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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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가 진지한 얼굴로 헬무트에게 말했다.
“헬무트. 너 나와 어디 좀 갔으면 하는데.”
“어디를?”
“황궁, 귀하신 분이 기다리고 계신단다. 그…… 황태자라고. 일단은 내 사촌 형인데.”
아스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암살 시도가 있었던 직후, 황태자에게는 많은 제약이 생겼다.
변을 당할 뻔한 후계자를 걱정한 황제는 황태자가 도맡은 일을 대폭 줄였고, 그에게 한동안 휴식을 취할 것을 명했다.
일 중독자인 황태자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였다.
안 그래도 일하느라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데, 간만에 한 번 도서관을 찾았다고 변을 당했으니 그로서는 억울하기만 했다.
하지만 자고로 국정이란 멀쩡하고 맑은 정신 상태로 돌봐야 하는 법. 황태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당분간의 휴가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다만 하도 그간 열심히 살다 보니 할 일이 줄어드니 좀 심심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만날 수도 없다.
‘기도회’의 귀족 중에는 이번에 적발되기 전까지 신전의 편에 선 자인 줄 까맣게 몰랐던 자도 있었으니까.
황태자에게는 자신이 안전하게 만날 만한 상대를 떠올려 보았다. 어렵지 않게 그는 바로 아스카를 찾았다.
자신을 구해 주기도 했겠다, 마지막 순간에 구원자처럼 멋지게 등장했으니 호감이 생기지 않기도 힘들다.
그에게도 사촌 아우와 우애를 다져볼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아스카가 파르네세 대공이 될 마음을 품었다면 향후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될 인물이 그에게 호감을 가진 것이니 잘된 일이건만, 아스카의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에게 권력을 쥔 사촌 형이란 별로 얽히고 싶지 않은 상대.
황태자는 사람을 보내 주구장창 아스카를 불러댔고 아스카는 수업이다 뭐다 하는 핑계로 그의 부름을 회피해왔다.
아스카로서는 거북하기만 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비위에 맞춰 본 적도 없는 데다가 이제까지 했던 대로 틱틱대다가 사이가 틀어져도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황태자의 호감을 산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정 적응이 안 돼서 파르네세 대공이 못되겠다고 선언해도 아버지와는 별개로 황태자가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반대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회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황태자는 자그마치 황실 기사단장 보좌 급의 기사를 보내서 한 통의 편지를 전달시켰다.
‘내 초대에 응해 주었으면 좋겠군. 나로서도 친애하는 사촌 아우에게 명령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네.’
이번에도 피하면 명령을 내리겠다는 뜻이었다. 명령을 거부하면 반역이다.
‘저택의 새로운 손님과 함께 잠시나마 내 적적함을 달래 주었으면 좋겠군. 손님 중 뛰어난 검사가 있다지?’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아스카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의 입에서 바로 분노에 찬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 자식은 내가 지 심심풀이 장난감인 줄 아나? 적적함을 달래 달라게.”
그러나 상대는 장차 제국을 승계받을 황태자. 어쩌겠는가.
아스카는 황태자의 편지가 헬무트와 함께 황궁을 방문하라는 뜻임을 알아챘다.
세 명 중 검사는 헬무트밖에 없으니까.
‘아버지도 아시겠지?’
파르네세 대공은 철두철미한 자이고 헬무트는 엄연히 대공가의 손님이니 황태자의 독단으로 결정된 일이 아닐 터.
아스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내가 가서 잘 방어해 보지.”
아버지라면 어떻게든 자신이 조정해볼 수 있지만, 상대가 황태자라면 다른 문제다.
수틀리면 지금 당장 헬무트의 목을 치라고 할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게 파르네세 대공의 시험이라면 응하는 게 맞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나도 가겠어.”
[나도 간다.]그때 엘라가가 불쑥 끼어들어 선언했다. 아스카의 어머니에게 털을 밀린 다음, 며칠 의기소침해져 있다가 나름 그 모습에 적응했는지 다시 기가 살아난 그였다.
고양이 흉내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탓에, 왠지 저항도 하지 못한 엘라가였다.
그는 한동안 파르네세 대공비를 마녀라고 욕하고 돌아다녔고, 그녀의 그림자만 비쳐도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쳤다.
[내가 가서 너를 지켜주지.]어찌 보면 감동적인 발언이건만, 헬무트는 왠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아스카가 냉담하게 덧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는데 애완동물은 데려갈 수 없어요.”
[누가 애완동물이라는 거야! 이 건방진!]아스카 팔뚝에 엘라가의 발톱이 상처를 남기긴 했으나, 헬무트와 아스카는 어쨌든 엘라가를 떼어놓고 황궁에 입성했다.
아침이 막 지난 오전이었다. 황태자는 궁에 딸린 정원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나 황태자요’하는 느낌의 실용성 떨어지는 화려한 사냥복을 입고서. 짙은 푸른색에 금줄에 보석까지 달렸다. 거기다가 깃털 달린 사냥모까지.
‘겉멋만 들어선. 이 자식은 황족으로 안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어중간한 귀족이었다면 치장하다가 재산을 말아먹었을 놈이다.
확실한 건, 황태자의 화려한 이목구비에 그 호화찬란한 차림이 썩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황태자가 그들을 흘끗 쳐다보자 아스카와 헬무트는 바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가 웃었다. ‘싱긋’이라는 표현이 달려야 할 것 같은 미소였다.
