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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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상대의 검을 맞받아치며 아스카의 눈빛이 흔들렸다.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통증이 아릿했다.
‘망할.’
혼잣말은 채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상대의 선공.
날아든 것은 압도적인 기세의 검이었다. 묵직하고 정석적이나 꼼수로는 빗길 수 없는 경지 높은 검사의 검.
아스카는 본능에 가깝게 상대의 검을 받아쳤다.
캉! 카강! 머리끝까지 곤두섰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바로 패배로 이어지리라.
“흠.”
한동안 공격을 퍼붓다 잠시 멈춘 금안의 남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모욕감이 느껴질 만큼 여유로운 작태다.
“제법 잘 받아치는군. 잘 훈련된 황실 기사단의 검술이다.”
“황실 기사단에서 검을 배웠으니까.”
아스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간신히 숨을 돌린 터, 등 뒤로 축축하게 식은땀이 배어났다.
지금 주어진 잠시의 시간이 너무도 달았다. 적의를 불태울 만한 여유도 남아나지 않는다.
‘전력을 내는 게 아니군.’
분하지만 아스카는 냉정하게 판별했다. 남자는 자신을 상대로 여유를 부릴 만큼 강했다.
시안이 그 꼴이 된 건 역시 우연일 리 없다. 아스카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거만한 새끼, 나를 만만히 봐. 이래 봬도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학부 수석인데.’
연배가 자신과 별 차이나 보이지 않는다. 끽해야 서너 살 더 많을 뿐일 거다.
거만함을 그대로 드러낼 만큼 미성숙한 기질의 젊은 청년.
그리고 헬무트와는 종류가 다른 강함. 헬무트와 검을 나눌 때는, 검사라기보다는 마물 비슷한 거대한 존재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날것 그대로의 야성조차도 완벽하게 통제되는 인간 형태의 무언가.
그러나 이자는 달랐다. 인간이다. 분명, 인간인데 그가 검을 가볍게 내뻗어올 때마다 짓눌리는 듯하다. 몸을 두 쪽으로 가를 만큼 위력적이다.
대단한 검술을 가진 강자. 잘 훈련되고 다듬어져 완성된 표본이다.
남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가뿐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실력의 격차를 보여줬다.
남자의 눈빛이 한층 더 또렷해졌다.
“언행은 길거리의 부랑배처럼 천박하기 그지없으나, 검만은 그렇지 않군. 아스카라고 했던가.”
“지금 누구더러 천박……!”
아스카가 발끈하든 말든 남자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소문을 들었지. 파르네세 대공의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아카데미 출신이라던가. 그래 그 황족의 이름이…….”
남자의 발음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아스카였지.”
확신을 담은 두 눈이 아스카를 향해 찔러 들었다. 번뜩이는 금안. 맹수의 눈앞에 놓인 듯했다.
위축되는 마음을 숨기며 아스카는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래, 이 자식아 황족이시다. 어디서 찍찍 반말이야? 공손히 경어를 쓰며 황족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
“내가 상대하는 건 ‘시안’이라는 검사이지 파르네세 대공의 후계자가 아니다.”
딱 잘라 부인한 남자가 제 검으로 눈길을 옮겼다.
그 역시 신의 뜻을 받드는 자. 성검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는, 대신관과 같은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런데도 같은 루멘의 신도들과 함께할 때면 남자는 세상 누구보다도 겸손해졌다.
“또한 황족이라 하여 함부로 대거리할 만큼 나의 신분 또한 만만하지 않으나…….”
엄중한 경고가 비치는 눈으로 남자가 단언했다.
“지금은 그것을 말할 때가 아니로군. 대회에 참가하는 나는 일개 검사. 그쪽도 그렇지 않은가?”
신분 운운해댄 아스카가 무색해지는 말이었다.
‘재수 없는 자식.’
안다. 저자의 말에 힘을 불어넣은 것은 실력이라는걸. 검사의 전투에서는 변수가 많다.
하지만 그 변수가 지금, 효과를 발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몇 번 검을 맞부딪혀본 것만으로 감각이 생생해졌다. 익숙지 않은 패배의 감각.
“경기를 속개하시기 바랍니다!”
주최진 한 명이 소리높여 외쳤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서로를 경계하느라 전투가 중지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시간이 더 필요한가?”
봐줬다는 듯한 말투.
“아니.”
아스카는 이를 악물며 검을 치켜세웠다. 단 한 번. 한 번은 기회가 있으리라.
샤를로트가 말했다. 최선을 다해 싸우고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스카는 이기고 싶었다. 그가 아는 이기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이것뿐이다.
‘전력을 다한다.’
다음 순간, 아스카의 몸이 폭발할 듯이 튕겨 나갔다. 몸속에서 비스가 소용돌이쳤다.
전신의 근육이 한계까지 힘을 발했다. 활시위를 끝까지 당겨서, 끊어지기 직전에 놓아 보낸 듯한 일격.
아스카는 단숨에 남자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쏴아아! 바람의 벽을 돌파하듯 엄청난 저항감, 그러나 그 저항감을 꿰뚫는 날카로운 화살.
남자의 검이 움직였다. 일순 그 검에서, 빛이 일렁이는 듯했다. 형상화된 비스가 화려한 이들은 많다.
검사의 정신이자 정수인 비스는 육체로서 빚어내는 아름다운 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찰나처럼 드러난 것은, 천상의 빛 같은 성스러운 금색의 광채.
아스카가 그 빛을 본 순간, 남자의 검은 정지한 시공 속을 지나 아스카의 검 앞에 검신을 드러냈다.
