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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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국에 이는 바람.
“어서 오십시오, 대공녀 저하.”
마차에서 내리며 샤를로트는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며 장갑 낀 손을 뻗어 기사가 내민 손을 잡았다.
부축 따위 필요 없는 검사건만, 허례허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건 그녀가 리노사 대공녀이기 때문이다.
마차에 내려서자마자 그녀는 손을 거두었다. 발에 신은 것은 불편한 구두. 그러나 이쯤은 장애라고 볼 수 없다.
그녀는 다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우아하다기보다는 힘이 실린 걸음걸이.
그러나 거기에 서 있는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아름다운 한 명의 귀공녀였다.
물집이 잡힌 손은 장갑 아래 가려지고, 늘 허리춤을 장식했던 검은 온데간데없다.
몸에 감기는 것은 보드랍고 치렁치렁한 드레스.
검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샤를로트는 그대로 지워진다. 검을 쥐지 않는 자신이 낯설었으나, 샤를로트는 그 또한 자신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학부의 샤를로트이기 이전에, 그녀는 리노사의 대공녀였으므로.
그 의무가 이런 식으로 닥칠지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그녀는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레타 아카데미에 있는 그녀의 옷 중 드레스는 없었기에, 리노사의 일행과 합류하자마자 복장을 갖추었다.
“오랜만이에요, 저하.”
전속 시녀를 비롯하여 몇몇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샤를로트는 다음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녀 저하를 뵙습니다.”
리노사에서 파견된 인원 중에는 놀랍게도 흑익 기사단장이 와 있었다. 샤를로트의 스승, 알론소. 힘이 실린 눈빛은 여전히 변치 않았다.
그는 묵직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
“어떻게 기사단장이 여기 있습니까.”
리노사 대공이 변을 당할 뻔한 이후로, 경비가 한층 삼엄해진 터였다.
대공이 안전하기 그지없는 라토나의 왕궁에 있을지라도, 흑익 기사단장은 늘 대공의 곁을 지켰다.
그가 대공의 곁을 비우고 이곳을 찾아왔다는 건, 대공의 허락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도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니, 제가 다 찾아뵙게 되는군요.”
“……그것은.”
샤를로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에 대한 도리가 아님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도무지 리노사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라토나는, 그녀에게 견디기 힘든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몇 년이 흘렀어도, 피해자가 다시 회생했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대공녀로서, 검사로서 그녀의 신념은 결벽적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부모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샤를로트다.
알론서는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하듯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사정은 알고 있습니다. 대공녀 저하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니 심려 놓으십시오.”
“저 때문에 굳이 오신 겁니까. 대공 전하께서는.”
샤를로트의 낯빛에 근심이 서렸다. 알론소는 고개를 저었다.
“사감으로 흑익 기사단장이 제국을 방문할 수는 없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원하신 바입니다.”
“대공 전하께서요?”
샤를로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이내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챘다.
리노사의 흑익 기사단은 제국의 황실 기사단을 능가하는 명성을 지녔다.
흑익 기사단장은 뛰어난 검사일 뿐만 아니라 리노사의 가장 큰 전력이며 리노사 대공의 오른팔이다. 그와 함께한 방문에는 그만큼 무게가 실린다.
그것은 대공이 샤를로트를 중히 여기며, 그녀가 리노사의 계승권에 가까운 여식이라는걸 상기시켜주는 의미가 있었다.
또한 이 혼사가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리노사 대공은 아직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다.
미하엘이 저지른 짓이 있으니, 일단은 제국의 요청에 응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그저 리노사에서 보내는 조금 특별한 사절일 뿐임을 공언해둔 터였다.
미하엘의 실수를 샤를로트가 덮어쓸 이유는 없다. 다만 사절로서 샤를로트가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면, 그것은 그녀의 공으로 돌아올 것이다.
“대공 전하께서는 이 일로 인해, 샤를로트 저하께서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어떤 불이익도 겪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저하를 돕고자 저를 보내신 겁니다.”
“그랬군요.”
샤를로트는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평생 대공녀로 살아왔던 사고대로 대공의 본의를 간파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리노사 대공이 미하엘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 리노사 대공의 입장에서 리노사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제국의 황족과 혼인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
만약 샤를로트가 리노사 대공이 된다면 내정간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샤를로트가 완전히 후계 구도에서 벗어나더라도 문제다. 어쨌든 그녀가 황족과 맺어지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미하엘이 안다면 또 다시 나를 경계할 테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와는 이미, 완전히 돌아섰으니까.
상념에서 벗어난 샤를로트는 정면을 응시했다.
황제가 친히 보낸 시녀장이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황궁에 처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먼 길을 오셨으니 휴식을 취하시지요.”
그래도 황궁에 꽤 얼굴을 비추었던 미하엘과는 달리, 샤를로트는 어린 시절 한 번 황궁을 방문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문득 저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도착을 지켜볼 만한 이라면, 평범한 신분이 아닐 터. 어차피 정식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샤를로트의 예상대로였다.
