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5
34
헬무트
34화
그날, 상행을 구성하는 양 진영의 상태가 판이하게 갈렸다.
오늘 거의 전투를 치르지 않아 한결 여유를 찾은 타리크 용병단 쪽과 다 죽어가는 페이스 용병단 사람들.
모두가 녹초가 된 탓에 보초는 타리크 용병단 쪽에서 대신 서주기로 했다. 내내 관망만 하던 그들이었으니 양심이 있으면 그 정도는 해야 했다.
부상자도 한 명 늘었다. 새로운 부상자가 희희덕대며 말했다.
“야, 이렇게 며칠만 더 있으면 부상자가 부상 없는 사람보다 더 많겠다.”
“닥쳐 좀.”
“넌 얼마나 움직임이 둔하면 다리를 물리냐, 굼벵이냐.”
“이 새낀 주둥이를 물어 뜯겼어야 했는데.”
션이었다. 우터와 마로스에 이어 션까지 다쳤다.
션은 몸을 향해 갑자기 뛰어드는 놈을 막느라 왼쪽 손목을 뜯겼다. 독이 올라 퉁퉁 부은 상태로 약초를 발라 조처를 해 뒀다.
뼈가 드러날 만한 상처라 효과 좋은 약을 발라 놓은 지금 엄청난 통증이 느껴질 텐데도 션은 활력을 잃지 않았다.
사실 다들 다 죽어 간다기 보다는 꽤 활기찼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꾸며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서.
핀은 멀쩡했다. 고기 썰 듯이 마물을 썰어 내는 헬무트가 옆에 있고, 가장 안전한 지대에서 싸웠으니 그럴 만했다.
그걸로 자신감이 좀 생겼던 핀은 전투가 끝날 무렵, 헬무트의 근처에 쓰러져 있는 족히 열 마리는 될 듯한 수의 마물을 목격하고 기가 질렸다.
모닥불을 피워 올리고 있는 헬무트의 옆에 다가앉은 핀이 슬쩍 물었다.
“너 진짜, 검 잘 쓰더라. 어디서 배웠어?”
“기억 안 나.”
“아, 맞아. 근데 기억도 안 나는데 어떻게 검술은 기억해?”
예리한 질문이었다. 헬무트도 사실 자기가 기억상실에 걸렸다고 말한 걸 종종 까먹었다.
“몸에 익었으니까.”
“그래?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뭔데.”
“친구야, 내가 죽으면 내 시체만이라도 꼭 고향으로 데려가 줘. 그래서 양지바른 곳에…….”
크흑! 소리를 내며 핀이 얼굴을 싸매고 웅크렸다.
기세 좋게 검을 휘둘러댄 탓에 양팔 근육이 뻐근하다고 엄살을 떨어댄 핀이었다. 주둥이를 놀릴 힘은 아직 남아 있나 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누가 친구야?’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헬무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체를 데리고 가는 쪽이 더 힘드니, 고향엔 네 두 다리로 알아서 가지.”
“몰인정한 녀석!”
목을 노리고 팔을 두르는 그를 헬무트는 가볍게 떨쳐 냈다. 무시하고 일어서려고 하자, 핀이 자신의 유일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네 수프에 소금 왕창 칠 줄 알아!”
헬무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참 은혜도 모르는 녀석이다. 오늘도 위험할 뻔한 순간마다 헬무트가 남몰래 도와줬다.
애초에 그가 위험에 빠지지 않은 건 헬무트가 주변에 접근하는 모든 마물을 도륙했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챌 안목도 없겠지.’
헬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보다 약한 것과 이렇게 오래 평등한 위치에서 교류해 본 적이 없었던 그였다.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기분이 낯설었다.
“너희들은 아직도 기운이 남았니.”
타냐가 스쳐 지나가면서 말했다.
“헬무트 넌, 잘 싸우는 것 같던데 몸은 이제 다 회복되었나 봐?”
“네.”
타냐와 대련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앉은뱅이가 두 다리로 뛰게 된 격이다.
용병들이 고전하던 마물들을 베어 넘기면서 헬무트는 비로소 확신했다.
자신은 강하다. 굳이 대련해 볼 것도 없다. 다시 타냐와 붙는다면 자신이 이길 것이다.
그 사실이 헬무트를 만족시켰다.
“돌아가는 대로 승급 심사를 한 번 보는 게 좋겠어. 퓌엔이 마일즈에게 네 몫을 좀 더 쳐달라고 말할 거야.”
“나는, 나는? 나도 잘 싸웠는데!”
“그래, 그래, 너도 잘했어. 내일도 열심히 해라.”
