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54
353
◈
353
“어이, 알아들은 거야?”
기다리다 못한 시안이 묻자, 그제야 아레아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스카가 파르네세 대공의 아들이고, 사실 황족이었다고 한 거잖아. 이해했어.]비록 황족이라는 단어와 아스카가 썩 잘 어울리진 않지만, 그가 대단한 가문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추측하고 있던 터였다.
아레아의 말투는 냉정했다.
[그럼 너와 아스카는 한동안 황궁에 머물 수밖에 없겠군.]아스카가 황족이 되는 쪽이 이쪽에도 유리하긴 하다. 그가 파르네세 대공의 아들로서 인정받는다면, 헬무트에게는 세력 있는 우군이 생기게 되는 거니까.
시안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 녀석이 마음만 바꿔먹는다면, 모두에게 좋아지는 일인데 말이지.”
어쨌든 이 중에서 아스카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의 행복을 중시하는 이는 없어 보였다.
[좀 더 신중해야겠지. 파르네세 대공이 얼마나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로서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야. 아스카가 헬무트를 돕고 싶다고 한다고, 그가 제국을 움직일 수는 없어. 파르네세 대공은 황제의 동생이지 황제가 아니니까.]게다가 정확히는 파르네세 대공은, 자신이 정하고 아스카를 따르게 하는 편이었다.
아스카가 아무리 박박 우기더라도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더군다나 제국은 신전과 꽤 가깝지. 이번 황제에 들어서는 좀 달라졌다곤 하지만, 제국 내에 신도도 많고.]아레아는 신전과 유착 관계에 있는 나라들을 미리 조사해뒀다. 제국도 그중 한곳이었다.
다만 신전은 제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치밀하게 노력해왔다. 계승권 다툼에 끼어든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였다.
그들은 영민한 현 황제 대신 자신들이 다루기 쉬운 다른 황자를 황위에 올리려고 물밑에서 애를 많이 썼다.
그것은 자신들의 세력이 줄고 있음을 의식하고, 가장 강력한 제국에 더 많은 입김을 불어 넣어 세를 회복하기 위험이었다.
그 때문에 현 제국의 황제는 신전을 곱게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관계와 신도들의 문제가 있기에, 제국으로서도 함부로 신전과 척을 질 수는 없는 법.
현 황제는 즉위한 후 승자에 대한 예우로 신전이 보낸 우호의 의사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치열한 계승권 전쟁을 치르고 권좌를 차지한 자들은 자신의 정적과 그를 도운 자들을 잊지 않는다. 황제 역시도 마찬가지이리라.
‘나의 적을 도왔는데 감정이 좋다면 인간이 아닐 테지. 그리고 황제 역시도 인간이니 그 점에 걸어보는 수밖에.’
시안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참 우리 대화, 황실 마법사 측에서 엿들을 수도 있어.”
[나는 네가 아니고, 나와의 대화는 그쪽에서 엿들을 수 없어.]아레아와 연결된 동안은, 주변의 파장이 흐려진다.
황실 마법사 중에 대마법사는 없고, 아레아는 벌써 대마법사의 경지에 근접해 있다.
마법사는 저보다 강한 마법사의 마법을 뚫는 것이 힘드니, 시안이 염려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잘나셨네, 참.”
혀를 찬 시안이 물었다.
“그래, 어디로 간진 모르겠지만, 네가 간 쪽은 일이 좀 잘 되고 있어? 헬무트는?”
[……잘 되고 있지.]약간 간격을 둔 대답이었다. 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문제 있어?”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 뭐, 좋아. 네가 말해준 정보는 잘 취합해 보지. 또 알게 되는 게 있으면 말해.]“그래, 너희 쪽도…….”
시안이 신호가 일방적으로 뚝 끊겼다. 제 할 말을 다 하자 바로 대화를 중단하는 게 퍽 아레아다웠다.
시안은 그저, 자신이 황궁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자랑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을 뿐이다.
“잘 되고 있다니, 애매하네.”
뭘 계획하는지, 그 때문에 뭘 준비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시안이다.
물론, 이렇게 황궁에 잡혀 온 시점에서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
“그나저나 아스카 녀석은 잘 적응하고 있으려나?”
시안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유일하게 할 일이 없는 건 그뿐이었다.
*
그 시각, 황실 기사단에게 잡혀 온 사바트와 제롬은 그들이 동원한 이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대체, 우리가 왜 잡혀 와야 합니까!”
“이유나 좀 들읍시다!”
격렬하게 항변에도 황실 기사단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어떤 설명도 없었다. 귀족은 평민과 다른 처벌을 받는다.
어지간한 중범죄가 아니고서야 귀족을 감옥에 처넣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을 영문 모르고 당하는 사바트와 제롬의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감옥에는 퀘퀘한 냄새가 났고, 그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좁은 감옥에서 창살 밖만을 내다봐야 했다.
사바트와 제롬은 간수가 모습을 보일 때마다 창살을 쾅쾅 치면서 소란을 피웠다.
자신들의 가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여기서 나갈 수 있으리라. 그런 믿음으로.