콰아아앙! 검과 검의 격돌이라기엔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폭풍이 퍼져나가듯 엄청난 여파가 해일처럼 무대 밖을 후려쳤다.
“으악! 조심해!”
관중들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몸을 숙였다. 결계가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있었지만, 강한 바람에 일순 눈을 뜨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가라앉을 무렵, 무대 위엔 한 명만이 서 있었다. 태풍의 눈에 있었던 양 고요한 모습.
그의 모습을 확인한 주최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서번트, 승리!”
“의료진을 불러오시오.”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상대를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아스카의 검은 격돌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나 파편으로 튄 터였다.
그의 검은 헬무트의 것만큼이나 엄청난 명검은 아니지만, 꽤 좋은 검이었다.
힘이 힘으로서, 비스가 비스로서 압도당했다. 그 격돌에 검이 부서져 나가고, 아스카는 땅에 처박혔다. 손이 뭉개지고 팔이 꺾이고 온몸이 내부로부터 비틀렸다.
시안처럼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을지라도, 엄청난 통증이 신경을 찢어발겼다. 일순 숨이 막혔다.
“끄으으.”
신음을 내지르는 아스카에게 남자가 서서히 다가섰다.
날아드는 파편을 모조리 막지 못한 탓에, 그의 옷깃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그러나 전투의 여파치고는 사소했다. 그것은 승자의 모습.
“이번에도 나는 옳았군.”
모든 것이 결과로서 말해진다는 말투. 그의 신조차 절대는 아닐진대, 남자의 목소리엔 절대적인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찰나지만 본 실력을 보였다.
‘황족이라.’
남자는 힐끗 아스카를 쳐다보았다. 여태까지 만난 상대 중 가장 까다로웠던 상대. 어렵게 느끼진 않았으니, 까다롭다고 하는 것이 어울리리라.
제국의 황족답게 실력에서는 격조가 있었다. 꽤 강한 검사였다.
“내가 강했던 것뿐이니, 괘념치 마시오.”
남자의 목소리가 정중해졌다. 시안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탈락한 이상 아스카는 이제 다시 황족의 신분으로 회귀한다.
상대는 마법사 따위가 아니라 검사이며 제국의 황족이었다.
비록 신전과 제국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하나 현 황제가 제국을 다스리는 것조차 신의 뜻.
신으로부터 제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은 고귀한 혈통. 그것이 바로 제국의 황족이었다.
신전 역시 지배자였고, 지배자는 또 다른 지배자를 존중한다.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아스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아스카는 홱 고개를 저었다. 졌음에도 이렇게 인정하기 싫은 적은 처음이다.
분기가 배어나는 얼굴로 아스카가 내뱉었다.
“그 정도 실력으로는……. 결승에서 만날 상대의 옷깃도 베지 못할 거다.”
몰아치는 통증엔 금세 내성이 생겼다. 그도 검사. 고통엔 익숙하다. 그보다 아픈 것은, 졌다는 사실.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누가 올라올지 알고 있는 모양이오?”
“그래.”
남자는 거절당한 손을 말끔히 거두었다. 남자의 안면에 싸늘한 기운이 깃들었다.
자신을 이긴 상대에게 이런 말과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모욕이다.
“충고 하나 하겠소.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라면, 신분에 걸맞게. 싸움에 진 개처럼 짖어 대는 일은 삼가기를.”
아스카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충혈된 눈동자가 번뜩였다. 말로는 모욕당한 적이 있어도, 지고 나서 그 상대에게 모욕까지 당한 적은 처음이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그 자리를 떠났다.
“빌어먹을!”
아스카는 바닥을 발로 후려쳤다. 퍽! 적응된 통증이 금세 불길처럼 일어,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핏방울 몇 점이 떨어져서 바닥을 적셨다.
어느새 달려온 의료진들이 정중한 말투로 그를 모셔갔다.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의무실에 들어서서 치료를 받자, 샤를로트가 나타났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서자 썰물이 빠지듯 의료진들이 자리를 비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아스카는 왠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샤를로트가 나직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시안의 복수를 해주고 싶었는데…….”
아스카의 시선이 샤를로트를 비껴갔다.
“난 최선을 다했지만 졌어. 꼴사납지 않든? 난 내가…… 꼴사나운데.”
샤를로트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물었다. 또렷한 목소리였다.
“제가 최선을 다하고 진다면, 그 모습을 꼴사납다고 생각하시겠는지요?”
“……아니.”
“저도 같습니다.”
그제야 아스카는 샤를로트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옅은 미소와 올곧은 눈빛은 상처투성이가 된 아스카의 몸과 마음을 달래는 효과가 있었다.
아스카는 눈을 찡그리며 샤를로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쩐지 정신이 멍해진다.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몸을 회복하려면 한숨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샤를로트는 언제 걱정했냐는 것처럼 말끔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봐야 하는 건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였다.
“네, 지금도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나온 것이기에. 저는 그럼 이만. 편히 쉬십시오.”
샤를로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곤, 방을 나섰다. 마치 아카데미 선후배 사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스카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쪽은 그대로인데 이쪽만 점점 더 쏠리는 것 같잖은가.
한숨을 내쉰 그는 중얼거렸다.
“……복수는 헬무트 녀석이 해주겠지.”
그전에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 남아 있었다. 녀석은 아레아를 꺾고 올라가야 할 터였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모든 경기가 끝났다. 파르네세 대공의 명예에도 흠을 주지 않을 만한 성과였다.
‘더 강해져야겠어.’
아스카는 결심하며 일으킨 상체를 침대에 다시 묻었다.
시안이 너도 졌냐며 호들갑스럽게 찾아와 속을 박박 긁을 때까지, 몸과 마음의 안정을 누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