타냐는 건성인 투로 말하고 바로 자리를 떴다.
헬무트는 핀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모닥불 안쪽으로 장작을 던져 넣었다.
그때, 야영지 한쪽에서는 어떤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마일즈는 타리크 용병단의 2급 용병이자 대표인 파울과 대면하는 중이었다.
마일즈는 상회의 책임자로서 맞이한 위기에 대해서 근심이 많았다. 이마의 주름도 상행을 시작하기 전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봤으면 알겠지만, 이상하게 페이스 용병단 쪽에 공세가 집중되고 있어. 자네들이 더 수가 많으니 적극적으로 도와줬으면 하네만.”
타리크 용병단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맘에 들지 않은 마일즈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파울은 냉정한 얼굴로 다른 소릴 했다.
“뒤쪽 마차에서 중요한 것들만 앞으로 옮겨싣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마일즈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은…….”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저들은 많이 지쳤습니다. 곧 전투 인력으로서 구실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지요.”
페이스 용병단의 인원은 총 8명. 인원도 얼마 안 되는데 부상자만 셋이다. 거의 반절이 부상을 당했으니, 내일이면 더 버티기 힘들어질 것이다.
4급 용병들까지 싸우게 하는 모양이었지만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가 타리크 용병단만을 고용했고, 그중 일부만 공격당하는 상황이이었면 자네는 그때도 같은 소릴 했을 건가? 아무리 두 용병단이 경쟁 관계라지만 도의라는 게 있지 않나!”
순간 흔들렸으면서 마일즈는 성부터 냈다.
페이스 용병단과는 오랜 시간 의뢰 관계를 맺어왔다. 그쪽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내버리면, 믿고 의뢰를 맡길 용병단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다.
매정하고, 매정하지 않고를 떠나서 지금은 페이스 용병단을 버릴 것을 논할 단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패는 상대가 쥐고 있었다.
파울이 빙긋이 웃었다. 냉기가 줄줄 흐르는 미소였다.
타리크 용병단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그는 뱀처럼 교활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소문난 냉혈한이다.
파울은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절대로 나서지 않았다. 페이스 용병단과 사소한 갈등이 있을 때도, 켈롭이 수를 쓸 때도 뒷짐을 진 채 상황을 지켜만 보았다.
퓌엔은 그를 중립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울은 생각했다. 위기를 이용해 경쟁자를 쳐낼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기회 아닌가?
“마일즈 님, 애초에 타리크와 페이스, 두 용병단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함께 고용한 건 마일즈 님이십니다. 저희가 일방적으로 페이스 용병단 뒤치다꺼리를 하진 않을 거라는 건 아실 만할 텐데요. 이런 상황도 감수하셔야지요.”
“나는 그래도 자네들이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서 서로 협력할 줄 알았네. 이렇게 분간 못 하고 나올 줄은 몰랐구만.”
“이런 상황이 올 줄 모르셨던 거겠지요. 위험한 의뢰에 잘못된 정보. 저만한 마물들을 상대할 거면 최소 50명은 고용하셨어야 했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게 몇 명입니까.”
돈을 아끼려다가 용병단을 몰살시킨 상회로 이름을 날려도 족할 상황이다.
마일즈의 표정이 꿈틀댔다. 실제로 그는 의뢰의 위험성을 생각하여 인원을 잡았다.
하지만 비용을 아끼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좀 박하게 잡힌 것도 사실이다.
“내 실책으로 일이 어렵게 된 건 사실이네. 하지만 그만큼 값을 치르기로 했잖은가. 뷰탄 상회에서는 용병들의 노고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야!”
“그렇지요. 하지만 그것도 살아서 이 숲을 빠져나갈 때의 이야기지요. 죽으면 그 생각도 의미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상황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여긴 전장이고, 부상자를 돌볼 여력도 없습니다. 까딱하면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행을 버리고 도망치면, 타리크 용병단의 평판은 좀 떨어지겠지만 무리한 의뢰였다는 게 알려지는 걸로 어느 정도 상쇄될 것이다.
하지만 뷰탄 상회 같은 커다란 상회를 상대로 극단적으로 나가는 건 용병단 입장에서도 쉽게 하기 힘든 선택이다.
파울과 마일즈는 서로의 눈치만 보던 중이었고, 결국 마일즈가 먼저 던진 셈이다.
“며칠만 버티면, 숲을 벗어나잖는가. 그때까지만 어떻게…….”
