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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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로 들어선 그들은 소파에 앉았다.
에단은 고뇌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듯 미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한 모녀가 내 저택을 찾아왔다. 그들이 네 이름을 댔을 때 정말로 놀랐다.”
“수잔과 세라로군요.”
“그래, 그들은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들에게서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헬무트는 물었다.
“수잔과 세라는 어디 있죠?”
엘라가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정신 사납게 그들을 찾고 있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하얀 고양이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에단의 눈에도 들어왔다. 심지어 그 고양이는 헬무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헬무트가 고양이를 달고 다니는 모습은 척 보기에도 이상했다.
하지만 에단에겐 그걸 의식할 정신이 없었다.
“오전부터 마을에 물건을 사러 갔다. 이 저택엔 여자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이 없어서 말이지. 그들은 모두 건강하다. 특히 세라, 그 아이는……. 검술이 퍽 빼어나더구나.”
“제가 가르쳤으니까요.”
담담하게 드러내는 오만에 에단 쿠드로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네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닌, 당사자에게서 들어야 하는 이야기. 헬무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4년 전 그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사연들이 흘러나왔다.
길고 무거우며 때로는 참담하기까지 한 이야기.
에단 쿠드로는 그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많은 일들을…… 겪었구나.”
그리고 그는 이내 덧붙였다.
“견뎌내줘서 고맙다.”
견디고 살아서, 내 앞에서 나타나 줘서 고맙다고.
다리언에게 진 빚 때문에 후원했던 그의 제자, 고작 그 정도로 생각했다면, 에단이 그런 말을 할 리 없다.
수잔과 세라가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도 에단은 헬무트가 살아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애초에 헬무트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깊은 의구심을 느꼈다.
난데없이 등장한 헬무트였다. 그러니 떠날 수도 있다. 그가 검술학부에서 더 무언가를 배우기는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랬다면 리노사로 향할 때, 에단에게 언질을 주고 갔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릴 녀석은 아니었다.
후에 편지라도 보내왔을 터.
이렇게 사람이 지워지듯 깨끗하게 사라져버릴 수 있는가. 도무지 납득 되지 않는 일이었다.
에단 쿠드로는 당시 리노사에 그레타 아카데미의 이름으로 헬무트의 행방을 요구했다.
리노사에서는 그가 떠났고, 그 이후로는 모른다고 모른 척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 건 샤를로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아레아가 에단 쿠드로에게도 진실을 숨길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에단 쿠드로는 그 이후로 리노사를 두 번이나 방문하여 헬무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레타 아카데미에 속한 교관인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었다. 불법적인 수단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는 결국 헬무트의 행방에 대해서 전혀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소득을…… 얻은 것도 있었나.’
불쑥 떠오르는 기억. 에단은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 전에 우선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쩔 셈이냐. 나한테 말하지 못 하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좋다.”
에단 쿠드로도 왜 헬무트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진실을 자신에게 진작 말하지 않았는지, 이해한 터였다.
그가 휘말리기엔 너무도 큰 사건이었고, 꼭 그가 헬무트의 손을 들어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는 일이었다.
에단 쿠드로라고 해서 바덴이나 그레타 아카데미를 걸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그는 그 개인으로서 헬무트의 편에 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결정했다.
그것은 단순히 다리언에 대한 목숨 빚 때문만은 아니었다.
헬무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에단은 분노를 느꼈고, 슬픔을 느꼈고, 부당하고 명예롭지 못한 어떤 일에 대한 검사로서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것이 그의 결심을 서게 했다.
“제 계획은…….”
헬무트는 간략히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 에단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들은 에단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쉽지 않은 길이 되겠구나.”
“이미 쉽지 않은 길을 헤쳐왔지요.”
“그래, 응당 그렇게 해야겠지. 그것이 너의 권리이며, 나아가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자식을 버리고 배신하고, 그 또한 참담한 일이지만 리노사는 자신들의 은인을 배신했다.
헬무트는 대공을 구했고, 대공녀를 구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건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인륜을 저버리는 짓이며, 또한 명예를 땅에 처박는 짓이다.
그 배신은 신전 때문이 아닐 터. 아마도, 두려웠던 것이리라.
헬무트라는 존재가. 그가 보인 힘이. 그것이 리노사를 뒤흔들게 될까 봐.
하지만 그 결정은 적어도 리노사를 다스리는 대공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에단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찾아 리노사를 두 번 방문했다. 그리고 그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방문에서, 나는 대공을 만났다.”
헬무트와 아레아의 눈빛에 일순 변화가 일었다.
“리노사 대공이…….”
“그래, 정확히는 대공이 나를 불러들인 것이지. 그는 일개 아카데미 교관이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니까.”
리노사 대공, 아버지. 리노사의 지배자. 헬무트는 상대적으로 어머니에 비해서 아버지에 대한 관념이 옅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무정한 편이었다. 샤를로트도 미하엘도 그를 존경할망정 가깝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헬무트의 경우는 버려지는 순간에도 단 한 번도 그와 접촉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저 리노사 대공이었다. 그렇게만 인식되는 존재였다.
