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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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아는 헬무트보다 쉬운 상대를 만나, 곱게 4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역사상 이 같은 대회에서 마법사가 달성한 최고의 성과다.
헬무트의 이번 상대 같은 자를 만났다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아레아는 내내 대진운이 좋았다.
마법사로서 까다로운 상대를 만나지 않았다는 게 특히 컸다.
마법사를 상대해 본 적이 있는 자들이나, 어떤 변수에도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경험 많은 자들.
게다가 아레아는 마법사이면서도 가슴 떨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 검을 들이댄다는 게 죄악으로 느껴질 정도다.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기는 쉽지 않았다.
찰나의 망설임으로 충분했다. 아티팩트로 마법 시동 시간을 단축시킨 아레아는 빠르게 시각을 마비시키며 유리한 구도를 만들었다.
관중 입장에서는 무대 위에 어둠이나 안개가 내리고 뭔가 빛이 화려하게 번쩍거린 뒤, 상대가 쓰러져 있는 모습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마법쇼를 보는 양 흥미진진한 볼거리였기에 모두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올렛! 바이올렛! 바이올렛!’
4강에 진출한 우승 후보 중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아레아였다.
“4강 진출을 축하해.”
숙소로 돌아온 아레아에게 그 말을 내키지 않게 하면서 헬무트는 눈썹을 모았다. 아레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고마워, 너도.”
그 후로 떨어진 짧은 침묵에는 다정한 교감이라기보단,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여유로운 쪽은 오히려 아레아였다.
“이제 대망의 그 순간인가.”
시안이 눈을 빛냈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던 게 언제냐는 듯, 그는 얼마간의 회복기를 거친 뒤 금세 멀쩡해졌다.
이번 무투회에 투입된 치료 마법사는 최고 수준이었다.
단지, 그의 치료를 도맡은 마법사협회의 마법사들이 그가 희귀한 전속성 정령마법사이자 로드릴이란 걸 알아버려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푹 쉬었던 시안은 오히려 살이 올라 탱탱해진 볼에 윤까지 돌았다.
정신적인 충격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생기 도는 얼굴이었다.
“누가 됐든 우승은 그 새끼만 아니면 돼.”
그에 반해 여전히 앙심을 품고 있는 아스카가 툴툴거렸다.
“넌 탈락해서 아버지한테 좀 혼났어?”
탈락 즉시 파르네세 대공에게 불려갔던 아스카였다. 그는 한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무투회를 핑계로 후계자 수업을 멀리했으니, 몰아서 고난을 치른 것이리라.
아스카가 콧방귀를 뀌었다.
“혼나긴 무슨, 아버지가 참가했으면 본선에 진출이나 했으려나 몰라.”
이번 무투회는 보상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예선부터 치열했다.
파르네세 대공도 황실 기사단 못지않은 실력을 지녔지만, 실전 경험이 없는지 오래되었다. 대공이 검을 휘두를 일이 뭐가 있겠는가.
파르네세 대공에겐 직무가 우선이고 검은 부수다. 한창 혈기왕성한 현역인 아스카의 실력은 황실 기사단에서도 발군이었다.
그가 부족해서 아닌, 강한 상대를 만나서 운 나쁘게 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난 참고로 아레아를 응원할 거야. 아레아, 넌 마법사의 자존심이야! 날 대신해서 우승해라! 이겨라, 바이올렛! 이겨라, 보라 마녀!”
시안이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며 촐싹댔다. 아레아는 그를 향해 신랄하게 대꾸했다.
“패배자의 대리만족을 위해서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진작 탈락한 주제에.”
“헬무트, 들었지? 저 못된 여자한테 본때를 보여줘라! 어둠의 힘을 보여주라고!”
태세 전환이 빠른 시안이었다. 아스카가 남의 일 보듯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둘이 싸우는 건 처음이지 않아? 헬무트, 너 자신은 있냐?”
아레아의 시선이 헬무트에게 꽂혔다.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다는 듯이.
헬무트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여기서 잘 골라서 대답해야 한다. 실수하면 피곤해진다.
자신 있다고 대답하면 아레아의 기분이 상할 것이고, 자신 없다고 대답하면 나약해 보인다.
헬무트는 결국 돌려 말하는 것을 택했다.
“……결과가 말해주겠지.”
아스카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뭐야, 너 눈치 봐? 이래 가지고 무대에서 제대로 싸우기나 하겠어?”
“네 미래가 보인다. 잡혀 살 미래.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 너 그러다 평생을 그렇게 잡혀 산다.”
시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헬무트는 침묵으로 답한 데 반해, 아레아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 둘을 노려봤다.
마치 떼어놓아야 할 남자친구들의 질 나쁜 악우들을 보는 것처럼.
“시끄러우니, 다들 조용히 해.”
[마물도 짝을 이루는 경우 종종 수컷이 암컷한테 진다.]슬며시 다가온 엘라가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헬무트는 이번에도 침묵으로 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4강전, 즉 준결승전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
“오늘 경기가 끝날 무렵, 리노사 대공이 이곳에 입성할 예정이라더군. 결승전을 관람하러 오는 거겠지.”
준결승전이 열리는 아침, 아스카가 헬무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헬무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틀 뒤 결승전이 있다. 리노사에서 이곳까지는 마법을 사용하면 금방이지만, 리노사 대공이 단순히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서 참석하는 건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제 이미 오셨고, 황제 폐하께서도 내일 중에 이곳에 당도할 거야.”
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건 이 무투회의 목적을 달성하는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양국의 지배자는 결승전을 함께 관람하여 제국과 리노사, 양국의 우호가 돈독하다는 것을 온 사방에 보일 것이다.
