유 없이 호의를 보이는 인간이 있다면, 켈롭처럼 이유 없이 악의로 가득한 인간도 있다.
머리로만 알던 인간을 알아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럼, 잘해 보자.”
퓌엔이 떠나간 후 타냐에게서 간단한 가르침을 받은 핀이 돌아왔다.
“와, 첫 의뢰에서부터 마물과 싸우다니 나 긴장돼서 잠을 못 자겠어.”
부르르 떨며 가슴을 두드리는 핀을 헬무트는 짐 덩이를 보듯 쳐다봤다.
이 녀석도 나름대로 은인 비슷한 거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헬무트의 책임 아래에 놓였다.
핀은 다른 이유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날 밤, 세 번의 습격이 더 있었다. 정확히 2시간 간격으로 이어진 습격이었다.
불침번이 의미가 없다시피 했다. 조금 잠을 이룰라치면 들이닥치니 다들 아예 손에 검을 쥐고 잤다.
우터가 이를 박박 갈았다.
“지독한 새끼들.”
“마기를 품은 놈들이라 그런지 악독하구만.”
“어차피 잠도 못 자는 거 날 좀 밝으면 바로 떠나야겠어.”
퓌엔이 결단을 내렸다. 마일즈와 타리크 용병단 쪽에서도 같은 판단을 했다.
목표는 최대한 빨리 숲을 벗어나는 것. 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용병질하다 보면 가끔 이런 때도 있는 거지.”
“이 거지 같은 숲을 벗어나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의뢰고 뭐고 난 마셔야겠어!”
“좋지! 나도.”
몰려오는 불안감과 피로를 떨쳐 내며 용병들은 사기를 진작시켰다.
헬무트는 허리에 꽂은 검 손잡이에 조용히 손을 가져갔다.
검을 휘둘러야 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헬무트는 기꺼이 그 순간을 기다렸다.
“마차에 붙어서!”
타냐가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헬무트는 당황한 핀을 끌어다가 마차에 등을 붙이고 서게 했다.
뒤쪽엔 마차가, 마차 너머엔 용병들이 또 서 있다. 뒤로 접근할 수 있는 놈은 없다.
마차를 이끄는 말들은 하나같이 잘 훈련된 놈들이다. 시야를 가리고 향초로 마물들의 냄새를 느끼지 못하게 해 놓은 탓에 제법 침착했다.
용병들은 마차 근처에 마물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부터 그 선이 조금씩 밀리고 있단 걸 헬무트는 눈치챘다.
‘놈이 나를 보고 있군.’
시선이 느껴진다. 놈이 이렇게 수동적인 방식을 택한 데는 역시 헬무트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놈은 헬무트를 경계하고 있었다. 감히 마물에게 위협을 가한 인간!
그가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행렬의 후측인 이 페이스 용병단이 있는 쪽에 마물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시험해 보고 싶어 할 테지.’
자신이 물러나야 할 만한 강한 인간인가, 아닌가.
‘이렇게 많은 마물을 동원한 걸 보면 이 지역의 지배자인가.’
강한 마물은 한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 파헤의 숲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저 원숭이 마물이 그럴 만큼 강하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놈을 엘라가와 같은 급에 두는 건 엘라가에게 실례였다.
‘놈보다 강한 놈이 없다면 쉽지.’
비스 수련을 중단했다지만 헬무트의 몸은 최상의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은 놀고먹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럴 만하다.
‘자, 와라.’
그만큼 큰 원숭이 가죽은 인간 세상에서 얼마나 값을 쳐줄까.
헬무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하지만 지금은 잔챙이를 처리할 때였다.
뒤는 막혀 있더라도 위는 뚫려 있다. 그는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악!”
핀이 제가 검에 찔린 것 같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때문에 핀은 보지 못했다. 헬무트의 검이 빛살 같은 속도로 마물의 머리를 가르는 모습을.
샤악! 마찰음이라기보단, 가볍게 스치는 소리 같았다. 뼈까지 깔끔하게 분리된 두 개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한 호흡에 둘을 베어 낸 헬무트가 핀의 뺨을 갈겼다. 짝!
“정신 차려! 이제 시작이야.”
절대 한심해서 때리고 싶었던 게 아니다.
“어, 어어?”
헬무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검을 날렸다. 위쪽에서 뛰어내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검으로 쳐냈더니 이번엔 바닥으로 안착하여 몸을 튕기며 달려들었다.
전면에서도 습격이 시작된 탓에 온 사방이 전투의 소리로 가득했다.
핀도 헬무트가 옆에서 침착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자 정신을 차렸다.
“으아아아아!”
핀은 이제껏 배운 검술을 모조리 까먹은 듯이 검을 도끼처럼 붕붕 휘둘러댔다.
운 좋게도 그 어설픈 칼질에 당하는 놈도 있었다.
헬무트는 최대한 간결하게 움직였다. 비스를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굳이 검술을 감추지 않았다. 상황을 인지하고 있던 탓이었다.
페이스 용병단에서 헬무트 쪽으로 제대로 쳐다볼 수 있는 용병은 없었다. 그럴 여력이 나지 않았다.
행렬은 전진하고 있었고, 다들 이를 악물고 싸우며 마차를 따랐다. 누구 하나가 죽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앞쪽은 좀 여유로웠다. 뒤쪽 마차를 버릴 순 없으니 속도가 나진 않았지만, 간간이 달려드는 한두 놈 정도만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죽이면 그만이었다.
“노골적으로 우리 쪽만 노리고 있어. 한점 돌파하기로 한 건가?”
잠시 공세가 잦아든 사이, 퓌엔이 중얼거렸다.
이 상행은 실제로 타리크 용병단과 페이스 용병단 두 무리로 갈려 있다.
페이스 용병단 쪽 수가 적은 데다가 2급 용병 2명은 타리크 용병단 소속이다.
그들은 웬만해선 뒤쪽을 도우려고 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건 자기네들의 안전일 테니.
무엇보다도, 켈롭 건이 있어서 좀 숙이는 듯이 나오고 있지만 타리크 용병단은 페이스 용병단을 싫어한다. 제대로 협력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걸 안다면, 마물들도 한쪽만 집중적으로 노릴 것이다. 각개격파하는 쪽이 편하니까.
‘재수 없게도 지능적인 놈을 만난 모양이야.’
퓌엔의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용병들을 돌보며 검을 휘두른 그였다.
타리크 용병단에게 불만은 없었다. 그들이 지켜야 할 건 의뢰인과 마차였다. 운이 좋은 걸 어쩌겠는가.
아니, 운이 나쁜가? 그쪽에선 셋이 죽었으니까.
‘사상자만 나오지 말아야 할 텐데.’
퓌엔은 간절히 바라며 검을 휘둘렀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전투에도, 끝은 있다. 그 끝까지 버텨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