그러나 간수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갇혀 있던 이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거참 시끄럽네.”
“재수가 없으려니깐 이런 일에 얽혀서!”
사바트가 의뢰한 이들 중 한 명이 침을 탁 뱉었다. 사바트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이 타는 듯했다.
“어디서 감히 그따위 소리를! 네놈들이 누구한테 고용됐는지 잊은 거냐?”
그러자 금세 감옥 안의 분위기가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아니, 잘나신 도련님, 지금 상황파악이 안 돼?”
“지금 누구 때문에 인생 조지게 생겼는데!”
“그래, 평민 하나 처리하는 거라고 했잖아! 평민 새끼 한 마리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 잡혀 온 것 같아?”
사기 계약을 당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여기 있는 이들은 아스카를 잡으려고 엄선된 이들. 하나같이 실력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살기를 내뿜으며 쳐다보니, 아무리 자존심 센 사바트라고 해도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귀족님들이시니 죽진 않을 수도 있겠지. 어찌어찌 나가실 수 있을지도? 근데 우리는 어쩐담?”
“어차피 인생 망한 건데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분풀이를 좀 하고 싶어지는데.”
손에는 비스를 제한하는 족쇄가 차여져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쪽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애초에 사바트와 제롬이 이들보다 실력이 낫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라면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제롬이 창살을 치면서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간수, 여기 폭동이다! 우리는 귀족이란 말이다! 우리가 죽게 내버려 둘 건가!”
쾅쾅거리는 소음이 감옥 밖으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곧 간수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지위가 높아 보이는 황실 기사단원 한 명, 그리고 다수의 병사들이 함께였다. 감옥 안을 슥 훑어본 황실 기사가 지시했다.
“이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 한 명씩 끌어내!”
감옥에 갇힌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먹고 마시긴커녕 잠도 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사바트 루갈은 드디어 조사실에 앉게 되었다. 제롬과도 떨어져서, 혼자였다.
애초에 그는 무슨 죄를 저질렀든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감옥이 아니라. 아니, 여기에 있는 것조차 말이 안 된다.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황실 기사가 들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그를 관찰하듯 쳐다보는 눈이 매서웠다.
사바트 루갈은 황실 기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겁니다. 나는 사바트 루갈. 명문 검사의 후손입니다! 날 이렇게 대해선 안 되는 겁니다!”
사바트 루갈은 한없이 당당했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아스카는 그냥 시건방진 평민이고 헬무트가 치러야 할 대가를 대신 치러야 하는 녀석일 뿐이다.
그게 사실이 아니고, 아스카가 그가 생각한 대로 평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건 애초에 의식에서 배제했다.
황실 기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도 명문 검가 출신이고, 그건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게 아니지. 자네가 저지른 죄를 알고 있나?”
“제,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황족 시해 모의 및 미수죄.”
그제야 사바트 루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그, 그게 무슨. 어떻게 제가 그런 죄를 지었다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네가 노린 그분은 황족이시다. 몰랐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정말, 몰랐는지도 알 수 없으니 말이야.”
황실 기사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사바트 루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황족 시해 모의 및 미수죄. 귀족이라도 극형에 처하기에 족한 일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가문에까지 책임을 물 수 있다.
루갈 후작이 작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을 만한 중죄였다. 아스카는 그냥 황족도 아니고, 자그마치 파르네세 대공의 유일한 적자니까.
공교롭게도, 루갈 후작은 현 황제와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 계승권 전쟁 당시에 적극적이진 않더라도 현 황제의 반대편에 손을 들어준 터였다.
워낙 강성한 가문이고 우수한 기사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 검가이기에, 황제도 크게 걸고 넘어가지 않았을 뿐이다.
“말도 안 돼…….”
사바트 루갈이 새파래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사는 손에 든 종이를 그에게 펼쳐 보였다.
“게다가 제롬 고트가 말하기로는 자네가 이 모든 일을 주도했고, 자신은 자네의 극성에 못 이겨 동참한 거라더군. 증거가 있다고.”
“그, 그 배신자 새끼가 저도 함께해놓고는!”
흥분한 사바트 루갈이 수갑째로 책상을 쿵쿵 쳤다.
어쩐지 자신에게 좀 늦게 왔다 싶더라니 제롬을 먼저 심문한 모양이다.
제롬 고트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사바트 루갈이 아스카를 응징할 실력자들을 고용하기도 했으니까.
사바트 루갈은 생명줄을 붙잡듯 말했다.
“우, 우리 가문에서는…….”
“루갈 후작가에는 이미 이야기가 들어갔다. 후작이 똥줄이 탔는지, 황제 폐하께 알현 요청을 넣었다더군. 그쪽에서는 이미,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이지.”
황실 기사가 빙긋 웃었다. 호의가 담긴 미소가 아니라, 비웃는 듯한 표정이었다.
“가문에서 쫓겨나 평민이 된 자네가 어떻게 살지는, 나도 궁금해지는군. 물론 그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관대한 처분일 테지만 말이야.”
느긋하게 덧붙인 황실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바트 루갈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는 그저 망연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