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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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변화의 시작
리노사의 라토나. 고풍스러운 집무실이었다.
한가득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 앞에 막 소년에서 벗어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눈처럼 하얀 얼굴은 젖살이 다 빠지지 않아서 아직 앳되어 보였다.
머리를 기를 수 있는 것은 고귀한 신분의 특권. 어깨를 훌쩍 넘어서는 금빛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선이 곱고 반듯한 이목구비는 귀족적이며 중성적인 매력을 품고 있었고, 푸른 테두리의 눈동자는 선명하고 맑았다.
창으로 넘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는 흡사 천사처럼 보였다.
선량하고 자비로운 천사.
눈에 보이는 것에 혹하는 자라면 누구도 그의 본의를 의심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섬기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리노사의 핏줄에 천사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아직 내가 살아 있군.’
미하엘은 신기하다는 듯이 햇살 아래에서 자신의 손을 비춰 보았다.
매일처럼 느끼는 감정이었지만, 오늘은 좀 색달랐다.
창백한 피부, 깃펜보다 무거운 것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손은 눈에 띄게 고왔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선이 가는 외모는 실지로 그의 병약함에서 기인하기도 했다.
미하엘은 병약했다. 평생을 침대에서 누워서 지낸 그였다.
늘 그의 침대 밑에는 죽음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인 것 같았다. 언젠가 저 입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인간은 모두가 언젠가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미하엘에게 그 죽음은,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웠다. 그는 항상 그것을 보면서 자랐다.
기이하게도 죽음을 인지하면 인지할수록, 그의 안에서 뭔가가 싹텄다.
이왕 죽을 거라면, 더 많이 가져보고 싶다. 가질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미하엘은 욕심이 많았다. 죽은 자는 욕망할 수 없다.
미하엘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차지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삶이었고, 동력이었다.
결국, 미하엘은 이날 이때까지 살아남았다. 죽음의 입에 굴러떨어지지 않고서.
만약 미하엘이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순한 아이였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그러니 미하엘은 정당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살아있는 인간이 삶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무엇도 자신의 생존에 앞설 수 없는 문제니까.
‘이제 반 이상은 온 건가.’
경쟁자인 샤를로트가 그레타 아카데미로 떠나있는 동안, 미하엘은 차근차근 리노사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영민하고 사람을 다룰 줄 알았으므로 그의 장점에 비해 검을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은 큰 흠이 되지 않았다.
검사인 대공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미하엘은 뛰어난 인재였다.
샤를로트가 만약 전력으로 그와 경쟁했더라도 미하엘은 자신이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훌륭한 검사따윈 될 수 없었으므로, 그의 불가능함을 이루어낸 샤를로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리노사 대공이 높게 평가하는 재능이었다.
다만 그녀는 너무도 곧고 바르기에, 대공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았다.
미하엘은 인내심이 있었고, 철두철미했다. 그는 샤를로트를 계속 지켜보았다. 단 한 번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서.
자신의 유일한 경쟁자에게 경쟁할 마음이 현재는 없다고 해서, 그녀를 시야 밖에 놓는 것은 안일한 짓이다.
미하엘은 자신이 리노사 대공에 오르는 순간까지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샤를로트가 최근, 예상을 벗어난 움직임을 보였다. 미하엘은 한참 그것에 대해서 골몰해야만 했다.
‘요 몇 년간 조용했는데.’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때였다.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여보내세요.”
“미하엘 저하.”
한 남자가 들어와 고개를 숙이자, 미하엘은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가벼운 움직임이지만 무게가 느껴졌다.
미하엘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맺혔다.
“시누스, 샤를로트가 그레타 아카데미에 돌아왔다고 들었어요.”
“예, 지금 복학 절차를 밟으시는 중입니다.”
“학기가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꽤 긴 시간이죠. 그녀가 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했을까요?”
샤를로트의 생각보다 미하엘은, 조금 더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조용히 지낸다고 하더라도 미하엘은 항상 완벽을 기했다.
그녀가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미하엘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학기가 지난 뒤 고작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여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을 뿐이다.
‘샤를로트가 누군가에게 잡혀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저항의 흔적은 없었지.’
“마법으로 이동한 것이라 종적을 읽지 못합니다. 주변에 흩어진 마력의 양으로 볼 때 상당한 거리를 이동한 듯합니다만 저희 쪽 마법사로서는 방향도 읽어내지 못하더군요.”
“마법사는 이래서 골치 아프다니까.”
미하엘이 혀를 찼다. 사람이 움직이면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다. 아무리 잘 지우려 애를 써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법사는 달랐다. 공간을 뛰어넘어 이동하는 데다가 마법사는 자신보다 수준 높은 마법사의 마법은 읽지 못한다.
대마법사의 경우 그래서 추적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리노사 대공이 아닌 미하엘이 운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수준 낮은 마법사는 아니지. 그만한 마법사의 지원을 받다니, 그레타 아카데미를 헛다닌 것은 아니군.’
딱히 인맥에 관심 없어 보이는 샤를로트였다.
하지만 그저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정작 그녀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의 실력은 모두 뛰어났으니까.
