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61
360
◈
360
“좋을 대로 해.”
헬무트는 선 자리에서 자기 것을 빼앗기는 경험을 했다. 어차피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었다.
무정한 주인을 콧김을 뿜으며 바라본 말은 홱 고개를 돌렸다. 화이트와 헬무트의 짧은 재회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수잔과 세라는 짐 정리를 하겠다며 사라져갔다.
세라의 가벼운 발놀림에서 그녀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헬무트는 에단 쿠드로에게 관심을 돌렸다.
못다 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다시 응접실에 자리하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그래, 리노사 대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 그는…….”
미간을 좁힌 에단은 기억을 더듬었다. 에단 쿠드로가 리노사의 궁으로 불려가 리노사 대공을 마주한 시각은 늦은 밤이었다.
흑익 기사단원을 통한 은밀한 부름. 에단은 실종된 헬무트의 행적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만약 리노사쪽에서 뒤가 구리다면 그를 제거하려고 들 수도 있다.
대공씩이나 되는 자가 이렇게 비밀리에 자신을 데려갈 이유는 뭐가 있단 말인가.
에단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대공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더라도, 그가 있는 곳은 리노사였다.
대공은 원한다면 언제든 그를 제거할 수 있다. 에단 쿠드로가 그레타 아카데미 교관이라는 사실도 리노사 대공쯤되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에단은 리노사 대공의 부름에 응했다.
“나는 리노사 대공을 처음 본 순간, 충격에 사로잡혔다.”
전율이 일었다. 지배자다운 위엄이 서린 모습. 사람을 짓누르는 특유의 분위기.
그는 에단 쿠드로가 본 군주 중 가장 인상적인 외형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단이 충격에 사로잡힌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너와 흡사하더구나.”
칠흑처럼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 무게가 실린 눈빛과 이목구비는 바로 헬무트를 떠올리게 했다.
두 사람을 모두 본 자라면 그들의 혈연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닮았다. 무척이나.
마치 헬무트가 성장하여 나이 든 모습을 보는 것처럼.
오래 병상에 누워 있었던 것치고는 강건해 보이는 몸이었다.
“지금의 너는…… 더욱 그를 닮았구나.”
핏줄의 힘이 이토록 무서운가. 헬무트는 놀랍게도 더욱 대공을 빼다 박은 듯이 성장했다.
에단 쿠드로는 혀를 찼다.
“대공은 내가 헬무트라는 소년을 찾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자신이 병상에 누워 있어 살피지 못했으나, 아카데미 검술대회 우승자가 리노사에서 실종되었다면 심히 불미스러운 사태고 그를 찾는데 협조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지. 그의 말은…… 그때에는 진실처럼 들렸다.”
에단은 조금 더 깊게 회상을 침범했다. 그에게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재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호한 말투와 그 힘이 실린 음성에서 느껴지는 권위.
리노사 대공은 그를 불러내 떠보려고 거짓된 소리를 늘어놓을 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카데미 교관 따위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남자. 에단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단의 시선이 헬무트의 시선과 맞닿았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에단의 이야기는 헬무트에게 어떤 짐작을 가능케 했다.
“대공은 내게 너에 대해서 물었다. 헬무트란 소년에 대해서 가급적 상세하게, 알려주길 바랐지. 너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
사소한 흥미나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돌이켜 보아도 에단 쿠드로는 그때 리노사 대공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 수 없었다.
리노사 대공의 검은 눈은 헬무트의 것보다 깊었고, 그 때문에 그의 속내는 도통 읽기가 어려웠다. 에단은 말을 이었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싶었고, 그 때문에 너에 대해서 그에게 이야기했지. 네가 가진 비밀, 예컨대 검성의 제자라는 것 같은 사실들은 빼놓고서. 당연히 좋은 이야기뿐이었지. 네 아카데미 성적은 굉장히 우수하지 않았느냐.”
에단 쿠드로가 피식 웃었다.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대공은 잠자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지. 이내 그는 뭔가를 알게 되면 내게 말해주겠다고 했다.”
리노사에서 그를 배신했다면, 리노사 대공이 헬무트에게 적대적이라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에단 쿠드로가 반추해본 대공에게선 전혀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기묘하게도 덤덤했고, 차분했다. 정보를 요구했으나 단순한 흥미 같지 않은, 뭔가가 거기에 있었다.
에단 쿠드로는 그때 대공에게서 느꼈던 그 기이한 느낌이 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게도, 뭔가를 알게 되거나 좋은 소식이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길 바란다며 대공은 내게 이것을 주었다.”
에단 쿠드로는 서랍을 뒤적여 어떤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작은 수정구슬이었다. 표면에 리노사의 인장이 박혀 있는.
아레아의 전문 분야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수정구슬을 집어 들었다.
“직통으로 연결되는 수정구슬인가. 가동할 수 있는 물건이로군요. 사용하면 대공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수정구슬을 에단 쿠드로에게 돌려주었다. 그제야 그의 신경이 아레아에게 미쳤다.
