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0
39
헬무트
39화
‘이 큰놈을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잘랐지?’
잘린 단면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끈했다.
‘이게 비스란 건가?’
엄청나게 단단한 몸을 가진 원숭이 마물은 꼭 도살장에서 썰린 고기처럼 둘로 나뉘어 있었다.
“그래도 워낙 몸이 커서 털가죽은 잘 건지면 쓸 만…… 응? 이건 뭐지?”
핀은 무심코 하얗게 튀어나온 덩어리 같은 걸 발로 건드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선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난 핀이 바닥에 우웩 하고 토사물을 쏟아 냈다. 구역질하고 난리가 났다.
그쪽으로 다가선 우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소화가 덜 됐구만.”
헬무트와 싸우기 전 놈이 삼켰던 뷰탄 상회의 사람들. 그 시체가 토막 난 채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핀이 건드렸던 건 위장에서 녹다 만 사람의 손이었다.
“조금만 빨리 도착했어도, 아니, 조금만 더 버텼어도 살았을 것을.”
우터가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핀은 질색을 하면서 그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물 사체는 그럭저럭 적응됐지만, 훼손된 사람 시체만큼은 도저히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흡사 전쟁 통에서나 볼 법한 시체들이었다.
마물 사체에서 쓸 만한 부위를 대강 모아 낸 용병들은 이제 타리크 용병단의 시신을 한곳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가슴팍에 달린 타리크 용병단 배지와 검 같은 유품을 챙기고, 시신은 옷을 입은 그대로 한곳에 쌓았다.
잠자코 상황을 관망하던 헬무트가 물었다.
“뭐하는 거죠?”
“이대로 짐승 밥이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묻어 줘야지. 이렇게 숲이 무성한 데 선 불로 태울 수도 없으니까. 유품도 뷰탄 상회를 통해서 타리크 용병단 쪽에 전달할 생각이다.”
“배신하긴 했어도 같은 용병이야. 최소한의 가는 길은 수습해 줘야지.”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죽은 이들에 대한 인간들의 의식인 것 같다.
곧 쌓아 올린 시체 옆으로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그 안으로 시체를 밀어 넣고 덮은 용병들은 잠시 묵념했다.
이 숲을 지나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남은 여정이 순탄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
마일즈는 저녁 무렵에야 의식을 되찾았다. 마차를 수습하여 야영할 곳을 찾아 자리를 잡은 후였다.
흐릿한 시선을 위로 두고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긴…… 어디지? 이승인가.”
“마일즈 님.”
“오, 자네, 퓌엔이로구만.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내 자네한테는 정말로 미안했네. 파울 놈의 협박에 넘어가서 그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자네와 페이스 용병단을 그렇게 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마일즈 님.”
퓌엔이 난감하게 인상을 구겼다. 마일즈는 아무래도 자신이 죽어 저승 가는 길목에서 퓌엔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삶의 독기와 계산속이 다 빠져 쇠약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어서라도 사과를 전할 길이 있어서 다행이네. 신께서 내게 기회를 주신 게지.”
“마일즈 님!”
타냐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마일즈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었다. 타냐가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안 죽었으니 그만하시고 정신 차리세요.”
말을 술술 내뱉는 거 보면 돌아갈 머리는 있는 듯하다.
얼떨떨해 있던 마일즈는 곧 현실감을 깨우쳤다. 그는 양손을 들여다보며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지? 자네들은 어떻게.”
“죽으라고 버려 뒀는데 살아 있으니까 이상하세요?”
마일즈가 콜록콜록 헛기침해댔다. 그래도 죄책감을 느끼는 그였다. 타냐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동료분 한 명도 살아 있어요. 중상이라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지만요.”
그녀가 턱짓으로 지목한 곳엔 익숙한 얼굴의 상회 사람이 누워 있었다.
4명이었는데 둘만 남았다. 살아남은 것만으로 다행인가? 그의 존재를 확인한 마일즈는 안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어떻게라뇨,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우린 살아남았고, 급히 뒤를 쫓아가니 상행은 전멸 직전이었죠. 그나마 목숨 건진 걸 다행으로 아세요.”
