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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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금안의 성기사 서번트는 누군가를 마주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신전과 접촉을 하는 터라, 대회가 끝나자마자 발길을 서두르던 그는 곧 주최 측 쪽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거절을 거부하는 말투. 이곳은 사실상 적진이나 다름없다.
일순 경각심이 일었으나,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의 부름이었기에, 따라야만 했다.
그가 조금 전 꺾은 자가 황족일 뿐이라면, 그를 부른 자는 황족일 뿐만 아니라 이 대회의 주최자였으니까.
‘내 정체를 알았다 한들 어찌 신전을 상대로 검을 들랴.’
서번트는 확신했다. 황태자의 암살사건이 있고도, 신전에 군대를 들이대지 못한 그들이다.
정면충돌은 제국조차도 기피하는 것. 게다가 적에게 둘러싸였다고 한들 돌파하고 빠져나올 자신이 있었기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저 너머에서 낭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내 아우에게 본때를 보여줬더군.”
아스카를 아우라고 부르는 말투가 제법 친근했다. 화려한 예복에 우아한 금발.
사교계에서 칭송받을 법한 그림 같은 귀공자였다. 서번트는 턱을 괸 채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이쪽을 쳐다보는 그자의 정체가 뭔지 누군지 바로 알았다.
황태자.
불유쾌한 부름이었기에,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서번트는 말을 받았다.
“친아우도 아니지 않습니까.”
황태자는 그의 태도를 흠잡지 않았다. 이미 그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처럼.
“형제가 몇 없다 보니 사촌 아우 정도면 친아우나 다름없지.”
친아우나 다름없는 녀석의 여자를 뺏는다고 선언했던 것치고는 뻔뻔스러운 작태였다.
“파르네세 대공자는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다가 최근에야 제국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사이에 우애가 돈독해지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신전의 정보는 역시 빠르군. 제국에 대해서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다니.”
황태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로 들렸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상황, 이미 예감한 터였다. 파르네세 대공자를 상대할 때, 조금이나마 신성력을 썼다. 예민한 자라면 그 힘의 정체가 뭔지 간파했으리라.
‘나를 이렇게 불러내다니.’
방은 꽤 넓었지만, 멀다고 할 거리는 아니다. 황태자는 최근, 신전 세력의 암습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때문에 서번트는 그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불러낸 것이 경솔하다고 생각했다.
그라면 어떤 조처를 취해놨건, 이 자리에서 황태자의 숨을 거두는데 한 호흡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옳지 않은 일이다.’
암습이라니. 명예롭지 못한 짓이며 성검이 선택한 성기사가 벌일 만한 짓도 아니다.
서번트는 황태자를 암살하려던 기도회의 소행이 결코 루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일이 실패로 끝남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던가.
만약 황태자가 죽어야 할 자라면, 루멘의 뜻대로 그는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황태자의 죽음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알아본 바에 따르면, 현 성기사단장이나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성기사 중에 금안의 소유자가 없어. 신전에서 아무나 보내진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자네는 신전의 대외비 전력인가?”
서번트의 눈에 광채가 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신전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군요.”
“당한 것이 있어서 조사를 좀 했지.”
팽팽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황태자는 곧 분위기를 이완시키듯 목소리를 바꾸었다.
“신전의 성기사가 무투회에 참가한 이유는 뭐지?”
“규정상 안 된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난 규정을 바꿔서라도 자네를 탈락시킬 만한 권한을 가지고 있고. 그 와중에 따를 구설 또한 감내할 용의가 있지.”
똑바로 대답하란 듯이 눈빛이 강렬해졌다. 황태자는 인내심이 좋은 편은 아니다.
말대꾸하는 게 짜증 나는 듯 미간에 금이 갔다.
“무투회란 검사로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에 좋은 기회이지요.”
서번트에게서 평온한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뜻은 없고, 무투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러 왔습니다.”
“대외비 전력인 성기사를 보내놓고, 다른 뜻이 없다는 말을 믿으라 하는 건가. 이 무투회가 무엇 때문에 열리는지 알 텐데도? 신전에서도 왜 이곳에 신관이 한 명도 없는지 기억하고 있을 텐데.”
이 같은 무투회에서는 치료마법이 필요할 일이 있기에, 종종 신관 몇몇을 신전에 요청하여 대비시켜 놓고는 한다.
어지간한 마법사의 치료마법보다, 어중간한 신관의 신성마법이 더 나았다.
신성력은 신체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데 최적화된 힘이니까.
하지만 이번 무투회만큼은 철저히 신전이 배제되었다.
일부러 신전을 배제하고 진행한 대회. 신분을 숨긴 성기사가 출전한다는 것이 주최 측에서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서번트는 정석적으로 대답했다.
“과거의 불미스러운 사태가 어떠했든, 저는 무투회에서 우승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무투회에서 우승하여 자신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주최 측이 원치 않은 결과가 초래되겠지만.
‘내게도 믿는 구석이 있지.’
황태자의 뇌리에 헬무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완벽한 믿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자를 내쳐서, 신전이 다른 방식으로 수를 쓰게 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계획이 뭐든 지켜보는 것이 나았다.
무대 위에서 뭔가를 조작할 수 있을 만큼 자신들도 만만하지는 않으니까.
황태자는 추궁하듯 물었다.
“그렇다면 맹세하게. 루멘의 이름으로, 자네가 무투회에 출전하는 일 외에 신전에서 어떤 식으로든 이번 무투회에 관여치 않겠다고. 그럴 맹세를 할 권한이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부러 비웃듯 뉘앙스를 흘리자, 서번트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금빛 눈동자에서 비치는 빛이 강렬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루멘의 뜻이며, 또한 루멘의 뜻이 신전의 뜻입니다. 제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루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을 믿지.”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녕하시길.”
