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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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과녁이 있는 장소에 당도한 터였다.
“어라?”
아스카의 눈꼬리가 치켜들렸다.
사람에 대한 기억력이 썩 우수하지 않은 편인 그이지만, 그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서 다르다.
더군다나 원한 비슷한 것이 있는 상대라면.
황태자가 턱짓으로 가리키며 넌지시 물었다.
“기억하나?”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온 두 명의 귀족 자제가 눈앞에 서 있었다. 하나같이 말끔하고 준수한 외모에 종이 냄새를 풍길 것 같은 학자 타입이다.
둘 다 헬무트와 아스카 또래였다. 틀림없이 명문 귀족가의 자제들이리라.
‘아버지의 수작인가. 이 녀석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아스카는 그들의 안면을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뱉었다.
“알죠. 내 옛 소꿉친구들 아니신가? 물론, 친했던 건 정말 잠시였지만.”
안 좋은 추억과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아스카의 눈빛도 차가워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스카님. 모런 후작가의 레비입니다.”
“로고스 백작가의 앤서니입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학부를 졸업하시고, 제국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아스카의 차가운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교양 있는 미소를 띤 그들은 어디까지나 점잖기만 했다. 평생을 그렇게 가다듬어진 몸가짐으로 살 것을 요구받아 언성 한 번 높여본 적 없을 것 같은 차분함이 밴 얼굴.
그러나 그들의 미소에서는 왠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들을 만나고도 제법 담담한 아스카와는 달리, 그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아스카와의 친분은 지극히 드문 ‘실패’였기 때문이다.
평생을 사교적인 교분 속에서 살아가는 귀족들이다. 황족, 그것도 자그마치 현 황제의 동생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파르네세 대공의 유일한 적자에게 밉보였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큰 충격이다.
제국에서 황족과의 친분이 가지는 의미는 그토록 크기에.
현실적으로 황태자나 황자와는 나이가 맞지 않고, 그들 주위에는 이미 친분이 있는 귀족 자제들이 있다.
아스카와의 친분은 그들에게도 기회였다. 권력의 최중심부에 접근할 기회.
그때의 일은, 그들도 어렸고 또 아스카가 특수한 상황에서 자라났다는 걸 몰랐기에 벌어졌던 실책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기회가 돌아왔다.
과연 황태자가 그들을 호출한 것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려는 마음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그때의 실수를 만회해야만 했다.
“우수한 성적? 제대로 말해야지. 난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학부 수석이었어.”
아스카가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내뱉었다. 그건 단순히 우수한 성적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나도 수석이었지.”
헬무트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 한 마디만으로 아스카는 살짝 찌그러졌고,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이분은…….”
“내 아카데미 시절 친구. 자세한 건 묻지 말도록 해.”
평민이라고 소개해 주고 반응을 볼까 했으나, 아스카는 충동을 삼켰다.
리노사 대공의 적자인 헬무트는 평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굳이 평민이라고 소개하지 않는다면, 헬무트는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귀티같은 단어로 표현하기에 약한, 상대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그에게선 느껴졌으므로.
“오늘 여기서 만난 이와 여기서 나눈 대화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입을 다물도록. 만약 새어 나간다면 엄히 벌하겠다.”
황태자가 지시를 내림으로써 헬무트가 평범한 녀석이 아니라는 인상이 굳어졌다.
아마 타국의 왕족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이지 않을까. 검은 머리면 리노사?
하지만 리노사 대공의 유일한 아들은 금발인데. 사생아일 수도?
그러나 그런 소문은 소문이 빠른 제국 사교계에도 돌지 않았다.
두 사람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나머지 한 명은 어딨지?”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면 아스카가 불쑥 물었다. 그가 어울리던 귀족 자제는 세 명. 그리고 그때 일을 벌인 것은…….
더듬을 것도 없이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스카에게 충격에 가까운 분노와 혐오감을 느끼게 한 그 소년은 이 둘이 아니었다.
“아, 그웬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는…….”
잠자코 있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길을 잘못 안내해 준 시녀를 폭행하여, 황궁으로의 3년간 출입을 금지당했다. 그게 반년 전인가?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명령이라 아쉽게도 이 자리엔 데려올 수 없었지.”
아스카가 그의 멱살을 잡는 꼴을 봐도 꽤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규격 외의 생물이란 제도화된 삶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좋은 흥밋거리다.
“……제 버릇 못 고치는군요. 사람은 싹부터 알아본다던가요.”
툭 내뱉은 아스카가 두 명의 안면을 훑었다. 레비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다만 앤서니는 깍듯하게 대꾸했다.
“싹의 모양새를 파악하기에는 이른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자라면서 충분히 변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변화할 환경에 놓였을 때지.”
평생을 귀족으로 자랐고, 귀족사회에서 살아온 너희들이 뭘 알겠냐는 듯이 턱을 치켜든 아스카가 내리깐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과 만났을 때 열 살의 아스카는 그들보다 훨씬 작은 소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스카는 그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볼 만큼 훌쩍 컸다.
그리고 아스카에게는 황족이란 신분뿐만이 아니라, 그가 갈고 닦은 검술이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자신감과 확신을 안겨다 주는 실력. 오롯이 그의 땀과 재능으로 일궈 낸 성취.