“가장 좋은 방법은 여기서 마차를 버리고 사람만 빠져나가는 겁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니 운이 좋으면 용병들을 잔뜩 몰고 다시 찾으러 올 때 멀쩡히 남아 있겠지요. 그렇게 하면 페이스 용병단도 몸만 빼면 되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이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없는 건 마일즈였다. 저 의뢰품은 열 명도 안 되는 용병과 바꿀 수 있는 값어치의 것들이 아니다.
의뢰품이 소실되면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는 상단주에게 문책을 받게 될 것이다.
마일즈에게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네의 계획이란.”
“뒤쪽으로 습격이 몰렸을 때, 마차를 비롯하여 후열을 통째로 버리고 갑니다. 어차피 그쪽의 수가 적고 습격이 집중되고 있을 테니, 마물은 앞쪽에 신경을 못 쓸 겁니다. 그사이 우리는 숲을 돌파합니다.”
“……짐은 옮겨 싣도록 하게. 하지만 자네가 말한 일은…….”
“상황을 봐서겠지요. 잘 압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파울이 미소를 지었다. 독니를 드러낸 뱀 같은 미소였다.
*
“어젯밤에는 좀 잠잠하던걸. 다행이야.”
“그래, 한 번밖에 습격이 없었지?”
“이 숲에 사는 마물들 씨를 우리가 말려 버린 것 같은데.”
페이스 용병단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곧 출발하면 다들 입을 다물테지만,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퓌엔이 말했다.
“마일즈가 불가피하면 마지막 마차를 버려도 좋다고 지시했어. 어젯밤 짐을 바꿔 실은 모양이야.”
“그럼 뒤쪽 마차엔 주로 식량이 담겨 있겠군요?”
“그래, 식량이야 이 빌어먹을 숲을 나가면 수급하면 되니까. 어이, 헬무트!”
“네.”
“곧, 네 사냥 실력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기 많이 먹는 놈들이 좀 있으니 부지런히 뛰어야 할 거다.”
“네.”
헬무트는 잠깐 고민했다. 자기가 들은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할지.
장작을 더 구하려고 바로 근처의 숲으로 들어가 있던 참이었다.
그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한 이들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인정받았기에 헬무트는 홀로 움직이는데 자유로워졌다.
그런 와중에 그는 마일즈와 파울이 한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다.
헬무트는 본능적으로 기척을 죽였다. 오십 걸음도 더 떨어져 있던 거리니 엿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들린 것뿐이다. 청력이 비상한 게 문제였다.
‘페이스 용병단을 버리고, 방패막이 삼아 내뺀다.’
그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게 인간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인 결정은 아니라는 것을 헬무트도 알았다.
‘이게 배신이라는 건가.’
다리언이 당했다던 배신. 아마도 그가 목격한 인간 세상에서의 첫 배신.
페이스 용병단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오늘 하루 잘 견뎌 내자면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내가 퓌엔에게 말을 하면, 그는 어떻게 할까.’
마일즈에게 따지고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증거는 없다. 증거는 오직 헬무트의 말뿐. 헬무트의 말을 믿더라도 의뢰를 포기하고 우리끼리만 숲을 빠져나가겠다고 할 퓌엔이 아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페이스 용병단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
‘이왕 들킨 김에 노골적으로 버릴지도 모르지.’
어제 전투의 피해가 컸다. 부상자도 셋이나 된다. 페이스 용병단은 끈끈하므로 누군가를 버리고 가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쪽에서는 자신들의 의도가 들킨 김에 페이스 용병단 전체를 버리는 것을, 더욱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다.
헬무트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 흐름대로면 2급 용병 셋이 협력하여 그 원숭이 마물을 때려잡는 상황은 나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놈을 잡을 건 나뿐이다. 실력을 숨길 수는 없어. 그렇다면 내 실력을 목격한 자들이 적을수록 좋겠지.’
차라리 잘 된 기회였다.
헬무트가 생각보다 강한 검사라는 걸 알게 된 핀도 헬무트와 파헤의 숲을 전혀 연결짓지 못하는 눈치였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추측해 보게 하자, 핀은 헬무트가 아마 은퇴한 검사와 숲속 깊은 곳에서 함께 살다가 거길 찾아온 스승의 원수에게 쫓겨 그 꼴이 되었을 거라고 한편의 창작 소설을 지어냈다.
그리고 헬무트가 실은 멸문한 귀족 가문의 사람일 거라는 추측도 덧붙였다.
일부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뜨끔하기도 했지만, 그걸로 헬무트는 실력을 드러낼 확신을 얻었다.
‘만약 파헤의 숲과 내 관계를 짐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헬무트는 그들의 입을 막아야 했다. 죽여서라도.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핀이 말해 준 시나리오는 이후에도 유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