“교육을 받는다더니, 태가 잡혔군. 그래, 이젠 좀 황족다워질 때도 되었지.”
그의 시선이 바로 헬무트를 향해 꽂혔다. 가늘어진 눈매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빛을 발했다.
“이쪽이 파르네세 대공저택에 머물고 있다던 그 손님인가.”
“헬무트라고 합니다.”
헬무트의 인사는 짤막했다. 황태자의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질 만치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과연, 평범하지는 않군. 리노사의 핏줄이라는 건가.’
황태자쯤 되는 지위에 있는 자라면 태어나서부터 이때까지 그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안달하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그 태도는 황태자에게 익숙하기 그지없는 것이라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그 때문에 아스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스카는 너무 거칠었다. 야생마 같은 길들지 않는 거침이 아니라, 애초에 모난 돌 같다.
민둥민둥한 돌 속에서 그처럼 뾰족하게 모난 돌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아마 아스카의 태도는 황제의 앞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조차 그가 황족이며 뛰어난 검사라는 사실에 비춰 보면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그가 윗사람을 우습게 여겨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 기질을 가진 자인 것이므로. 그 특별함은 황태자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헬무트는 아스카와는 또 달랐다.
그 역시, 황족으로 자라나지 않은 것은 아스카와 같을진대 고귀한 혈통이란 반드시 티가 나게 되어 있는 걸까.
비굴함은커녕 조금의 겸손함마저도 없다. 뽐내거나 부러 자신을 꾸미고 있지 않은 데도 기묘하게 당당하고, 도리어 상대를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있다.
그게 더 다듬어진다면 군주의 품위가 되리라.
하지만 헬무트가 그런 태도를 자연스럽게 내보이는 자는, 장차 이 데우스 제국을 다스릴 황태자다.
불손하고 오만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황태자의 마음엔 꼭 들었다.
미하엘 역시도 말투와 생김새, 행동, 그 모든 면에서 유순한 듯 온화한 듯하면서도 기묘하게 오만한 특유의 기질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게 황태자가 생각한 리노사의 대공에 부합하지는 않았다.
리노사 대공은 미하엘과 딴판인 자. 리노사 대공녀 샤를로트를 본 적은 없지만, 황태자는 그녀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리노사의 후계자는 대공이 정하는 것이지만, 제국에서 어느 한쪽을 슬쩍 밀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엄연히 그들도 제국의 황실에서 비롯한 혈통인 것을.
하지만 오늘, 헬무트를 마주한 황태자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닮았군.”
몇 번 본 적 없는 리노사 대공. 그러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질 만큼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리노사 대공을 그려낸 듯이 빼다 박은 외견과 유사한 기질. 황태자가 무의식 속에 그려왔던 리노사 대공의 후계자에 헬무트는 거의 부합했다. 그것이 충격적으로 와 닿을 만큼.
‘다만 리노사 대공과는 달리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좀 위험해 보이는 타입이야.’
아스카가 모난 돌이라면, 헬무트는 검에 가까워 보였다.
무질서하고, 무법하며 의도에 따라 누구든 벨 수 있다. 돌보다 검이 위험한 무기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지켜봐야 알 터였다.
거기 있는 모두가 황태자가 ‘닮았다’고 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들었다.
황태자가 헬무트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게 그로서 명확해졌다.
헬무트에게서 시선을 뗀 황태자가 넌지시 물었다.
“내가 왜 이런 차림으로 이곳에 있는지 알겠나.”
“정원에서 참새라도 잡으시는가 했지요.”
황태자의 조악한 검술 실력을 알고 있는 아스카가 비꼬듯이 답했다. 검도 못 다루는데 활이라곤 잘 다루겠는가.
억지로 불려 내진 탓에 아스카는 그에게 사감이 충만했다.
황태자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너는 내가 파르네세 대공비와 꽤 친하다는 것을 알아두는 게 좋겠어. 네가 수업을 제대로 받았는지 판가름하는 것은 나라는 사실도.”
찔끔한 아스카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황태자가 한마디만 하면 시달리게 되는 건 이쪽이었다.
“그리고 착각하고 있는데, 나는 사냥을 꽤 잘한다네. 이래 봬도 누구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활 솜씨를 가지고 있지.”
아스카의 얼굴에 불신이 서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황태자는 자신의 검술 실력이 별로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자기파악은 잘 되고 있다는 소리다.
“알다시피 지난 사태 때문에 나가서 사냥을 할 수는 없으니, 몸도 풀 겸 비슷한 걸 마련해두었지.”
황태자가 저편을 향해 손짓했다.
“저기 과녁을 마련해두었어. 한 번 활을 쏘아보지 않겠나? 일종의 작은 대회인 셈이지. 우승하면 상도 있을 거라네.”
“셋 밖에 안 되는데 너무 경쟁률이 낮은 거 아닌가요?”
대회라니까 흥미가 솟은 아스카가 물었다. 꼭 자신이 우승을 따놓은 것처럼. 황태자가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셋? 분명히 말해 두지만, 오늘 초대한 손님들은, 자네들만은 아니야.”
아스카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또 누가 있는데요?”
“글쎄, 아는 얼굴일지도. 네 기억력이 쓸만하다면 말이지.”
그리고 아스카와 헬무트는 곧, 황태자가 초대한 다른 손님들이 누군지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