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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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트의 제국 행이 결정되는 동안, 헬무트와 아레아, 시안은 파르네세 대공저택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각자의 일상대로.
시안은 일부 폐쇄된 황궁 도서관을 들락거렸고, 아레아는 자기 나름대로 마법연구에 몰두했으며, 헬무트는 늘 그랬던 것처럼 검술 수련을 했다.
엘라가는 고양이에게 좀 더 우호적인 수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매일같이 저택 밖을 드나들었다.
데우스 제국의 수도는 인간의 도시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곳. 엘라가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다들 아카데미에서의 일상과 퍽 비슷한 하루를 보냈다.
다만 파르네세 대공의 후계자로서 이런저런 교육을 받는 아스카만이 원치 않은 일상으로 시달릴 뿐이었다.
매일같이 알록달록하게 옷을 바꿔입는 그를 엘라가는 신기한 듯이 관찰했다.
[인간의 옷이란 건 참 쓸데없고도 신기하군. 거짓 껍질을 저렇게나 화려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만들다니.]그리고는 잘난 체를 해댔다.
[나처럼 아름다운 털을 가지고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지. 털 없는 미개한 종족들이나 인위적인 껍질이 필요할 뿐.]“나도 이런 거 왜 입는지 모르겠거든요. 괴상한 풍습이야.”
아스카가 안면을 팍 구긴 채 중얼거렸다.
“어머, 너는 인물이 좋아서 뭘 입어도 잘 어울리니 보기가 좋은걸.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지.”
“어머니.”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아스카의 친구들이로군요. 모쪼록 즐겁게 지내다 갔으면 좋겠어요.”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등장한 아스카의 어머니는 청순한 인상의 귀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평민으로 자란 여인답지 않게 온몸에서 기품이 풀풀 풍기는 그녀는 놀랍도록 아스카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파르네세 대공과 대공비를 보면 아스카처럼 성질 사나운 녀석이 도대체 어디서 떨어졌는지 의심이 갔다.
“대공께서도 제게 손님들을 신경 쓰라 당부하셨답니다.”
대공도 이들이 여기 와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있단 소리였다.
아스카가 어머니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어머니, 혹시 누구 한 명한테는 골방 줄 수 없어요?”
다분히 아레아를 표적으로 삼은 발언이었다. 헬무트의 여자친구건, 함께 파헤의 숲에서 살아나온 동지건 두 사람 사이는 썩 좋아지지 않았다. 애초부터 상성이 안 맞는 관계인 것이다.
아스카의 어머니가 바로 눈을 흘겼다.
“손님을 어떻게 그렇게 대하니.”
“쳇.”
아무래도 이 기회에 집주인이라는 걸 명목으로 아레아한테 복수해볼 모양이었던 그다.
하지만 아스카의 어머니는 아스카가 아레아의 욕을 줄곧 해댔음에도 도리어 아레아한테 호의를 보였다.
그녀도 자신의 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가 싫어하는 상대라면 오히려 멀쩡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머, 참 아름다운 아가씨네. 그레타 아카데미 마법학부 수석이라고? 정말 대단해요! 부럽군요.”
그리고 그녀에게 일행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을 내주었다.
아스카는 어머니의 노골적인 편애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어쩔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스카 어머니의 호의는 아레아한테도 달갑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아스카 어머니는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아레아와 자꾸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집주인이 티타임이다 뭐다 불러내니 아레아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수다에 응해야만 했다.
‘어쨌든 제국의 협조를 받아내야 하니까.’
파르네세 대공이 애처가이니 그의 아내에게 잘 보여도 좋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또 아레아는 자신에게 황궁 도서관 출입 권한을 줄 수 있는 게 파르네세 대공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황태자가 습격당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거기에 잠입할 수는 없으니까.
문제는 아스카의 어머니가 아레아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왕 여기 머무는 김에 무도회에도 나가보는 게 어때요? 드레스는 내가 맞춰줄게요.”
“괜찮습니다.”
“제도의 사교계는 화려하지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저는 춤을 출 줄 모릅니다. 그런 걸 배울 필요도 없었고요.”
“어머, 그럼 잘됐네요. 아스카와 함께 배우면 되겠어요! 그 애도 요새 배우고 있는데. 아레아는 똑똑하니까 금방 배울 거예요.”
“저는 배우지 않아도 상관 없…….”
“나도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어릴 적에는요. 하지만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요.”
파르네세 대공비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그녀도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다.
만약 헬무트가 리노사 대공이 된다면 아레아는?
대공비의 의무가 따를 테니 당연히 무도회 같은 것을 회피할 수 없게 될 터.
아스카의 어머니는 집요했고, 그녀가 한 말은 일리가 있었다.
“헬무트도 함께 배우지요. 예법과 춤, 모두 배워두는 게 좋겠어요. 제국의 것은 타국의 기준이 되지요. 분명히 배워두면 쓸만할 거예요.”
그건 향후 헬무트가 리노사 대공이 되는 것을 적어도 파르네세 가문에서는 지지할 거라는 걸 암묵적으로 말해주는 건지, 뉘앙스가 미묘했다.
어쨌든 그녀는 대공비고 파르네세 대공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요.”
이 저택에 발을 들인 이상 선택권은 없었던 것 같다.
얼떨결에 시안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아스카가 받던 수업을 함께 받게 되었다.
아레아만 하게 만들면 나머지는 자연스레 하게 된다. 파르네세 대공비의 날카로운 공략이었다.
“어서 와 친구.”
아스카는 먼저 수업 장소에 나와 있던 시안을 향해 씩 웃었다.