타냐는 많은 부분을 그가 알아서 해석하도록 생략했다.
헬무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모두가 함구하길 바랐다. 그 때문에 다들 입을 조심했고 살아남은 타리크 용병단의 4급 용병도 헬무트가 한 일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우리들이 마일즈를 구했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뒤늦게 와서 시신을 수습한 것밖에 한 적 없는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긴 찔렸던 것이다.
“자네들이 그 큰놈을 해치운 건가?”
“놈은 죽었어요. 그러니까 안심하셔도 좋아요.”
이번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오, 맙소사.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는 마일즈를 향한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상체만을 일으킨 마일즈 앞에 퓌엔이 고개를 들이댔다.
“깨어나셨으면 우리 거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지요.”
물이나 먹을 것을 줄 만도 한데, 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일단 의뢰품은 챙겨 뒀습니다. 사람이 타고 있던 마차가 부서진 거라 짐이 있는 쪽은 비교적 멀쩡하더군요.”
“그, 그거 정말로 다행이로군.”
현실감을 되찾았다는 건 일에 대해 생각할 여력도 있다는 뜻이다.
반색하는 마일즈에게 퓌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여덟.
“우리 쪽에서 요구하는 것은 이번 상행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8할. 정확한 금액은 상회계약서로 확인하지요.”
그 말이 정신을 완전히 돌아오게 한 것 같았다. 마일즈는 기겁했다.
“그, 그건 너무한…….”
“그쪽도 죽은 사람이 있고 우리 쪽은 그래도 다 살았으니까 8할만 요구하는 거요. 의뢰를 이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아시지요. 목숨까지 구해드렸는데 전부를 요구하지 않는 게 어딥니까.”
마냥 사람 좋은 줄만 알았던 퓌엔이 이번만큼은 분명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태도는 드물게도 고압적이었다.
“죽은 이들에게 보상을 해 주고 나면 적자일세.”
“그건 그쪽 사정이지요. 입 다무는 값을 안 받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겁니다.”
“그럼 7할로…….”
“여기서 혼자 가실 수 있겠습니까? 저 의뢰품들을 가지고?”
협상 따윈 허락하지 않겠단 의지가 느껴졌다. 마일즈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여기다가 지장을 찍으시지요. 내친김에 못 박아 둡시다.”
마일즈는 얌전히 서류에 서명했다. 따지고들 기력도 없어 보였다.
마로스가 모닥불 쪽에서 뜨끈한 차를 퍼 와서 내밀었다. 목을 축이는 마일즈에게 그가 물었다.
“그럼 이제 들어봅시다. 무슨 물건을 어디로 전해 주는 의뢰이길래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의뢰품은 하나같이 상자에 넣어진 채 천으로 싸여 납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기에 뜯어보진 않았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퓌엔도 알지 못했다. 용병단 대표들에게 대충 어떤 의뢰품인지 설명하긴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해 주진 않았다.
전쟁 무기? 비밀리에 빼돌리는 군자금? 의문만 한가득이었다.
마일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해. 우리 뷰탄 상회가 흔들릴지도 모르네. 자네들도 모르는 게 나을 거야.”
“우리 용병단이 입 무거운 건 알잖습니까. 말해 보시지요. 나가서 떠벌릴 녀석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로스는 슬쩍 모닥불 쪽을 쳐다보았다. 핀이 타리크 용병단의 4급 용병을 신나게 부려먹으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들리지 않을 거리다.
마일즈가 소리를 죽여 하나의 이름을 말했다.
“안티올.”
“아, 그자는?”
“그래,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강력한 마법사지. 알다시피 그자는 신전과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아. 그가 실험에 필요한 진귀한 재료들을 자신에게 가져다 달라고 의뢰했네. 사실 받아들이기 쉬운 의뢰는 아니었어. 신전과 척을 졌다간 그쪽 거래도 끊길뿐더러 조사를 받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안티올은 우리 상회와 특별한 인연이 있지. 그가 위기에 빠진 상단주님을 구해 준 적이 있어서, 위험한 걸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네.”