미하엘의 머릿속에 몇 명의 마법학부 인물이 떠올랐다.
“재미있군요.”
그녀의 검술은 이미 그레타 아카데미 졸업생의 실력을 뛰어넘었다. 굳이 아카데미를 더 다닐 필요도 없는 수준.
그렇다더라도 학업을 마치는 데 소홀할 샤를로트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는 그녀니까.
무언가 샤를로트가 움직일 만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졸업이 1년 남은 이 시점에서 끝까지 충실하게 아카데미를 다녔을 터.
‘4년 가까이 샤를로트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
샤를로트는 4년 전,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마음에 빗장을 쳤다. 대공비와 미하엘이 한 일에 대해서 알게 된 샤를로트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미하엘뿐만 아니라 극진이 생각해 왔던 대공비마저도.
아카데미 생활도 특별하지 않게, 퍽 정적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움직일 만한 일이라면…….
단 한 가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미하엘은 중얼거렸다. 그의 수하가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하엘 저하?”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하엘이 손을 내저었다. 잠깐, 불가능한 생각을 했다.
파헤의 숲으로 보내진 자가 살아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이 한 번 가능했다더라도, 두 번 가능하진 않으리라. 신전에서도 그리 장담하지 않았던가.
신성 결계는 여전히 견고했고, 마기를 품은 모든 것을 배척하니까.
“아카데미를 무단이탈하고도 가문에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다니, 이건 허락되지 않은 일이지요. 그녀가 돌아왔으니 대공 전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샤를로트는 이에 대해 반드시 해명해야 할 것이다. 미하엘은 곧 그녀가 그레타 아카데미를 비운 이유를 알게 될 터였다.
*
대로를 두 마리의 말이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다. 아스카가 금패를 들고 시안의 얼굴에 들이댔다.
“야, 이거 봐라. 금패 용병이시다. 멋있지?”
옆에서 말을 달리던 시안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야, 안 보여! 그리고 무늬만 금패지 넌 한 번도 용병 일을 해본 적 없잖아.”
“지금 하고 있잖아.”
“하고 있긴 뭘 해. 의뢰인이랑 떨어져 있구만.”
“그러게 말이야. 먼저 바덴으로 가 있으라니? 자기들은 어디 간다는 거지? 치사하게 우리만 따돌리고.”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우리가 데이트하는 데 방해가 되나 보지.”
헬무트와 아레아, 그리고 두 마물은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 행선지는 말해 주지 않고서.
이쪽의 입을 믿지 못한다는 뜻인가. 섭섭한 일이었지만, 싸늘하게 구는 아레아에게 가로막혀 더 묻지 못했다.
기껏 용병증을 만들어오라느니 함께 하자느니 말해놓고서 설명도 안 해주고 바덴으로 가 있으란다.
둘은 그대로 따돌려진 채였다. 아스카도 시안도 당연히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어쨌든 두 사람 다 헬무트란 인물과 엮여서 겪고 있는 새롭고도 위험한 모험에 만족하고 있었다. 무임금 노동도 불사할 정도로.
아마 헬무트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동참했으리라.
“이럴 거면 우리도 샤를로트가 갈 때 함께 갈 걸 그랬다.”
“우린 걔랑 같이 다니면 안 돼.”
“걔는 어쨌든 마법으로 갔잖아. 마법으로 이동하면 편하…… 응? 그러고 보니 너도 마법사잖아.”
“너도 마법사라니, 잊고 있었냐? 나 마법학부 차석인 거! 멍청아.”
게다가 얼마 전까지 그린카나에 있었다. 아무래도 아스카의 머릿속에서 정령 마법사와 마법사는 구분되는 존재인 듯했다.
아스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왜 마법을 안 쓰고 말로 이동하냐?”
“바덴은 마법 도시라 꽤 멀리까지 주변에서 사용된 마법의 흔적이 감지당한단 말이야. 내 마력은 이제 마법사협회에 기록되어 있다고. 우리가 바덴으로 돌아갔다는 걸 들키면 안 되잖아.”
“그걸 누구한테 들켜?”
아스카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시안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에서 온갖 시선을 몰고 다닌 주제에, 세상에서 그렇게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누구한테든.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고 다녀야 해.”
신전이나 리노사 쪽이야 이쪽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아카데미를 졸업하고도 소식이 없는 아스카를 찾을 게 분명한 그의 가족들.
게다가 아카데미 졸업생 중에는 아스카를 살해하고 싶어 할 만한 녀석들이 몇몇 있었다.
아스카의 가문 이전에 그 녀석들 눈에 띄지 않는 게 문제다.
그린카나에서 바덴으로 가려면 산맥을 뺑 돌아가거나 산맥을 넘어야 한다. 그들은 산맥을 넘어가는 지점까지만 이동해서 줄곧 말을 달리고 있었다.
“가는 길에 사고나 치지 말라고. 바덴에서 문제없이 합류해야 하니까. 우리가 늦으면 그 녀석들, 버리고 갈지도 몰라.”
“에이 설마 그럴까.”
콧방귀를 뀐 아스카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바덴에 도착하게 해 주세요.’
그러나 기원은 종종 이뤄지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