이왕 고통받을 거 함께 고통받아서 기쁘다는 어둠의 분위기를 풍겼다.
대공비 덕분에 예복 하나 장만한 시안이 말끔한 녹색 예복을 입은 채 투덜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난 평민이라고. 이런 귀족 문화는 나한테 전혀 필요 없어.”
“새로운 게 좋다면서? 그렇게 입으니 너도 좀 사람 꼴 같은데? 내가 시킨 거 아니니 원망하려면 아레아를 원망해.”
“그러게. 걘 대체 무슨 바람으로…… 응?”
아레아가 하늘하늘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아스카는 입을 떡 벌렸다. 절대로 감탄의 의미는 아니었다.
아스카는 아레아의 미모에 이 세상에서 가장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너 미쳤냐? 소름 돋게 그런 걸 입고 다녀. 남자가 여장한 것 같구만.”
아레아는 바로 싸늘하게 반응했다.
“입 다물어.”
“어, 어, 음, 아. 잘 어울리네.”
그나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인 건 시안이었다.
반짝거리는 은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머리에 눈동자와 비슷한 보랏빛 꽃장식을 단 아레아는 일순 눈앞이 환해질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마 그녀가 무도회장에 들어선다면, 많은 이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헬무트가 그들이 있는 장소에 들어섰다.
아레아와 맞춘 듯한 하얀 예복을 입고 곱게 자란 귀족 도련님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게 정리된 헬무트.
화사한 옷을 입었음에도, 특유의 위험스러운 분위기와 압박감이 그 곱기만 한 느낌을 가시게 했다.
그 때문에 헬무트는 어딘가의 황족이나 황자처럼 보였다. 리노사 대공의 적자. 혈통을 외견으로 드러낸 모습이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스카가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 때보다 더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헬무트……?”
시안이 미심쩍은 듯 소리를 냈고, 아스카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오로지 아레아만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그 옷 잘 어울리네.”
“너도.”
헬무트도 감탄하는 기색으로 아레아를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넷이 있는데 둘만 있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그들을 두고 아스카와 시안이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열린 문 틈새로 왠지 목에 붉은 리본을 묶은 하얀 고양이가 걸어들어왔다.
[집주인이 선물해줬다. 이건 좀 괜찮은 것 같아. 소리도 나는군.]무엇보다 리본 아래서 딸랑이는 은방울 소리가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어머, 참 손님들이 인물들이 좋아서. 모두 잘 어울릴 줄 알았어요.”
뒤늦게 들어온 대공비는 손뼉을 딱 마주쳤다.
“그럼 모두, 열심히 수업을 받도록 해요. 고양이는 이리 나오고!”
대공비는 얼른 손을 뻗어 엘라가를 안아 들었다. 엘라가는 졸지에 그녀에게 끌려가 단장한답시고 털을 깎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네 명의 일행은 깐깐한 중년의 귀부인에게서 그날 내내 수업을 받았다.
가장 빠르게 예법을 익힌 것은 역시 아레아였다.
“옳지, 완벽해요! 걸음걸이도 자세도, 기품이 철철 넘쳐나는군요.”
하지만 사교춤에 가장 재능이 없는 것 역시도 아레아였다.
“거기서 가만! 그렇게 딱딱하게 몸을 움직이면……! 음악에 몸을 맡기면서, 힘을 빼고 부드럽게!”
귀부인은 머지않아 이마를 감싸 쥐고 한탄했다.
“맙소사, 정말 나무토막을 보는 것 같군요.”
처음으로 열등생이 되어본 아레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이가 악물렸다. 그녀에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굴욕이었다.
자신이 뭔가를 못하는 상황을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아레아였다.
하지만 제국의 사교춤은 상대 남성에게 맞추며 몸을 내맡기는 것이고,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에 익숙한 아레아는 도통 그런 종류의 일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누가 가까이 있으면 더욱 몸이 긴장하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가장 우수한 건 역시 헬무트였다. 까다롭고 복잡한 제국의 예법도 빠르게 익혔고, 사교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교춤에 대해서 간단하게 평했다.
“강약을 조절하는 것은 검과 같군.”
“뭔가 자신이 다 순리를 꿰뚫어 보는 양 말하는 게 재수 없어.”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조금 더 먼저 배우기 시작하여 복습 과정에 들어간 아스카는 수업에 잘 따라갔고, 시안도 꽤 빨리 적응했다.
그날 수업이 끝날 무렵 귀부인은 아레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좀 더 연습해야겠지만, 아레아 양은 되도록 헬무트 군과 함께 춤을 추는 게 좋겠어요. 헬무트 군이 좀 잘 맞춰주는 듯하니까.”
그나마 아레아가 믿고 몸을 맡기는 게 헬무트뿐이었다.
여자가 아레아 한 명뿐이기에 셋 다 아레아와 춤을 췄는데, 아스카와 시안은 아레아와 춤을 출 때마다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해하면서 몸을 굳혔다.
파트너가 그러니 그녀의 뻣뻣함이 배가되는 것이다.
“괜찮아, 아레아. 춤 정도는 못출 수 있지. 내가 더 잘해서 티 안 나게…….”
위로차 꺼낸 헬무트의 말은 그대로 아레아의 자존심을 후벼팠다.
아레아는 살벌한 눈으로 헬무트를 노려본 뒤 그대로 몸을 홱 소리 나게 돌렸다.
시안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헬무트, 넌 왜 검술 실력은 늘어도 눈치는 안 느는 것 같냐?”
“…….”
자신이 한 말이 어디가 문제였는지 알 수 없는 헬무트였다.
그리고 그들이 예법이니 춤이니 익히며 보낸 며칠 뒤, 중요한 소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