앤서니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것은 아스카 님뿐만이 아닙니다. 저희도 아카데미에 다녔고,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며 배웠지요.”
‘이 새끼들은 평민 하나 찍어놓고 괴롭혔을 상인데?’
당한 바가 있었던 아스카의 눈빛에 의심이 깃들었다. 하지만 옛 기억과는 달리 두 녀석 모두 누군가를 괴롭히기엔 순둥해 보였다.
아카데미 시절에 죽어라고 공부만 한 것처럼 책상물림 냄새를 풀풀 풍긴다.
레비가 말을 받았다.
“자라면서 그웬이 귀족이라고 하여 그의 가혹한 처사를 편들었던 그때의 우리가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스카님이 저희를 내치신 이유도 이해하고 있고요.”
“현재의 우리는 약자를 핍박하는 일이 부당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그웬을 만류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스카가 콧방귀를 끼었다.
“내 앞이라 생각을 바꿔 먹은 척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거짓으로 말하면 표가 나게 되어 있지요. 생각은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저희의 생각이 바뀌었는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앤서니가 당돌하게 대꾸했다. 사실 그들도 억울하다고 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가장 목소리 큰 한 명에게 휘둘리기 쉽고, 그웬은 그들 중 가장 대가 세고 영향력 있는 소년이었다.
그 때문에 모두가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웬의 행동을 편드는 것밖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거기에 생각 없이 잠자리를 찢어 죽이는 어린애 특유의 무신경함이 그때의 그 일을 만들어냈다.
자라면서 그웬의 성격이 더욱 그악스러워졌기에 그들 사이도 데면데면해진 터였다.
“그렇단 말이지.”
아스카는 모호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사실 오래된, 철없던 시절이라 치부할 수 있었던 때의 일에 불과하다.
또한 아스카가 피해를 본 것도 아니다. 그저 진저리치며 도망갈 기회를 만들어줄 명분이 되어주었을 뿐이지.
아니, 방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스카는 그때 명백히 황족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뭐, 그래 좋아. 기회를 한 번 주지.”
아스카는 거만하게 대꾸했다. 앤서니와 레비는 불쾌한 티 없이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를 떠올렸다. 그 속은 모를 일이다.
아스카도 순순히 지난 일은 묻어두기로 했다. 그는 이 삶에 적응하기로 아버지와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켜야만 했으므로.
“그럼 이제, 내가 준비한 놀이를 즐길 준비가 된 건가?”
일순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풀리자 상황을 지켜보던 황태자가 넌지시 물었다.
아스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경쟁자 수준이 좀 의심이 되는군요. 황태자 전하야 큰소리 땅땅 치셨다지만, 책상 물림하던 두 명 정도 추가되었다고 무슨 경쟁이 됩니까?”
“그렇게 말할 것 같아서, 몇 명을 더 준비해뒀지.”
황태자가 손짓하자 저편에서 황실 기사 네 명이 걸어 나왔다. 기사 호위를 서는 줄 알았던 기사들이었다. 낯이 익었다.
아스카가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망할 납치범들!”
자신을 제국으로 끌고 온 자들 아닌가. 당시 파르네세 대공은 자신의 아들을 확실하고도 안전하게 사로잡기 위해서 황실 기사단에서도 엘리트를 보낸 터였다.
황족 생활에 적응하는 건 적응하는 거고, 그 선택을 하게 된 자체는 강제였다.
아스카는 그 재수 없는 황실 마법사도 이들 기사들도 잊지 않았다.
1:1로 싸웠다면 절대로 지지 않았을 놈들인데 떼거지로 몰려와서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
황태자가 물었다.
“의욕이 좀 불타는지?”
“아주.”
아스카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저도 있습니다.”
한 명이 뒤늦게 나타나 머쓱하게 손을 들었다.
황실 기사 중에서도 몇 안 되는 평민 출신이라던 랄프였다. 기사단 생활도 얼마간 같이했었다.
아스카가 느끼기로는 제 서열 아래다. 별로 위협이 되진 않는다.
“그래, 열심히 해라, 너도!”
황태자가 지나가듯 말했다.
“랄프는 작년도 황궁 배 궁술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지.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래 봤자 활쏘기인데 뭐.”
아스카가 콧방귀를 끼었다. 비스를 실은 화살은 바람의 저항도 무시한다. 즉, 그는 비스를 담은 화살을 정조준하고 쏘아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어려울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어 황태자가 내뱉은 말에 그의 표정이 즉시 일그러졌다.
“아참, 비스의 사용은 금지할 거야. 정원에서 벌이는 일이다 보니, 혹시나 정원수가 상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또 그래야만 모두에게 공정한 대회가 되지 않겠나?”
마지막에 와서야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하는 황태자의 미소 띤 얼굴에선 반짝반짝 윤이 났다. 도자기처럼 박살 내고 싶은 윤이다.
“자신감 넘치는 누군가가 꼴찌는 면해야 할 텐데.”
쯧, 하고 혀를 찬 황태자가 활을 손에 들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반듯하게 활을 받쳐 들고,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고수의 냄새가 느껴지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동작이었다.
그가 가장 첫 순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