“그리고 의뢰비도 많이 불렀겠죠. 마법사들이야 돈을 워낙 잘 버니까.”
“왜 비밀로 했는지 알겠나? 모른 척하는 것보다 모르는 게 나으니까. 알고도 의뢰를 수행한 걸 들키면 나중에 신전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 우리 딴에는 용병들을 신경 쓴 거라네.”
“확실히 입단속은 해 둬야겠군요.”
타냐와 퓌엔, 마로스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 있는 헬무트도 아마 듣고 있겠지만, 어디다 말할 성격은 아니었다. 또 그에게도 비밀은 있으니까.
“신전이야 자기네 성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으니 어차피 용병단을 고용하지도 않는 자들인데, 틀어져 봤자.”
“용병 따위가 거슬리는 짓을 했으니 쓸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들은 원래 그런 자들 아닌가.”
주신 루멘의 신전은 그 어떤 강대국이라고 해도 거스르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막대한 힘을 보유한 집단이다.
엄청난 수의 신도들, 자체적인 무력과 영토. 모든 걸 고루 갖추고 각국의 정세에 개입했다.
다스리진 않으나 군림한다. 지상에 마왕이 강림하여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가려고 했던 천 년 전 그때, 인간들을 결집시켜 마왕을 물리친 게 신전이었다.
세상을 지켜 낸 신전은 힘과 권력을 모두 손에 넣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이 세상을 위하여.
그것은 절대적인 명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신전은 그때와 같지 않았다. 자기네들의 규칙과 규율로 세상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끼치려는 신전. 그들의 일부는 부패했고, 자유를 억압했다.
“여하간 신전의 이목에 걸리면 안 되기에, 이렇게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숲을 통해서 은밀하게 의뢰품을 전달하길 바란 거로군요.”
“신전에서만 나는 특별한 약초나, 신성 마법이 깃든 비석 같은 것이 안티올의 손에 들어갔다는 게 알려지면 그때는.”
“뷰탄 상회가 박살 나겠군요.”
“그래, 자네들도 이걸 들은 이상 한배를 탄 몸일세.”
그 와중에도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이 의뢰에서 발을 뺄 수는 없다. 끝까지 완벽하게 매듭지어야 했다.
‘다 죽어가는 꼴을 해선……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군.’
타냐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래서 상인들이 영 내키지 않는 것이다.
“오면서 모은 마물들의 사체도 의뢰품과 함께 처리할 수 있을 거네. 안티올이라면 분명히 좋은 값을 치러 줄 테니.”
“그렇겠죠. 그자가 마법 실험을 통해서 신성 결계를 부술 방법을 찾는다는 건 이미 소문난 일 아닙니까.”
마력을 통한 마법은 신성력을 쓰는 신성 마법과 달랐다. 마력은 마기처럼 신성력에 완전히 배척되는 힘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섞이지도 않았다.
“신성 결계를 부술 방법은 왜?”
타냐가 화들짝 놀랐다. 어느덧 헬무트가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파헤의 숲에 있는 신성 결계처럼 강력한 결계는 아니지만, 몇몇 대도시에는 신전에서 설치한 결계가 있지. 그걸 통해서 마법사들의 출입을 읽어 내거나 저지할 수 있거든. 위험 분자를 통제하듯이 말이야.”
“신전에서는 마법은 결국 부정한 힘. 신성력과 마기 중간에 위치한 이도 저도 아닌 중간으로 언제든 마왕 쪽으로 기울 수 있다고 봐. 신성 마법은 신전이 독점하고 있고 널리 퍼져 유용하게 쓰이는 건 마법이다 보니까 노골적으로 탄압하진 않지만 분명히 좋아하지는 않지.”
“신성 마법 외에는 검사들의 비스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잖아.”
“초월적인 힘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걸로 충분하다는 식이지.”
말하는 걸 들으니 신전에 대한 불만이 제법 높아 보였다.
“하지만 어쩌겠어? 단일 집단으로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건 결국 신전인 것을.”
“각 나라 잘나신 군주들도 신전의 눈치를 보는 판국에 어쩔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