에단 쿠드로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대공은 내가 리노사에서 실종된 너를 찾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더구나. 어째서 학생 한 명을 그토록 열심히 찾고 있느냐고. 나는 내가 너를 후원하고 있었다고 말했지. 그러자 대공이 너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입에서 새로운 말이 흘러나오려는 찰나, 바깥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히히힝!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세라! 천천히 가면 되잖아. 왜 그렇게 말을 성급히 몰아!”
“누가 왔나? 응접실에 불이 켜져 있는데?”
수잔의 타박에 뒤이어 세라의 날카로운 추리가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목소리는 먼 거리에서도 생생히 들렸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에단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돌아왔나 보군. 그들을 먼저 만나보지.”
어느새 헬무트의 무릎을 박차고 뛰어내린 엘라가는 이미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
새삼 엘라가에게 그가 돌본 인간들이 새끼처럼 생각되는 건지, 아니면 애완동물일지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헬무트도 그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현관에 나가 보니 수잔과 세라는 말등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수잔이 세라를 쫓아다니면서 잔소리하는 것이 보였다.
“세라! 살살 내려놔! 그러다 부서지겠다!”“에이 그냥 대충 하면 되지. 이거 왜 이렇게 끈이 안 풀어지지?”
그러다가 문득 세라의 시선이 확 돌아갔다. 헬무트의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그녀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헬무트!”
수잔도 뒤늦게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헬무트! 어떻게 벌써 여기에?”
[내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 거냐.]그들을 돌봐준 것은 이쪽이건만. 땅바닥에 가깝게 있던 엘라가가 툴툴거렸다.
그는 헬무트보다 앞서서 그들에게 다가온 터였다.
“아아, 엘라가님! 그 모습, 적응이 안 된다구요.”
세라가 손을 뻗어 엘라가를 안아 들었다. 어차피 헬무트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릴 만큼 오랜만은 아니었을뿐더러, 그렇게까지 친근하지도 않았다.
엘라가가 냐옹 거리며 소리를 냈다. 세라가 턱을 긁어주니 기분 좋은 눈치였다.
‘이젠 아주 고양이가 다 됐군.’
생각한 헬무트가 수잔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잘 지내고 있었나 보군요.”
그녀나 세라나, 얼굴이 확 피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파헤의 숲에 있을 때보다 혈색도 좋아지고 건강한 기색이었다.
물론, 세라는 늘 건강했으니 수잔의 경우가 더 변화가 뚜렷했다.
“아아, 그럼 물론이죠. 에단 교관님이 부족함 없이 생활하게 해주셨거든요. 이 저택은 참 좋은 곳이에요. 편지 써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헬무트, 한참 후에나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덴에 볼일이 있어서요.”
“세라는 여전히 열심히 훈련하고 있어요.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헬무트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둘 거라고 의욕에 불타고 있거든요.”
‘그건 불가능한데.’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헬무트는 검술학부 수석이었다.
수석은 1등. 1등보다 나은 성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헬무트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수잔은 헬무트를 보며 환히 웃었다.
“아무튼 다시 보게 돼서 기뻐요.”
그러다 그녀는 저 뒤에서 걸어 나오는 아레아를 보고 왠지 흠칫했다.
아레아가 짤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레아는 여전히 아름답네요.”
“네.”
어색하고 짧은 대화가 오갔다. 아레아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지만, 별로 편해질 수는 없는 사이였다.
그때 짐을 내린 말이 고개를 털었다. 푸드득!
“음? 이 녀석은.”
그 말의 모습이 익숙했다. 말도 헬무트를 알아봤는지 콧김을 뿜었다.
헬무트는 말에게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불현듯 입이 열렸다.
“화이트?”
헬무트는 자신이 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바덴에 오면서 의뢰의 대가로 받은 말이던가. 리노사에 갈 때는 마차를 타고 갔기에, 말은 두고 갔다.
그동안 화이트는 에단 쿠드로의 저택에서 돌봐지고 있던 터였다.
“아직 살아 있었군.”
화이트가 알아들은 것처럼 헬무트의 손길을 홱 뿌리쳤다.
놈이 콧김을 뿜으며 헬무트를 노려봤다. 성질머리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레아가 핀잔을 던졌다.
“말의 수명이 그렇게까지 짧진 않아. 네가 수 십년을 거기에 있다가 온 것도 아니잖아.”
“……그랬지.”
그가 남기고 간 것 중 어떤 것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이 또한 그중의 하나이리라.
헬무트가 감회에 잠기든 말든, 뒤늦게 나타난 에단이 초를 쳤다.
“그 말은 이제 세라의 것이야.”
“제가 이름도 새로 지어줬어요. 얘 이름은 이제 크림이에요!”
크림이나 화이트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헬무트는 세라가 자신과 비슷한 작명 센스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짤막하게 항의했다.
“제 말인데요.”
“네가 두고 갔고, 내가 먹여 키웠으니 나한테 권리가 있지.”
“그래요, 이제 제꺼예요!”
세라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헬무트는 잠깐 되찾은 줄 알았던 말의 소유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크림이라고 이름이 바뀐 말도, 헬무트보다는 세라를 더 좋아하는 눈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