“대단한 미인이로군. 품위가 있고, 대공녀다워. 미하엘과는 달리 제 아버지를 많이 닮았군. 게다가 뛰어난 검사라고 하던가?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학부 수석이란 말이지. 아스카와 마찬가지로.”
창문 너머로 리노사 대공녀를 지켜보던 황태자가 턱을 짚은 채 중얼거렸다.
먼 거리였으나 선명하게 눈에 띄는 여자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헬무트와도 꼭 닮은 생김새. 셋을 한 자리에 놓고 본다면 대공과 헬무트, 샤를로트의 혈연관계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으리라.
황태자의 눈빛이 흥미로 짙게 물들었다.
“아스카 녀석이 꽤 안목이 높군.”
아름다운 여자였다. 서늘하면서도 섬세한 이목구비가 눈결처럼 하얀 피부 위에서 도드라졌다.
곱게 틀어올린 검은 머리카락은 우아한 목덜미를 강조했다.
바르고 곧은 자세, 상대를 또렷하게 응시하는 그 눈빛.
예사롭지 않다. 맑으면서도, 연약하지 않은 기품.
검사라지만, 그레타 아카데미 수련장은 땡볕이 내리쬐는 장소가 아니다.
그간의 수련으로 인해 거칠어진 머릿결과 피부는 오면서 공들여 관리한 것으로 쉽사리 말끔해졌다.
샤를로트는 특유의 분위기를 제외하면,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귀공녀처럼 보였다.
“그에겐 아깝지 않나?”
황태자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이 본심과 맞닿아 있다는 데 놀랐다.
그는 샤를로트가 마음에 들었다. 첫눈에 반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호감을 느낄 만큼.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황태자니까. 아스카 따위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한 가지 사실 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리노사의 대공녀가 아스카를 마음에 담았을 리는 없을 테지.’
아스카의 입담은 지독히도 거칠다. 그레타 아카데미에서도 평민인척하며 귀족들과 그렇게도 싸워댔다고 들었다.
생김새는 그럭저럭 황족다운 태가 난다고 할만하나, 그 성질머리와 행동은 외형을 깎아 먹고도 남았다.
리노사 대공녀는 척 보기에도, 눈이 높아 보인다.
아스카가 옆에서 아무리 알짱대고 구애를 했더라도 그를 남자로 봤을 리 만무하다.
황태자는 옆에 서 있는 상대를 의식하여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에 리노사 대공녀는,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는 여자로 보이는군요.”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모두가 쉬쉬하는 것이지만 명백히 황태자는 속이 좁았다.
그는 지난 시합에서 아스카가 한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너그러운 척 파르네세 대공비에게 잘 말해주겠다고 하고 넘어갔으나, 그걸로는 족하지 않았다.
황태자로서 신하를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그게 건방지고 그래서 재미있지만 얄미운 사촌 동생의 버릇을 고쳐놓는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뭐, 그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니까.’
입꼬리를 치켜올린 황태자는 화려한 안면 가득 미소를 올린 채 상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숙부.”
“황태자 전하.”
파르네세 대공은 드물게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그도 리노사 대공녀를 보고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샤를로트의 인상착의 정도는 초상화로 봐서 알고 있었지만, 미화된 걸로 생각했지 그녀가 이토록 아름다운 귀공녀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검술학부 수석이라길래 좀 더 근육이 붙고, 체격이 있는 튼튼한 여성을 연상한 터였다.
아스카의 취향에도 그쪽이 더 어울린다고 보았던 터라,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아들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귀공녀가 등장하자 당황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황태자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다니. 이건 정말로 큰 변수였다.
황태자가 가벼운 듯 잔잔한 말투로 물었다.
“파르네세 대공은 내가 아스카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면 아스카 편에 설 테지요?”
어린 시절부터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내내 그레타 아카데미에 다녔던 자신의 아들보다 황태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파르네세 대공이다.
황태자와 그의 사이는 돈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아들보다 그가 우선할 수는 없다.
리노사 대공녀는 아스카를 제국에 붙들어둘 좋은 수단이었다.
파르네세 대공은 동요를 감추고 무심히 응답했다.
“선택은 그녀가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내가 리노사 대공녀에게 접근해도 숙부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스카의 접근을 막지 않으신다면, 전하께서 그리 하신다는 데 제게 어떤 이의가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믿지요.”
황태자는 그 말을 남기며 돌아섰다. 파르네세 대공의 입가에 한숨이 고였다.
황태자가 마음먹고 나선다면, 아스카에게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
어쨌든 ‘격조’라는 능력치 면에서 황태자와 아스카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차이가 났으니까.
황태자건 아스카건 별로 선택할 의향이 없어 보이는 샤를로트의 의사와는 별개로 황궁에 발을 들이자마자 그녀의 운명은 그렇게 돌풍 속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