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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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한미한 집안의 귀족 영애라고 한들 황제가 이렇듯 친근한 투로 대화하진 않는다.
엄정하기로 소문난 황제였다.
하지만 황가와 리노사 대공가의 혈연관계를 생각해 볼 때, 샤를로트에게 따지고 보면 황제는 집안 어른이며 어린 시절에 이미 본 사이다.
황제가 샤를로트에게 호의를 보이는 건 그녀 입장에서 나쁠 게 없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눈짓해 보였다.
“흑익 기사단장과 함께 왔다고 들었다.”
흑익 기사단장은 이 자리에 함께하지 않고, 그저 리노사 대공녀를 호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함께 온 의미는 그녀의 말은 리노사 대공의 말과 같다는 상징적인 의미다.
황태자 암살미수 사건 이후로, 리노사에서는 이렇다 할 대처를 보이지 않았다.
미하엘이 신전 쪽에 정말 가담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요구하여 말 한마디만 전한 것 같은데 괜히 나서서 사과니 뭐니 하면 지레 찔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샤를로트가 제국에 온 건, 그래서 그만큼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리노사와 제국의 경직된 관계를 풀만 한 해법을 리노사 대공이 제시하는 것이리라.
“그렇습니다. 저는 리노사 대공의 뜻을 황제 폐하께 전달하라는 명을 받고 제국을 방문했습니다.”
“말해보아라.”
황제는 기억을 더듬어 리노사 대공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기억 속의 그는 다소 젊은 모습이었다.
양국의 군주가 만날 일은 많지 않다.
그도 황위에 오르고 나서는 단 한 번 리노사 대공을 보았을 뿐이다.
허투루 움직이지 않을 만한, 진중하면서도 철두철미한 자였다.
‘어떤 해법인지 기대되는군.’
이윽고 샤를로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양국의 우호가 건재함을 밝히고, 나아가 새 시대의 더한 화합을 위하여 양국이 함께 주최하는 검술대회를 열었으면 한다.”
샤를로트가 분명하게 덧붙였다.
“이것이 리노사 대공의 뜻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손을 짧은 턱수염으로 가져갔다. 샤를로트는 유심히 그의 반응을 살폈다.
“흥미로운 제안이로군.”
이윽고 떨어진 묵직한 목소리엔 긍정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양국이 함께하는 검술대회라.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샤를로트는 리노사 대공이 계획한 바에 대해서 읊었다.
검술대회의 개최는 두 달 이내에, 위치는 제도와 라토나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도시에서 협의로 정해질 것이다.
잠자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군. 리노사 대공비는 신전에 우호적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리노사 대공과 대공비의 사이는 퍽 돈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시 이것 역시 신전이 꾸민 음모의 일환이라면…….
황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제국에서 신전의 세력을 내모는 데 힘쓰고 있는 그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머니가 언급되자 샤를로트의 표정도 살짝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꿋꿋이 답했다.
“개인의 신앙심이, 리노사의 뜻을 결정할 수 없고 리노사 대공께서는 신전이 황테자 전하를 시해하려고 한 것에 우려와 분노를 표하고 계십니다.”
신전이 제국의 황태자를 해치려고 했다면, 리노사 대공도 해치려고 못할 건 뭔가.
지금 리노사에서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샤를로트가 아니라 늘 공정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신전의 요구를 가로막는 리노사 대공인 것을.
신전에 우호적인 미하엘을 대공위에 올리기 위하여 같은 짓을 못 벌일 것도 없었다.
그런 관점에서 샤를로트도 흑익 기사단장이 대공의 곁을 비운 것이 내심 불안한 터였다.
그 때문에 리노사 대공은 또 하나의 조치를 취해놓았다.
“………또한 리노사 대공가 내에서도 신전과의 모든 접촉을 차단한 터이니, 심려 놓으셔도 좋습니다.”
어찌 보면 신전이 명분을 준 것이다.
리노사 대공비의 신앙생활은 중단되었고, 그건 라토나의 왕성에서 생활하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차분히 이야기를 듣던 황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받아들이지.”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이로써 양국의 우호가 다시금 돈독해지기를 바랍니다.”
“샤를로트, 너 역시도 참석하는 것이냐?”
샤를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그럴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녀를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대회 참가자는 시야가 한정된다.
샤를로트는 위에서 이 대회를 지켜봐야 했다.
이걸로 당장은 그녀의 역할이 끝났다.
샤를로트는 바다 밖에서 격랑이 이는 모습을 바라볼 것이다.
이것으로 가장 중요한 대화는 끝났다. 한시름 놓였다.
안도의 숨을 흘리는 샤를로트에게 황제가 불쑥 물었다.
“그보다 혼담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가? 황태자에겐 그리 밝혔다고 들었네.”
그 말에 샤를로트의 몸이 움찔거렸다. 황제는 재차 말을 이었다.
“황족 남자들이 그리 마음에 차지 않던가. 겉보기로도 번듯하고 제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녀석들인 것을.”
황제는 아스카를 본 적은 없지만, 그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아스카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서, 파르네세 대공은 아직 황제에게 그를 선보이지 않았다.
아스카도 자그마치 황제씩이나 되시는 큰아버지를 마주하는 불편한 자리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대면이 성사되지 않은 것이다.
“그분들이…… 감히 제가 모자람을 느낄 만한 분들은 아니나 지금으로써는 부친의 곁을 보필하고 싶을 뿐입니다.”