“그래, 그보다 나는 네 모습이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구나.”
에단이 아레아를 보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헬무트와의 재회에 가려졌지만, 그는 아레아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란 터였다.
일단 수잔과 세라에게 자초지종을 듣기는 했지만, 그때도 잘 믿기지 않았다.
여학생이 남학생으로 변장하고 아카데미를 다니고, 졸업까지 하다니!
학장이 그 사실을 주도했다는 것을 알고 그는 교직원으로서의 깊은 회의감과 학장에 대한 불신을 느꼈다.
학장을 고발하고도 남을 만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아레아는 신전의 공적이고, 우수한 마법사 학생의 안전을 지켜주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는 것을 그는 못내 이해했다.
그가 이해하건 어쨌건, 눈앞에서 여자인 아레아가 돌아다니는 건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거참……. 게다가 둘이 그런 사이였단 말이지.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고.”
에단 쿠드로는 헬무트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게 참 많았다. 이제라도 진실을 알게 되어서 다행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섭섭한 감은 있었다.
“어쨌거나 험한 과정을 거치고 먼 길을 돌아서, 결국 돌아왔구나. 네 귀환 기념으로 식사를 들자꾸나. 오랜만에 함께.”
에단 쿠드로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쿠드로 저택의 만찬은 기대할 만했다.
이미 요리사에겐 특별히 귀빈을 맞아, 솜씨를 부리라고 말해둔 터였다.
바람직한 제안에 헬무트와 아레아, 둘 모두가 순순히 응했다.
“좋지요.”
“기대되네요.”
“근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까 저 고양이, 말을 하는 것 같던데. 아레아 네 마법 실험체인가?”
에단 쿠드로가 헬무트가 앉은 소파 팔목 받침에 올라앉은 엘라가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엘라가에 대해서는 별말을 듣지 못한 터였다. 엘라가가 발칵 성을 냈다.
[누가 마법 실험체라는 거야? 무엄한 인간! 감히 이 엘라가 님에게.]에단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을 하는 게 맞았군! 고양이가 말을 하다니!”
[그래, 내가 말하는 데 무슨 문제 있어? 고양이가 말을 할 수도 있지!]“아니, 보통의 고양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고양이는 정체가 뭐지?”
단호하게 반박한 에단은 헬무트를 향해 물었다. 헬무트는 캭캭거리는 엘라가를 빤히 쳐다봤다.
왠지 에단에게 경계심과 적의를 드러내는 엘라가였다.
그로서는 이쪽이 헬무트를 다 고이 길러놓고 키워놨는데, 에단 쿠드로가 소유권 주장을 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 터였다.
더군다나 그가 수잔과 세라를 돌보고 있다지 않은가.
보통은 잘 돌봐줘서 고맙다고 생각할 텐데, 엘라가는 반대였다. 그는 도리어 빼앗긴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힘든 건 내가 다했는데, 고작 주거지와 음식을 제공해줬다고…….’
헬무트는 엘라가의 목덜미를 집어 들었다. 고양이는 목덜미를 잡히면 꼼짝하지 못한다. 엘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사하면서 설명하지요.”
설명할 것이,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에단 쿠드로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가가 파헤의 숲에서 가장 강한 마물씩이나 될 거라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였다.
***
헬무트와 아레아가 에단 쿠드로의 저택에서 재회를 누리고 있을 때, 아스카도 나름의 만남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만남을.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네 명의 신입 황실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아스카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황태자를 향해 예를 갖추지 않는다면, 처벌을 당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입 기사단원들이로군.”
나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스카는 상대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사촌을. 황태자는 정말로, 아스카와는 반대되는 타입이었다.
‘여자처럼 생겼잖아?’
그게 황태자를 본 아스카의 첫 감상이었다. 황태자한테 느끼는 감상치고는 불손하기도 했다.
아스카도 어릴 적엔 깨나 여자 같다는 소리는 듣고 살았다지만, 성장하고 나서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남성미를 풍기고 있는 터였다.
잘생겼다는 소리는 들어도 예쁘장한 소리는 이제 못 듣는다.
하지만 이 녀석은 어렸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만약 황태자에게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말이지만.
선명한 금발을 뒤로 곱게 묶은 황태자의 얼굴은 곱상했다. 투명하고 하얀 피부에 매끄러운 미소가 새겨진 유려한 이목구비.
검사나 학자라기보다는 기품이 철철 흘러넘치는, 사교계에 어울리는 명사 타입이다.
다리를 꼬고 이쪽을 쳐다보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귀공자처럼 하얀 예복을 입고 있다.
‘우웩! 남자로 변장한 아레아 같군.’
물론 아레아가 더 예쁘긴 하지만, 이 녀석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다.
혹시 이 녀석도 남장한 여자 아닐까?
아스카는 의심의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황태자도 대번에 아스카에게 흥미를 드러냈다.
애초에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모를 리 없다.
“거기 푸른 머리는, 이름이?”
“아스카입니다.”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샅샅이 탐색하는 듯한, 사촌지간의 치열한 시선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