냉담한 인사만을 남기고 돌아서는 서번트의 뒷모습을 황태자는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역시 신전의 종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저 꼿꼿하고 오연한 태도를 보라. 신전의 대신관들과 유사하지 않은가.
루멘을 등에 업고 항상 자신들이 한 일이 신의 뜻이며 그렇기에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것은 루멘의 뜻이 아니며 일부의 일탈이었다고 부정해버리면 그만인 자들.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신앙심 하나로 속 편하게 무마해버리지.’
그러나 맹세조차 어기지는 못하리라. 루멘은 실수했다.
저들도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불과한 것을.
“이제는 세상이 바뀔 때도 되었지.”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자를 맞이하며 나름의 방비를 해 두었다.
만약 여기서 저 성기사가 자신에게 검을 들이댔다면, 완벽한 명분이 된다. 신전에 선전포고할 명분.
그러나 역시, 저들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함정을 피해갔으니 이제는 정면승부를 해야 했다.
*
그 시각, 철가면을 쓴 이번 무투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이자, 신전 측 참가자를 뭉개주리란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참가자는 격렬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주 성질 사나운 하얀 고양이와 함께.
“캬아아아옹!”
[이거 놔라, 어딜 붙잡아!]발톱을 드러낸 엘라가가 헬무트의 팔을 파바박 긁었다. 어찌나 세게 긁는지 옷에 구멍이 날 참이다.
헬무트는 엘라가의 뒷덜미를 붙잡고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진정 좀 해.”
순수한 악력으로 붙잡기엔 엘라가의 본질도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니 힘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비스를 썼다간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엘라가가 마법을 깨고 본모습을 드러내 버릴지도 몰랐다.
처소에서 그랬다면 수습하면 그만이겠지만, 공교롭게도 여기는 길거리였다.
실랑이하는 그들을 보고 수군대는 이들이 있었다. 무투회를 관람하러 온 한 무리의 여성들이었다.
“어머, 저기 좀 봐! 무투회 출전자가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어!”
“어떻게 저 작고 귀여운 고양이를!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렇게 싫어하지?”
“실력이 좋아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범죄자 아니야?”
“혹시 잡아먹으려는 걸 수도 있어! 동쪽의 소국에서는 관절염에 좋다고 고양이를 잡아먹는대.”
“세상에! 저 예쁜 아이를. 얼마나 겁먹었을까! 우리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외형만으로 보자면, 가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헬무트는 블랙호크에나 어울릴 법한 범죄자 상이었다. 오해를 부르고도 남았다.
“저기요! 고양이를 놔 주세요!”
결국 애묘가 한 명이 용기 있게 나섰다. 헬무트는 캬옹거리며 난리 치는 엘라가를 애써 품으로 껴안으며 내뱉었다.
“제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약을 먹기 싫어서 이러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 작은 아이를 함부로 다루시면……. 정말 그쪽이 키우는 고양이 맞아요?”
의심의 시선이었다. 남의 눈에 별로 신경을 쓰고 살지 않는 헬무트지만, 소동물 학대자로 취급받는 건 사양이다.
헬무트는 망토로 엘라가의 몸을 덮어 품에 가두었다. 그는 엘라가의 머리에 대고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다시 들어가지.”
성격도 급하지, 어디선가 신성력의 발현이 느껴지자마자 숙소를 박차고 뛰어나온 엘라가였다. 꼭 새소리를 들은 고양이처럼 사냥본능에 눈이 멀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엘라가를 번개같이 쫓아 나온 헬무트가 낚아챘다.
꼬리를 붙들자 바닥에 패대기쳐진 엘라가는 고양이로서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고양이 몸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본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키우는 고양이가 맞아요. 약 먹기 싫다고 도망쳐서 많이 흥분한 상태라. 좀 거칠게 보였나 보군요.”
뒤늦게 나타난 아레아가 애묘가 여인에게 말했다.
비범하게 아름답고 신비로운 기운을 풍기는 그녀의 모습에 거기에 있는 모두가 바로 설득되어버렸다.
그녀를 위시하여 헬무트에게 비난의 눈길을 던지고 있던 이들이 마지못해 돌아섰다.
헬무트는 뭔가 부당한 일을 겪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들어가자.”
다시 처소로 돌아가는 동안 엘라가의 발작은 그칠 줄 몰랐다. 아마 망토 안쪽이 너덜너덜해져 있을 거다.
헬무트는 창문 없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엘라가를 풀어주었다. 풀려난 엘라가가 헬무트의 다리를 손톱으로 날카롭게 긁었다.
따끔한 통증에 헬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해.”
[왜 막아서는 거냐! 겁쟁이 녀석! 이제와서 신전이 두려워지기라도 한 거냐?]신전이 두렵진 않은데, 엘라가가 사고를 칠까 봐 좀 두렵긴 한 터였다.
“대체 왜 그리 흥분한 건지 궁금한데.”
아스카가 맞상대할 녀석이 성기사라는 건 헬무트도 아레아도 아는 터였다. 신성력을 이렇게 드러낸 걸 보면, 아스카를 상대로 하려면 본 실력을 보여야 했던 모양이었다.
[어떤 녀석이 내 영역에서 더러운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잖아! 내 영역에서!]옆에서 팔짱을 끼고 선 아레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가 당신 영역이 되었죠?”
[내가 그동안 돌아다니며 냄새를 묻히고 다녔다! 내 영역이다!]엘라가의 공격성은 결국 영역을 침범당한 포식자의 적개심 탓이었다.
헬무트와 아레아는 기가 막힌 듯 서로를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