샤를로트의 대답에 황제는 유심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황태자에게 희망적인 조짐은 달리 엿보이지 않았다.
“……그렇군, 알겠다. 황궁에서 편히 머물다 가기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현은 끝났다.
*
“이야기는 잘 되셨습니까.”
흑익 기사단장이 샤를로트에게 말을 건넸다.
긴장한 안색의 샤를로트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예, 무탈히 폐하께 대공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다행이로군요.”
“그보다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황궁을 나섰으면 합니다. 제도의 상점을 돌아볼까 해서요. 조용히 움직이고 싶으니, 다른 호위는 물리고 기사단장만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황실의 마차로요.”
“예, 준비하지요.”
리노사 대공녀가 외출을 한다고 해도, 황궁에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디 갈지 정도의 행적은 알려두어야 했다.
샤를로트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황궁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지.’
아카데미에조차 퍼져있는 미하엘의 감시인들. 다행히 제도에서만큼은 사람을 운용하기 힘든 데다가 미행을 붙이기도 어렵다.
감각이 예민한 흑익 기사단장이 함께하는 한. 암행을 하겠답시고 변장을 하고 나서는 게 더 수상할지 모르니, 샤를로트는 자연스러운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황제를 알현하고 바로 행동에 나설 거라고는 미하엘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출발한 마차는 예정대로 상점 몇 군데를 들렀고, 리노사 대공녀는 그곳에서 몇몇 물건들을 구입했다.
그러고 나서 마차에 오른 그녀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파르네세 대공저택으로 가지요.”
기별 없는 방문이었으나, 리노사 대공녀의 방문을 거절하지는 못하리라.
예상대로 황실의 마차가 당당히 존재감을 알리며 파르네세 대공저택의 대문을 통과했다.
얼마 후, 그녀는 낯익은 얼굴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교양 수업을 받고 있던 아스카가 기쁜 듯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샤를로트! 우리 집엔 어쩐 일이야!”
샤를로트는 차분한 얼굴로 그의 기쁨을 묵살했다.
“헬무트 선배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레아와는 연락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직접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였다.
모두가 귀공녀의 모습으로 파르네세 대공저택을 찾은 샤를로트를 낯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스카한테 듣긴 했지만, 그 모습은 정말…… 충격적인데.”
정말 충격에 사로잡힌 시안은 잠깐 그녀를 못 알아볼 뻔했다.
늘 아카데미 검술학부 복장으로. 또는 바지 차림으로 검을 들고 편안하게 돌아다니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드레스를 입고 화장까지 한 채로 구두를 신고 다각 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왜, 예쁘기만 하구만.”
제 여자친구를 선보이는 것처럼 아스카가 히죽대면서 말했다.
모처럼 파르네세 대공비가 외출한 덕에 자유롭게 누리고 있던 연구시간을 방해받아 약간 신경질이 난 아레아가 턱을 짚고 물었다.
“헬무트와 둘이서 할 얘기야, 아니면?”
“여러분 모두가 들어두셔도 무방할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이제는 더 숨길 것도 없으니까요.”
“말해 봐.”
비로소 헬무트의 입이 열렸다. 새카만 두 개의 눈동자가 일직선으로 맞닿았다.
같은 심연이었으나, 또한 달랐다. 하나는 조금 더 따뜻하며 정직한 빛을 띠고 있었고, 하나는 견고하며 무쇠와 같은 의지가 담겼다.
헬무트의 눈빛엔 젊음이 가져다주는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 폐허가 되었던 자리에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는 완벽하게 차려입은 샤를로트와 대조되게 셔츠와 바지만을 입은 간소한 차림이었다.
조금 전까지 검을 휘두르다 온 모양이다.
샤를로트는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딘지 쓰라리면서도 아릿했다.
원래라면, 리노사 대공을 대신하여 황제를 만나는 그 자리에 헬무트가 있었을 터인데.
‘하지만 되돌릴 수 있어.’
그녀는 주먹을 굳게 말아쥐었다. 더디지만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끝이 반드시 빛이 쏟아지는 아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을 위해 지난 4년을 달려온 것이니까.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온 참입니다.”
샤를로트는 앞으로 열릴 검술대회에 대해서 찬찬히 이야기했다.
제국과 리노사 공동개최의 검술대회. 그것이 리노사 대공의 뜻이라는 것까지도.
마지막 말을 강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스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그러면 헬무트 아버지는 헬무트 편이라는 거야? 검술대회에서 보란 듯이 우승해서 당당히 네 존재를 알리라는, 그런 뜻인가?”
어떨 땐 둘도 없는 멍청이 같더라도 어떤 때는 예리한 아스카다. 시안이 안면을 찌푸렸다.
“너 설마, 대공 전하한테 네 이야기 했어? 헬무트가 파헤의 숲에서 탈출한 건 그가 어떻게 알고.”
“저는, 헬무트 선배에 대해서 대공 전하께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돌아오고 나서 따로 뵌 적도 없고요.”
아레아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헬무트가 돌아와서 만난 사람들이 있으니 그 과정에 알게 된 게 아닐까?”
“미하엘인가 뭔가 하는 그 재수 없는 자식이 꾸민 음모일 수도 있잖아!”
부정적인 건 역시 시안이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자신들의 혈육을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리노사 대공가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적개심을 불렀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추측일 뿐이었다. 샤를로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