그리고 신전은 그것을 망치기 위하여 자신들의 가장 강력한 성기사를 파견했다.
뒤로 수를 쓴다면 잡아내서 도리어 유리하게 할 수 있겠지만, 신전에서 이렇듯 정면으로 돌파해오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다.
양국의 화합을 다지기 위하여 공동으로 무투회를 개최한다. 그럴듯한 발상이었지만, 그것이 신전에게 기회를 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고고한 신전이 이렇게까지 움직인 적은 드물었으니까.
그것은 그만큼이나 신전이 제국에서 내몰리는 현재의 사태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신전도 예상하지 못한 또 한 가지. 헬무트의 존재. 이것은 리노사 대공이 헬무트를 위해 준비한 기회이기도 하다.
샤를로트의 말처럼 그가 공정한 자라면, 헬무트는 우승의 대가로 그가 바라던 것을 손에 넣게 되리라. 그게 헬무트가 만족스러울 만큼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생각대로 안 된다고 해도.’
헬무트의 검은 눈에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이미 결정했다.
패자로서 순순히 쓰러지거나 뒷길로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다리언이 가지 않은 그 길을, 그는 주저 없이 밟을 것이다. 힘으로서 자신을 관철하는 비정하고 험난한 그 길을.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피가 강을 이루어 수많은 목숨이 발아래 스러질지라도.
다리언과는 달리, 헬무트에게는 이제 지킬 것이 있었으니까.
‘내가 언제 적을 베는 데 망설였던가.’
스승인 자가 그것을 원했기에 가르침에 따라 살았을 뿐. 헬무트의 본성은 마물에 가까웠다.
새삼 적을 베는 데 그게 인간이라 하여 구애받을 만큼 나약하지도 무르지도 않다.
그는 스승과 같은 눈높이에 올라, 족쇄를 벗어던졌다.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보았다.
늪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목도하고도 기어 올라왔다.
파헤의 숲에 모든 마를 가두고자 하는 루멘의 의지는 헬무트의 의지를 능가하지 못했다.
이젠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세상을 향해 검을 들어야만 한 대도, 멈추지 않으리라.
아스카는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말했다.
“아마, 리노사 대공비도 함께 올 모양이야.”
그 말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에 알 수 없는 울림이 일었다. 뜨겁게 일렁이는 무언가.
어머니. 아니, 이젠 그저 적에 불과한.
차가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미하엘은?”
아스카는 파르네세 대공이 들었다면 바로 그를 혹독한 예법 수업에 쳐넣을 껄렁한 말투로 답했다.
“그건 잘 모르겠어. 제가 싼 똥 샤를로트가 치우는 자리니 본인도 수습하러 오고 싶으면 올 텐데. 아마 녀석의 건강 상태에 달리지 않았을까?”
그 저주받았다 싶을 만큼 허약한 몸뚱이는 여전한 모양이다.
“가야 할 시간이로군.”
헬무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스카가 그를 향해 얄밉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고난의 시간이지. 잘 극복해 보라고.”
악우의 입장에서는 그저 즐길 거리일 뿐이다.
*
“기분은 어때.”
아레아는 웃고 있었다. 그늘 한 점 없는 환한 미소. 중대한 마법연구를 성공리에 끝마쳤을 때야 보이는 미소다.
왜 그런 표정을, 하필 자신과의 전투를 앞둔 이때 보이는가.
‘전혀 공평하지 않아.’
헬무트는 그녀를 한 번 불만스럽게 쳐다보고,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여기에 오기까지 충분히 각오를 다졌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리 밟아 다진 마음도 그녀를 보니 도리 없이 흔들린다.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베거나 급소에 검을 대고 패배를 승복시킨다.
그 간단한 과정이, 검을 들이민다는 전제부터 대단한 역경이 되어 버렸다.
실력 있는 마법사와 싸워본다는, 평소라면 흥미롭게 여겼을 법한 그 경험은 ‘아레아’라는 이름 앞에 고난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 와서, 아레아를 마주하고 나서야 헬무트는 다시금 선연히 실감했다.
모든 것을 벨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검 앞에, 불가능한 하나가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이 여자라는 것을.
“헬무트?”
“안 좋아.” 그가 툭하니 내뱉자, 뭐가 우스운지 아레아는 소리 내어 웃었다.
“솔직하네. 착한 아이야.”
“……왜 내가 아이지? 우린 나이가 같아.”
헬무트는 단호하게 사실관계를 지적하고 들었다. 아레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착한 아이라서 상을 주려고 했는데.”
‘상……. 우승상을 말함인가?’
이것은 준결승이지만. 기권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희망을 품은 헬무트는 바로 물었다.
“뭐지?”
“제의를 하나 할게.”
부드러운 말투였다. 아직 대회가 시작하기 전이었다.
“너도나도 납득할 만한, 승부를 가릴 규칙을 정하자는 제의야.”
헬무트의 눈빛이 그녀를 향해서 깊숙이 꽂혔다.
이쪽도 그렇게까지 냉혈한은 아니다. 그가 했던 고민을 아레아 또한 했었다.
아레아는 헬무트가 이제껏 만났던 그 어떤 대회 상대보다도 자신을 공격하는데 망설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정면대결으로는 안 된다고 해도, 아레아에게 헬무트를 이길 만한 치사하고 음습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 방법은 차치하고 서라도, 아레아로서도 헬무트한테 공격 마법을 퍼붓는 건 내키지 않았다.
‘어쨌든 승부는 내야 하지.’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이것이다. 양쪽 다 상처 입지 않고, 승패를 가리는 방법.
아레아의 입술이 열렸다.